무량수전은 부족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
무량수전 내부를 들어가면 굉장히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전각 안에 불상이 한분 모셔져 있는데, 건물의 가운데 앉아서 남쪽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구조이다(사진5-1). 굉장히 특이하기 이를데 없다. 혹자는 이분이 아미타불이라서 서방에서 왕생자들을 바라보는 구도로 배치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전국의 모든 아미타불이 이런 식으로 동향 배치를 하고 있어야 한다. 불교 건축의 교과서로 불리는 불국사의 극락전만 해도 아미타불은 남향을 하고 있다(사진5-2).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무량수전의 외관과 연관이 있다. 무량수전 앞마당이 넓지 않아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내부의 불상을 이런 식으로 배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법당 내부로 많은 인원을 들일 수 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안양루에서 계단을 밟고 무량수전 영역으로 올라설때 석등이 불전의 정면에 위치하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 역시 불상의 좌향과 관련이 있다. 석등을 서쪽에 배치함으로써 참배객들의 동선을 동쪽 문으로 유도한 것이다(사진5-3).
무량수전의 뒤로는 이렇게 큰 산이 받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건물이 물러나는데 어려움이 있다(사진5-4). 그렇다고 이 곳을 깎아내면 풍수적인 기운이 훼손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면서 자연과 공존하는 것을 택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다시 내부로 들어와서 불상을 살펴보자. 불상은 불전 서쪽의 수미단 위에 모셔져 있다. 이 분의 정식 명칭은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이다. 흙으로 빚어서 만든 불상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옷주름이 상당히 섬세하다. 광배가 몸체에 붙어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떨어져 있지만 정면에서 보면 몸에서 빛이 나오는 것 마냥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는 마치 석굴암 본존불의 두광을 연상시킨다. 광배와 몸체 모두 멋지고 섬세하다(사진5-5).
이 불상의 제작 시기에 관해서는 고려 초라고 하는 이도 있고, 통일신라 시기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고려 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통일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고려 초의 불교조각은 지역별로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그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게 아닐까 추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가 되었든 통일신라의 양식이 강하게 묻어나는 것은 맞다.
특이한 것은 아미타불인데도 수인(손갖춤)을 보면 석가모니불처럼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사진5-6). 아미타불이라면 대개 아미타 구품인을 취한 모습으로 조성되는게 일반적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표현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사진5-7). 그래서 정말 이분이 아미타불이 맞냐는 논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한 탓에 학자들이 연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여러 주장들만 무성하지 이렇다할 강력한 근거를 갖춘 주장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부석사 성보 박물관에 가면 이런 녹유전이 있다고 한다(사진5-8). 벽돌에 녹색 빛의 유리를 입혀서 만든 벽돌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무량수전 내부가 전부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지만 과거(1916년 보수공사 이전)에는 전돌(벽돌의 일종)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아미타불의 주위로는 이런 녹유전이 깔려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되어 화려하기 그지 없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표현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미타불 주위를 장식했던 화려한 녹유전들은 일제가 반출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사진에 보는 것처럼 상태가 나쁜 일부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법당에 마룻바닥을 까는 것이 아니라 전돌을 깔았다고 한다. 그때는 사찰의 경제력도 좋았고 좌식 생활문화가 일반화 되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온돌 같은 좌식 문화가 확산되고 비로소 법당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것이 가능해졌다. 조선시대 부터는 법당 내부에 마루가 깔린다.
불상 머리 위로는 닫집이라는 구조물이 보인다(사진5-9). 불상의 위쪽으로 작게 건물의 지붕처럼 만든걸 닫집이라고 한다. 보개 혹은 당가라고도 하는데, 부처의 권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것은 궁궐의 정전에 가도 볼 수 있다(사진5-10). 적어도 임금 정도는 되어야 누릴 수 있는 호사인 것이다. 부처님은 최소한 임금과 동격 혹은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닫집도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무량수전 내부에 신도 한명이 지키고 있길래 눈치가 보여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진짜 성능좋은 카메라가 있으면 멀리서 줌으로 땡겨 찍어보겠는데 그런 고급 카메라도 없다. 유명한 사찰의 법당에 가면 상주하는 사람이 내부 사진을 못찍게 저지한다. 석굴암처럼 문화재 보호 차원이라면 이해하겠는데 그보다는 종교적인 이유인거 같아서 조금은 아쉽다. 마치 뭐랄까
"거룩한 부처님이니 함부로 사진 찍지마"
이런 느낌이다. 불교 관계자가 아니라서 정확한 사실은 알 길이 없지만,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법당 사진을 못찍게 해서 관리자와 실갱이가 벌어지고 그로 인한 불만을 토로한 글이 많았다.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면 왜 그렇게 하는지 납득이 되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모습도 없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가지 단면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붓다가 지금 살아서 돌아온다면 본인의 사진을 못찍게 했을까? 요즘엔 SNS시대가 아닌가. 오히려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퍼지게 하려고 권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P.S : 녹유전에 관하여 잘못 적은 부분이 있어서 취소선 표시를 했습니다.
녹유전은 일제가 반출해가지 않았으며 현재도 남아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1990년대까지는 무량수전 내부에 전돌이 깔려있었다고 합니다. 녹유전은 불상이 있는 불단 주위에만 깔려있고요. 90년대 이후에 마룻바닥을 까는 공사를 한 모양입니다. 현재 무량수전 내부에 깔려 있는 마루를 걷어내면 옛 모습 그대로 전돌과 녹유전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참고한 자료는 '다시 읽는 부석사' 라는 책입니다. 2017년까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서 학예사로 근무하셨던 김태형 선생님이 쓰신 책이라서 가장 신뢰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잘못된 정보를 사실인양 기재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