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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Mar 04. 2020

부석과 선묘 이야기

부석사의 창건 설화

무량수전 서쪽에는 거대한 돌이 하나 놓여있다(사진6-1). 부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돌인데, 부석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다. 중국의 당나라부터 송나라 초까지 활약한 고승의 일대기를 적은 송고승전이라는 책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6-1. 부석사의 부석. 한자를 그대로 풀어보면 떠있는 돌이라는 뜻이다.





"신라의 승려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그 유명한 해골물 사건 이후 원효는 깨달음을 얻어 신라에 남고 의상 혼자서 당나라에 가게 된다. 당나라 등주에 도착한 그는 잠시 어떤 신도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 집에는 선묘라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의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의상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리고 만다. 그 이후 선묘는 의상을 유혹하고자 하였으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던 의상은 이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에 탄복한 선묘는 평생 스님를 위해 기도하면서 살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후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 스님을 찾아가서 화엄종을 배우고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임박하자 이를 알리기 위해 신라로 귀국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 신세를 졌던 신자의 집에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떠나는데,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선묘는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의상을 찾아나섰지만 이미 그가 탄 배는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죽어서 스님을 지키는 용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뒤 바다에 투신하게 되고, 실제로 용이 되어 의상 스님의 무사 귀환을 돕는다. 676년, 의상대사는 지금의 부석사 자리에 사찰을 세워 화엄종의 뜻을 펴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미 500인의 권종이부(여러가지 해석이 있음)들이 자리잡고 저항을 하였기에 쉽지 않았다. 그러자 선묘는 커다란 돌로 변하여 공중을 날아다니며 그들에게 위협을 가했고, 이에 권종이부들은 놀라 달아났다. 그렇게 그녀의 도움으로 의상은 이곳에 화엄종찰인 부석사를 세울 수 있었다."





그때 날아다녔던 그 돌이 이 부석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석에 담긴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 대표적인게 원래 이 지역에 거석을 숭배하는 토속신앙이 있었는데 부석사를 세우면서 이를 흡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현재로써는 자료의 부족으로 알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한편 조선시대의 학자 이중환도 본인이 저술한 택리지에서 이 부석을 언급했는데, 양쪽 끝에서 실을 잡고 움직이면 걸리는 것 없이 통과한다며 실제로 떠있다고 서술하였다. 이 바위가 실제로 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재미있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부석에는 큼지막하게 '浮石'이라고 쓰여있다(사진6-2). 옆에는 '선원록 봉안사 낭원군 계유동' 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6-3), 조선시대 이곳을 방문했던 왕족인 낭원군 이간(1640~1699)의 글씨이다(사진6-3). 계유년은 1693년이다. 그는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을 쓴 이력이 있다. 1690년 그의 형인 낭선군 이우(1637~1693)가 태백산 사고에 선원록을 봉안하기 위해 각화사로 향한 적이 있는데 이 각자로 보아 동생인 낭원군도 같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낭선군은 무량수전 현판이 공민왕의 글씨임을 고증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3년 뒤인 1693년에는 낭원군 혼자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6-2. "부석"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진 각자


"부석" 외에도 주변에 여러가지 글자가 새겨져 있으나 이끼가 많이 끼어서 알아보기 힘들다 ㅜㅜ


6-3. '선원록 봉안사 계유동' 이라 새겨진 각자. (출처 : 다시 읽는 부석사, 김태형 저)



무량수전의 뒤쪽에는 아담한 한칸 짜리 전각이 하나 있다(사진6-4). 선묘각이라 불리는 이곳은 선묘낭자의 초상을 모시는 공간이다. 내부에는 그녀의 초상과 부석사 창건 설화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그림으로 걸려있다(사진6-5). 그림은 최근에 새로 그린 모양인데, 인물의 용모도 그렇고 채색이나 분위기가 너무 요즘 느낌이나서 이질감이 든다. 초상화에 그려진 선묘의 모습은 고개를 빳빳이 든채 용을 타고 있는 모습인데,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과 경직된 자세 때문에 의상에 대한 사모의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근엄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권력자의 모습에 더 가깝다는 인상이다. 이보다는 예전에 걸려있던 선묘의 그림이 지고지순한 여인의 마음을 더 잘 표현한 것 같다(사진6-6).  


6-4. 선묘각의 모습. 아담한 전각이다.



6-5. 왼쪽부터 선묘의 초상, 용이 된 선묘가 의상대사의 뱃길을 호위하는 모습, 부석사 창건시 바위를 띄우는 이적을 행하는 모습


6-6. 예전의 선묘 초상. 현재 선묘각에 모셔진 초상화보다 더 선묘 다운 느낌이든다. 


지금까지  무량수전과 안양루, 석등, 부석  같은  그 주변  영역에  있는 문화재들을 살펴보았는데,  다음부터는 이곳에서 벗어나 또 다른 고려시대 건축물인 조사당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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