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81년, 북주의 승상이었던 양견은 황제였던 정제를 몰아내고 새롭게 황제로 등극하였으니, 그가 바로 수 문제이다. 국호는 수(隋)로 정하였다. 그는 혼란기에 있던 중국을 마침내 통일하였는데, 서기 589년이었다.
수나라의 중국통일 과정
그는 과거제를 실시하고 백성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줄여주는 등 정치에 매우 능했고, 그 결과로 말년에는 경제가 번영하고 국고가 넘쳐났다고 한다. 하지만 뒤를 이은 아들 양제는 그렇게 쌓인 국부를 바탕으로 대운하 건설 등의 많은 토목공사를 벌였고, 3차에 걸쳐서 무리하게 고구려 원정을 했지만 실패하여 무수히 많은 군사를 잃고 국고를 탕진하였다. 민심은 그를 떠났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양제는 장안을 버리고 강도로 피난을 가게 되고, 이를 틈타서 당국공 이연이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점령하여 새롭게 나라를 세우니, 바로 당나라이다(618년).
당나라의 영토
겨우 30년 가량을 존속한 수와 달리 당은 907년까지 이어지며 중국 왕조치고는 상당히 장수한다. 당은 서쪽 실크로드 지역에 진출하고 동쪽으로는 고구려를 정벌하는 등 대외적으로 큰 영토를 확보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세가 안정되면서 동아시아의 명실상부한 패권국으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이는 경제와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지는데, 수도 장안에는 100만명의 인구가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주변국에서 찾아온 유학생, 구법승, 상인 등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한다. 이런 사실로 보아 당의 문화는 상당히 개방적이고 국제성을 띠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수대 불교조각
수나라 이전, 북주의 무제(재위 560-578)는 574-577년 폐불을 단행한다. 이는 북위 태무제 시절 이후 중국 역사상 두번째 폐불이다. 수 문제는 호불군주였기에 폐불로 인하여 훼손된 불상들을 수리하고 복원하는데 주력하였다. 수는 워낙 역사가 짧기 때문에 눈에 띄는 조각 양식의 변화는 없다. 기본적으로 북제와 북주의 양식을 답습하고 있다. 다만 당 양식의 전조현상을 보여주고 있다.위진남북조 양식에서 당 양식으로 가는 과도기라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
수의 불상은 초기에는 북제의 선조미와 북주의 형체감이 조화를 이루어 조용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서역과 남조의 영향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다. 특히 보살상은 유연한 자태를 보여주며, 기존의 좌우 대칭적인 형식으로부터 벗어난다. 수 불상의 대표적인 예는 개황 4년(584)명 금동아미타불상으로, 동흔에 의해 조성되었다(사진1). 불상의 가늘고 긴 신체는 북제 불상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전면의 금강역사상 2구는 매우 사실적으로 처리되어 당 양식으로 가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불상의 분위기는 다소 사색적인데, 이는 수 양식의 특징이라 한다. 허나 이는 책의 설명일 뿐이다. 내 눈에는 사색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약간 미소짓고 있는 듯하다.
사진1. 개황 4년명 금동아미타불상. 협시보살과 금강역사 모두 두광을 갖추고 있다. 대좌 앞에 있는 한쌍의 동물은 개가 아닌 사자이다.
수 시대는 이전 북위 시대처럼 활발하게 석굴이 개착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석굴 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돈황 막고굴의 427굴 중심주 동면의 삼존상이 있다. 가운데 주존의 어깨를 비롯한 상반신은 상당히 육중한 모습으로 부피감이 느껴지며,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는 손이 상당히 크게 만들어졌다. 착용하고 있는 가사는 상당히 얇고 밀착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육체의 굴곡이 잘 드러난다. 협시하고 있는 보살상은 초보적인 삼굴자세(세번 꺾였다는 의미로, 일자로 반듯하게 서있지 않아 몸의 곡선미가 드러남)를 하고 있다(사진2).
사진2. 돈황 막고굴 427굴 중심주 동면 삼존상
맥적산 석굴 62굴의 주존은 앉아있는 좌상의 형태로 표현되었는데,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지그시 감은채 사색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대좌에 드리운 상현좌의 옷주름은 다소 둥글둥글하게 표현되었다. 앞서 보았던 막고굴의 불상처럼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가 넓으며 가슴 부위는 당당하게 조각되었다. 우리가 볼때 오른쪽에 자리한 보살상은 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데, 삼굴자세가 잘 표현되어 있어서 마치 젊은 여성의 신체를 보는 듯한 곡선미가 느껴진다.(사진3)
사진3. 맥적산 석굴 62굴 불좌상. 상현좌에 드리운 가사의 주름이 둥글게 처리된 것은 서위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불상에 광배도 같이 만들어졌으나 거의 깨져나간 상태다.
