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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Mar 07. 2020

부석사 조사당과 선비화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를 모신 공간

의상대사와 선묘 낭자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사실이라기보다는 다소 허구가 섞인 전설에 가깝겠지만, 적어도 선묘가 품은 사모의 감정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한 스토리가 담긴 부석과 선묘각을 뒤로하고 떠나자니 아쉽기만 하다. 


이제 그녀가 그토록 사모했던 의상을 만나러 조사당으로 가보자. 무량수전의 동쪽을 보면 조사당으로 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그 오솔길의 초입에는 듬직하게 생긴 탑이 하나 서있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이다(사진7-1). 비록 상륜부가 없고 옥개석이 많이 훼손된 게 흠이긴 하지만 자태가 꽤나 늠름하다. 탑의 비례감도 비교적 훌륭한 편이다. 이 탑과 무량수전은 특별한 관계가 없어 보인다. 무슨 이유로 금당과 관련이 없는 이 곳에 탑이 홀로 서있는지 알 수가 없다. 부석사가 세워질 당시 이 탑 주변에 불전이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주변 지형상 건물이 들어설만한 자리는 아니다. 


탑의 옆에는 훼손된 석등이 하나 서있다. 상대석과 화사석이 사라지고 없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이 석등도 지대석 밑으로 기초를 다지기 위해 돌을 깔았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불교 건축에서 금당과 탑, 그리고 석등은 원래 함께 세워지는 게 일반적이다. 답사 당시엔 미처 몰랐는데 이 글을 쓰면서 사진을 보니 탑 주변으로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든 흔적이 보인다. 축대를 만들었다는 얘기는 이 탑을 지으려고 경사진 지형을 평평하게 만들었다는 말인데. 이 탑의 의도가 뭔지 굉장히 궁금하다. 이 주변을 발굴해보면 뭔가 금당 같은 건물의 흔적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살짝 들지만, 무량수전이 있는데 굳이 이 자리에 또 법당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금당은 불상을 모신 불전, 법당과 같은 말입니다)


참고로 부석사 성보박물관에서 학예사로 근무했던 김태형은 본인의 책 '다시 읽는 부석사'에서 이 탑이 의상 스님의 부도탑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이 곳이 조사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초입이고, 송고승전에 의상의 부도탑이 있다고 언급한 부분,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부석사 고물대장'에서 이 석등 부재를 선종표석이라고 명명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 부분은 학계에서 좀 더 많은 연구와 조사를 통해 밝혀줬으면 좋겠다.

7-1.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무량수전의 동쪽 산자락에 서있다. 가운데 사진은 탑에 관한 안내문.



여담으로 부석사를 찾는 분들께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이 탑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무량수전에서 내려보는 것 못지않게 훌륭하다. 오히려 지대가 높다 보니 주변의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서 더 선명한 풍광을 즐길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보이는 경치가 제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사진7-2)

7-2.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경치.



아래 사진처럼 생긴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조사당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은 포장만 돼있을 뿐 등산로나 마찬가지다. 경사가 급한 편이라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한참을 올라가면 이렇게 조사당이 모습을 드러낸다(사진7-3). 몇 안 되는 고려시대 건축물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다면 보자마자 실망을 할지도 모른다. 무량수전의 화려한 모습에 적응되어 있던 탓이다. 외관은 상당히 소박하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넓지 않은 크기이다.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을 모시고 기리는 사당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유교의 사당이 하나 같이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지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7-3. 조사당의 모습.



조사당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맞배지붕이란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인자 모양을 하고 있는 지붕을 가리킨다. 사당 건축에서 많이 사용하는 지붕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맞배지붕의 측면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풍판을 설치하는데 조사당에는 풍판이 없다. 그런 탓에 측면에 보와 도리가 노출되어 있다.(사진7-4) 


도리는 지붕의 서까래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부재인데, 둥글고 긴 모양이며 서까래와 수직방향으로 놓인다.  사진을 보면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7개의 둥근 나무 기둥 같은게 보일텐데 그게 도리이다. 보는 기둥과 기둥을 앞뒤로 연결해주는 부재이다. 도리와는 직각방향으로 위치한다. 아래 사진에 보면 보와 도리가 보인다. 그래도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거 같아 개념을 설명하는 사진을 첨부하였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사진7-5) 

7-4. 측면에서 본 조사당의 지붕 모습. 풍판이 없어서 보와 도리가 노출되어 있다.
7-5. 보와 도리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그림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둥근 모양의 부재가 도리이고 기둥과 기둥을 앞뒤로 연결해주는 기다란 부재가 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조사당은 1916년에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1377년에 중수하였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어서 고려시대 건축으로 인정받았다. 1377년이면 우왕 3년에 해당한다. 무량수전에 비해 시기는 늦었지만 이 역시 중요한 고려시대 건축물이기 때문에 국보 19호로 지정되었다. 


조사당도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주심포 양식의 건축이다. 주심포란 기둥머리 위로 한개의 공포만 올라가는 건축 양식을 의미한다. 앞서 무량수전을 설명한 글에서 주심포 양식이 고려시대에 유행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조사당도 고려시대의 건축이니 그러한 시대성을 띄는 것이다. 


그리고 처마 부분을 보면 이해 안 되는 점이 하나 있는데, 전면의 처마는 부연을 써서 겹처마로 만들었고 후면은 홑처마로 지었다는 것이다(사진7-6). 그러다보니 앞쪽의 지붕이 약간 더 길다. 같은 건물의 지붕인데 왜 앞뒤를 다르게 했는지 내 수준으로는 아직 모르겠다. 부석사의 경제력이 부족해서 한쪽만 겹처마로 한 것인가? 그런게 아니라면 다른 자연 환경적인 원인이 있는 것인지? 알면 알수록 공부할 내용이 너무 많아진다.

7-6.  사진을 보면 앞쪽 지붕이 겹처마인 것을 알 수 있다. 뒤쪽 사진은 미처 못찍었다. 집에 돌아와서 공부하다가 안 사실이다.



조사당의 한쪽 구석을 보면 이렇게 한쪽 구석에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다(사진7-7). 이 안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는데 선비화라고 불린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꽂아넣은 지팡이에서 싹이 터서 지금처럼 자랐다고 한다. 이 나무에는 일체의 물이나 비료를 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지껏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매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나무를 베거나 훼손하는 사람에게는 안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전한다. 실제로 광해군때 경상감사를 지냈던 정조(1559~1623)라는 인물이 이 선비화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는데 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되었다. 1720년에는 문신인 박홍준이 선비화의 줄기를 하나 잘랐다가 후에 죄를 지어 곤장을 맞아 죽게 되었다고 열하일기에 전하고 있다.


또 최근까지는 잎사귀를 따서 차로 끓여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여인들이 잎을 많이 따갔다고 한다. 그들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이렇게 보기 흉한 쇠창살이 설치 되었다고. 

7-7. 쇠창살에 갇힌 선비화의 모습.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 선생도 부석사를 방문하신 적이 있는데, 선비화를 보고 감탄하셨는지 이에 대해 남긴 시가 한 수 전하고 있다. (조사당 내부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빼어난 옥 같은 줄기 빽빽이 절문에 비꼈는데, 

지팡이 신령스레 뿌리내렸다 스님이 일러주네.

석장의 끝에 혜능 선사 조계의 물 닿아 있는가,

천지의 비와 이슬 그 은혜를 빌리지 아니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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