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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May 15. 2020

내게 좋은 카메라가 있다면...

안찍어도 되는 사진을 계속 찍는 이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관람하거나 유적지 답사를 갈때는 항상 카메라를 챙겨간다. 멋진 작품을 보면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진을 찍어두면 글을 쓸때 활용하기도 좋기 때문이다. 미술사 공부를 하려면 작품 사진 찍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있다. 아무래도 책에 실린 도판에만 의존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찰이나 박물관 측에서 사진 촬영을 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사진을 찍는다. 브런치에 글을 쓸때도 가급적이면 내가 촬영한 사진을 사용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다른 곳에서 퍼온 사진을 올린다.


원로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선생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듯 하다. 선생의 블로그 글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서 소개한다.



나의 배낭에는 카메라가 한 대, 그리고 렌즈가 셋 들어있습니다.

조각품이나 회화작품이나 금속공예나 도자기 등과, 건축에 따라

렌즈의 개수는 달라집니다. 조명등을 가지고 가기도 합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카메라는 나의 몸의 일부가 되어 항상 지니거나

메고 다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록에 다 있는데 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느냐? 고 묻습니다. 미술사학자인 나에게는  

카메라는 허블망원경이나 전자 현미경과 같습니다. 건축에서 저 멀리

있는 건축부재나 그림들은 줌망원렌즈를 써서 당겨 찍고,

가까이 있되 세부가 필요한 경우에는 접사로 찍어 확대하여 보면

굉장한 세계를 펼쳐보입니다. 사진 찍을 때마다 경이를 느낍니다.


(중략)


촬영이란 내가 본 것을 찍는 것이고 그 찍은 사진을 가지고 그림 그려서 채색분석하고

단계적으로 스캔하여 많은 분들에게 보여드리고, 논문도  씁니다. 그런 체험을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그 무거운 카메라 배낭을 메고 다니는 것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합니다. 20대 후반부터 가지고 다녔으니 50년 동안 카메라는 나와 한 몸

이었습니다.   


요즈음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교수를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록을 보면

되지 작품을 실제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결혼할 때 사진만

보고 상대를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품을 보고 감동을 느끼거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감수성이 없으므로 작품을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므로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미술사학의 비극입니다. 이것은 지금

세계적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카메라의 위력이나 촬영한

사진을 쓸 데가 없기 때문이고, 작품을 보고 어느 곳을 어느 각도에서 찍을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역사학자가 문헌을 읽을 기초 지식을 지니고 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래동안 카메라를 써보아야 노하우도 알게 되고 기쁨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무거운 것을 왜 가지고 다니세요?"라고 묻는 것은, "왜 살고 있습니까?"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소설을 쓰는데 왜 펜을 가지고 쓰세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오래동안 체험하여 보지 않으면 카메라를 내 뜻대로 다룰 수 없답니다.

카메라는 나에게는 허블망원경이나 전자 현미경과 같은 위대한 도구입니다.


(이하 생략)




카메라를 허블망원경에 비유하다니, 사진기에 대한 애정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렌즈를 3개나 들고 다닌다는 것으로 보아 선생의 카메라는 DSLR인 모양이다. 나는 계속 스마트폰 카메라를 사용하다가 2년전에 카메라를 하나 장만했다. 허접한 똑딱이 카메라이기 때문에 DSLR이나 미러리스에 비하면 성능은 한참 떨어진다. 그런 카메라는 너무 비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을 했지만, 폰카에 비하면 월등히 좋은 성능을 보여주기 때문에 나름대로 잘 사용하고 있다. 

내가 쓰는 카메라 G7x Mark2. 나중에 돈이 생기면 DSLR을 사고 싶다.


그렇지만 똑딱이의 한계는 명확하다. 대표적인게 화각이 넓지 않다는 것이다. 최대 화각이 24mm 밖에 지원되지 않으므로 건축물을 찍을때 아쉬움이 많다. 사찰 답사를 가면 주위의 산세와 전각들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광경을 자주 목격하곤 한다. 그렇지만 사진기의 성능은 내 시야를 따라가지 못한다. 때문에 눈에만 담고 오는 일이 많다. 

지금 카메라로 정전을 찍으면 이렇게 된다. 동서 월랑이 잘려 나온다.
이렇게 하월대 한쪽 구석에서 찍어야 전체가 담긴다


제일 아쉬운 것은 종묘의 정전을 찍으면 양 귀퉁이가 잘려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장중한 모습을 한 화면에 담을 수가 없다. 지금의 카메라로는 이렇게 삐딱한 구도로 찍어야 한눈에 담긴다. 나중에 DSLR을 산다면 제일 먼저 종묘로 갈 것이다. 광각렌즈와 함께. 


작년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현직 학예사의 미술사 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분에게 사진기를 어떤거 쓰시냐고 물어봤었는데, 그냥 스마트폰 카메라를 쓴다고 했다. 그럼 논문 작성할때 필요한 사진은 어디서 구하셨냐고 물어보니 도록에서 스캔했다고 답을 해주셨다. 그 분의 당당한 태도에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해서 그냥 잠자코 듣기만 했다. 잠시 내가 유별난 놈인가 생각도 해봤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소 바뀌었으니 맨 아래 추신 참조) 


학생일때는 돈이 부족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미술사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카메라 하나 정도는 갖춰 놓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연구자로서 나의 주장을 펴려면 나의 관점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고 말하면서 타자의 눈으로 본 세상을 보여준다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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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20.6.17) : 생각을 해보니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유물은 유리벽 내부에 있으므로 반사광 때문에 깨끗한 사진을 찍기 어렵다. 사립미술관의 경우는 쉽사리 촬영을 허가받을 수도 없고 비교적 관대한 국립박물관도 플래쉬의 사용은 금지된다. 이런 경우라면 그냥 스캔한 사진을 사용하는게 나을 것 같다. 해당 박물관에 소속되어 쉽게 유물을 접할 수 있는 학예사가 아닌이상 좋은 사진을 찍기는 어렵다. 돌이켜보니 그 학예사의 선택이 합리적이라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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