한편 산동성의 타산 석굴 역시 수대에 조영되었는데, 3굴에 조영된 불좌상은 상당히 경직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치 레고 블럭을 쌓아서 만든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는 사각형에 가까우며 정면을 바라보면서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데, 목도 굵어서 마치 목디스크 환자가 깁스를 하고 있는 것마냥 뻣뻣하기 이를데 없다. 앞서 살펴본 불보살상들에 비해 상당히 수준이 낮아서 다소 의아하다.(사진4)
사진4. 타산석굴 3굴에 자리한 불좌상. 전체적으로 보면 자세가 매우 경직되어 있고 앞서보았던 조각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
당대 불교조각
당대에는 초기 황제들이 도교 우위의 정책을 취함으로써 불교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렇게 위축되었던 불교계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것은 645년에 이루어진 현장법사의 귀국과 측천무후의 적극적인 후원 덕택이었다.
일본 후지유린칸에 소장된 정관 13년(639)명 불좌상은 당나라 초기의 불상이다. 옷자락은 신체에 밀착되어 있고 주름이 유려하게 표현되었다. 왼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것 마냥 손가락이 아래쪽으로 향해있다. 오른손은 파손되어 알 수 없으나 시무외인이나 설법인을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후덕하고 어깨는 넓으며 전체적으로 당당한 자세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왕조 초기의 건강한 사회적 기풍이 느껴지며, 표정을 보면 조각가가 다소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진5)
사진5. 정관 13년명(639) 불좌상, 후지유린칸 소장
당대 불상에서 보이는이런 사실성은 7세기 후반이 되면서 점차 강해져 하나의 양식적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칠보대에 조성되었던 전 보경사 전래의 석상들은 이러한 특징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사진6) 불상과 보살의 얇은 법의는 몸에 밀착되어 불신의 윤곽선이 잘 드러나고, 허리는 잘록하다. 인도 굽타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보살상의 삼굴자세는 매우 두드러진다. 얼굴은 동그랗고 살이 넉넉하게 붙은 모습인데, 귀족의 얼굴을 보는 것 마냥 다소 사실적이다.
사진6. 칠보대 불상, 당 장안 연간(701-704). 불상의 허리부분이 너무 잘록한 감이 있다.
표정에서 사실성이 강해진 나머지 이전 시대에 보이던 숭고한 모습은 다소 떨어진다. 사실성과 정신성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붓다의 상호가 실제 사람과 비슷하면 참배자가 보았을때 친근하게 느껴지는 장점이 있으나 근엄함이나 성스러움은 약화된다. 반대로 정신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지나치게 근엄하게 되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려 중생을 구원하러 내려온 붓다가 아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적 존재처럼 거리감이 느껴지게 된다. 양자를 잘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당나라의 불상은 초기에는 이 두가지가 비교적 조화를 이루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실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당대에도 남북조시대와 마찬가지로 석굴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특히 측천무후와 관련이 있는 용문석굴의 봉선사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곳은 고종과 측천무후에 의해 상원(상원)2년 (675)에 완성되었는데, 정벽 중앙에 있는 노사나불의 대좌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고종이 아버지 태종을 추모하기 위해 칙령을 내려서 672년에 공사를 시작하였고 3년 후인 675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본존인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존자, 문수와 보현보살, 사천왕과 금강역사 각각 한 쌍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이곳의 사천왕상은 감은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기의 사천왕상과 자세나 입은 갑옷 등이 비슷하다(사진7, 8).
사진7. 용문석굴 봉선사동. 중앙의 노사나불은 다소 여성스러움이 느껴지는 탓에 측천무후를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우측의 사천왕상은 감은사지 사리기의 사천왕상과 유사하다
지금까지 인도부터 시작하여 수당시기의 불교조각을 대강 살펴보았는데, 이는 우리의 불교조각을 들여다보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남의 나라 것이라 좀 대충 보고 넘어간게 사실인데, 실은 필자의 공부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미진한 내용은 나중에 공부를 다시해서 보충하도록 하고, 앞으로는 우리나라의 불상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다뤄보겠다. (불상에 대해서만 전적으로 쓰겠다는 것은 아님. 다른 미술품도 다룰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