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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Aug 17. 2020

고대 한반도의 가람배치 살펴보기

1)탑과 불상은 어떤 관계였을까?

나는 중고등학교때 국사를 배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고교시절은 국사가 사회탐구 영역의 선택과목이어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국사를 필수적으로 반영하는 대학이 서울대 뿐인 것도 한 몫을 했다. 요즘은 뜸하지만 어쩌다 한번씩 청년들의 역사 인식이 낮네 어쩌네 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무슨 맥락에서 그런 뉴스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부모들과 그 윗세대들의 의식수준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도 역사를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딱히 할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국사 교과서의 구성도 문제가 있었다. 정치와 사회ㆍ경제분야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문화 파트는 거의 맨 끝부분에 나오는데다 분량도 얼마 되지 않았다. 커리큘럼이 이모양이니 문화 분야는 수업시간에 대충 다루고 넘어갔던 기억이 난다. 다른 학교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수능이 되자 이 부분에서 문제가 다수 출제되었다. 그 결과 수능 국사의 변별력이 높아져버렸다. 당시 수능 국사의 변별력이 높아진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일시적인 꼼수일 뿐이다. 교과서에서 문화를 적게 다룬다는건 정치나 경제에 비해 문화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 사고의 투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문화적인 요소가 알게 모르게 사회 현상과 정치에 영향을 준다. 문화와 정치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당시의 교육 담당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확실하다. 당시 교과서로 국사를 공부했던 학생들은 대개 우리 옛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확연히 낮을 것이다. 다소 억측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내 또래인 지금의 30~40대가 전통보다는 서양 미술에 열광하는 현상도 어쩌면 그러한 인식의 반영일지 모른다. 수능을 본지 10년도 훨씬 넘었으니 지금의 국사 교육은 좀 달라졌으려나? 


아무튼 당시 이 부분에서 공부했던 기억이 나는게 한가지 있는데, 바로 고대의 가람배치 형식이다. 당시에는 1탑 1금당이니 1탑 3금당이니 하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외웠던 기억이 난다. 생각을 해보면 수업하셨던 선생님도 의미를 잘 모르지만 진도를 위해 그냥 설명하셨던거 같다. 불교신자가 아니라면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를 해야 이해할 수 있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니 그럴만도 하다.


일단 가람배치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파악해보자. 우선 가람은 사원을 의미한다. 고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사원을 의미하는 상가람마가 중국으로 가면서 승가람마(僧伽藍摩)가 되었다가 가람으로 축약된 것이다. 이 가람에는 탑, 불상을 모신 금당, 불경을 강의하는 강당, 탑이나 금당 등을 복도식으로 에워싸는 회랑 등 여러가지 건축물들이 들어서는데, 이러한 건축물들의 배치를 가리켜 가람배치라고 하는 것이다.


고대 사찰의 가람배치에서는 핵심이 되는 것이 탑과 금당(불전)의 관계이다. 원래 인도에서 탑과 사원은 별개의 장소에 따로 있었다. 탑은 도시의 큰 길가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사원은 승려들의 수행과 탁발을 고려하여 마을 외곽의 한적한 곳에 자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승려들은 사원에서 개인적인 수행만 하면 되었고, 탑은 재가신자들이 참배를 하면서 관리하였다.


그리고 이때까지 불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불상은 석가모니 열반 이후 약 500여년이 지난 시점이 되어야 등장한다. 진리의 상징인 붓다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사진1). 하지만 서기 1세기경 간다라 지역에서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상이 출현하게 된다.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신을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조각하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보고 간다라의 불교도들이 영감을 얻은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인도의 마투라 지역에서도 불상이 만들어진다.

사진1. 엘라파트라의 경배, BC 2~1세기. 나가왕 엘라파트라가 빈 대좌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시기에는 부처의 표현이 금기시 되었다.

하지만 불상이 종전의 탑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만든 조형물과 붓다의 몸속에서 나온 사리에 같은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후자는 붓다의 일부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탑이 불상에 비하여 우월한 지위를 누린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불상의 육계에 사리를 넣기도 했고, 불상을 탑 앞에 설치하거나 탑의 표면을 장식하는 부조로 조각하기도 하였다. 이는 탑이 갖는 신성성에 기대어서 불상의 지위를 높여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사진2)

사진2. (왼쪽)아잔타 석굴 내부의 스투파. 전면에 불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오른쪽)간다라 불상, 육계 내부에 사리를 봉안했던 구멍이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불상의 권위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불상 조성자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경전과 교리의 이해가 부족한 신자들에게는 탑 내부에 봉안되어 보이지 않는 사리에 비해 구체적인 형상을 하고 있는 불상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올때까지는 탑의 권위가 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삼국 가운데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통치기인 372년에 전진의 부견이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최초의 기록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구려의 사찰은 없지만 당시의 사찰 터가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평양 청암리사지다. 이 청암리사지는 중심부에 탑으로 추정되는 팔각형의 건물터가 있으며 동과서, 북쪽에 각각 금당 터가 자리하고 있어 1탑 3금당 형식을 보인다. 팔각형 탑지의 한변은 10.2m나 되고, 그 폭은 24.7m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북쪽의 금당터 또한 정면 32.1m, 측면 18.8m나 되는 거대한 규모이다.(사진3)

사진3. (왼쪽)청암리사지 가람배치도 (오른쪽)문화유산기술연구소에서 청암리사지를 그래픽으로 추정 복원한 모습.



백제도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던 탓에 비슷한 시기에 불교를 전래 받는다. 침류왕 즉위년인 384년, 동진에서 인도 출신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로 와서 불교를 전해주었다고 전한다. 고구려보다 12년 늦긴 하지만 신라에 비하면 크게 늦은 것은 아니다. 백제의 가람배치 형식을 살펴볼만한 대표적인 절터는 정림사지와 미륵사지가 있다.

사진4. 부여 정림사지의 모습

먼저 부여 정림사지를 살펴보면, 현재 5층 탑과 그 주변으로 유구가 남아있다(사진4). 탑과 금당이 중앙에 마주보는 형태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앞뒤로 중문과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주위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1탑 1금당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42년 일제에 의해 발굴조사된 이래 8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기존 7차례의 조사에서는 중문의 양 옆에서 시작되는 회랑이 단절없이 탑과 금당의 동서 측면을 지나고 강당의 동서 측면에서 마무리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진행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재발굴 조사에 의하면 남쪽회랑과 동회랑, 서회랑이 각각 별개로 존재하고 그 사이에는 어느정도의 유격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강당의 동서쪽에 있던 부속건물지도 새롭게 발굴 되었는데, 이는 동회랑과 서회랑에 연결되어 있었다.(사진5)

사진5. 기존에 알고 있던 가람배치와 최근 새로 밝혀진 가람배치

어찌됬든 백제의 정림사지는 고구려와는 다른 1탑 1금당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의 건축양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북조와 남조의 불교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 현재로써는 알기 어렵다. 그냥 이정도만 알고 넘어가자.


백제의 또 다른 절터인 익산 미륵사지의 가람배치는 정림사지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다. 흔히 3탑 3금당 양식이라고 부르는데, 각각의 금당과 탑이 회랑으로 인하여 별개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1탑 1금당 양식을 3곳에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한다(사진6).


이렇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미륵불의 용화삼회를 건축으로 형상화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용화삼회란, 지금은 도솔천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미륵보살이 56억 7천만년이 흐른 뒤에 부처가 되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용화수 나무 아래에서 3번의 설법을 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메시아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미륵사 창건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나오니 참고하면 좋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彌勒) 삼회(三會)를 법상(法像)으로 하여 전(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고 하였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이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 삼국유사 권2 기이편 무왕조 -


사진6. 익산 미륵사지와 추정복원모형, 가람배치도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다소 늦은 법흥왕 15년(528)에 불교를 받아들인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탓도 있지만, 신라 귀족들의 보수적인 성향도 한 몫을 하였다. 귀족들 입장에서 보았을때 불교가 세를 얻어 왕권이 강화되면 본인들의 입지가 약화되니 그런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신라의 초기 가람배치를 살펴볼만한 곳으로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세워진 사찰로서, 현재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다. 분황사의 이름은 향기 분(芬)자에 임금 황(皇)자를 쓰는데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내용에 따르면 당 태종이 여왕에게 벌과 나비가 없는 모란꽃 그림을 선물로 보내자 본인이 남편이 없는 여자라고 조롱한다 여겨서 지었다고 한다. 이곳 분황사는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전란에 의해 여러차례 재건되면서 창건 당시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창건 당시에 쌓았던 9층 모전석탑이 있는데 무너져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다시 3층으로 쌓았다. 


가람배치를 보면 1탑 3금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얼핏보면 고구려의 1탑 3금당식 가람배치 수법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고구려의 1탑 3금당은 동서쪽의 금당이 탑을 바라보고 있으나 분황사의 동서 금당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일종의 변형된 1탑 3금당 양식이다. 이를 가리켜 품(品)자형 가람배치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사진7)

사진7. (왼쪽)분황사의 가람배치도와 모전석탑(오른쪽)


황룡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국가 사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 진흥왕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절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에 황룡이야기는 사찰의 격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후대에 꾸며진 내용 같아보이고, 원래부터 절을 지으려고 계획하지 않았을까 싶다. 불교의 융성이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니 일부러 거대 사찰을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백제의 무왕이 황룡사와 비슷한 규모의 미륵사를 지은 것도 비슷한 이유로 본다. 


이곳 황룡사는 진흥왕때 1차로 완성이 되었고, 유명한 9층 목탑은 선덕여왕때 착공하여 완성되었다. 진흥왕 당시에는 탑 없이 금당만 지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탑을 선덕여왕때 9층의 탑으로 고쳐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의 금당배치가 밝혀졌는데, 탑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 3개의 금당이 나란히 배치된 다소 변형된 형식의 1탑 3금당 형식임이 드러났다. 목탑의 동서쪽에는 경루와 종루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굴되었다. 금당의 뒤편으로는 강당지와 그 동서로 승방지가 발견되었다. 탑과 금당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사진8)

사진8. 황룡사지의 모습과 가람배치도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7세기 전반까지는 탑과 불전(금당)의 관계에서 탑이 약간 우위에 있거나 최소 대등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탑 하나에 3개의 금당이 붙어 있으니 탑이 더 우위에 있다고 봐도 될법하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고 난 후에는 이런 탑 중심의 구도에 변화가 생겨난다. 통일신라의 가람배치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P.S : 이 글에 쓰인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표지사진 : 본인 촬영 - 불국사 대웅전과 석가탑, 다보탑

사진1 : 구글 검색결과로 나온 이미지를 퍼온 것인데 다시 찾으려니 출처를 못찾겠네요. 죄송합니다

사진2 : 아잔타 석굴 스투파 사진 역시 구글로 검색한 것인데 글을 다 써놓고 난 후에 출처를 찾으려니 힘드네요. 앞으로는 사진을 가져올때 미리미리 출처를 기록해두겠습니다. 

간다라 불상 사진은 법보신문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53)

사진3 : 왼쪽 청암리사지 가람배치 사진은 나무위키, 우측 상상도는 이글루스 까마구둥지님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luckcrow.egloos.com/v/2494278)

사진4 : (좌측)백제세계유산센터 

(http://www.baekje-heritage.or.kr/html/kr/bjheritage/bjheritage_010302.html)

(우측) 못찾음

사진5 : 문화일보(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12001070230074002)

사진6 : 미륵사지 항공사진 : 익산시청

(http://www.iksan.go.kr/tour/index.iksan?menuCd=DOM_000005905001005000)

미륵사지 가람배치도 : 우리문화신문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05069)

미륵사지 추정 모형

(http://www.korea.kr/news/reporterView.do?newsId=148844401#sitemap-layer)

사진7 : 분황사 모전석탑

(https://www.koya-culture.com/mobile/article.html?no=116836)

가람배치도

(http://m.srbsm.co.kr/view.php?idx=34460)

사진8 : 황룡사지 항공사진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07&wr_id=996483)

황룡사 가람배치도 : 본인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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