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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Aug 27. 2020

통일 신라 시대의 가람배치

2)새롭게 등장한 쌍탑 1금당 형식

지난 글에서 삼국시대의 가람배치를 살펴보았다. 현존하는 삼국의 목조 건축물이 없는 관계로 석탑이나 폐사지의 유구를 통하여 추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탑과 불상을 모신 금당의 배치가 매우 흥미롭다. 고려나 조선시대로 가면 탑의 위상은 약해져서 크기부터 왜소해지고 불탑이나 조각의 정교함도 빈약해지는데 반해 삼국시대의 탑은 크기부터 상당한데다 가람배치에서 금당과 엇비슷한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모두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탑이 지니는 중요성은 상당히 컸다. 고구려는 팔각형의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 3방향에 금당이 놓이는 1탑 3금당 양식이며, 백제 1탑 1금당 양식, 신라는 고구려와는 또다른 모습의 1탑 3금당 양식을 보인다.


이렇게 각자 나름대로의 개성을 뽐내던 삼국의 불교는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변화를 맞게 된다. 종파에서는 의상의 화엄종이 전보다 강한 세를 얻게 되었고, 불상의 표현은 전보다 사실적으로 변해갔다. 사원 건축물의 배치도 변화를 맞게 되는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하나이던 탑이 두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쌍탑을 세우는 방식을 쌍탑 1금당식 가람배치라고 한다. 흔히 쌍탑 가람배치라고 부르곤 한다. 


일반적으로 쌍탑 가람배치 형식이 가장 먼저 나타난 사찰은 경주 사천왕사로 알려져 있다. 사천왕사는 안타깝게도 사세가 끊겨서 폐허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유구를 발굴해본 결과, 금당지 앞쪽에 두기의 탑지가 발견되어 쌍탑가람배치를 하였음이 밝혀졌다.(사진1) 


사진1. 사천왕사 가람배치도. 가운데 건물터가 금당지이고 전면에 동서 탑지가 보인다. 우측 사진은 실제 사천왕사지.


주제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이곳 사천왕사는 고구려 멸망후 당과 신라 사이에 결전이 벌어질때 밀교의 고승 명랑법사가 문두루 비법을 실시하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비법이 효험이 있었던 것인지 당나라 수군이 서해에서 풍랑을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온다. 몇년 전에는 양지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녹유신장상의 파편이 추가로 발굴되어 완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사진2)

사진2. 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신장상.



쌍탑 가람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는 경주의 감은사지이다. 감은사 역시 사세가 끊겨서 터만 남아있지만, 유구와 쌍탑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어서 당시의 사찰 모습을 추론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곳에 서있는 쌍탑이다. 똑같이 생긴 두 탑이 금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서있다.(사진3) 이러한 건물 배치는 통일신라말 선종이 유행할 때까지 한동안 계속 된다. 


사진3. 경주 감은사지. 거대한 쌍탑이 인상적이다. 금당지에는 용이 된 문무왕을 배려한 듯 지상과 떨어져 있는 주춧돌들이 보인다.


그 다음으로 소개할 쌍탑 사찰은 그 유명한 경주 불국사이다. 불국사는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등의 주요 불전이 각각 회랑으로 둘러싸여 나름의 독립된 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불국사의 쌍탑은 대웅전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 금당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탑이 위치하는데, 동쪽에는 화려한 모양의 다보탑이, 서쪽에는 반듯한 모습의 석가탑이 자리잡았다. 동탑과 서탑의 모습이 각기 다른 것이 이곳 불국사의 특징이다. 두 탑의 자태는 정말이지 아름답다. 석탑이지만 나무를 깎아서 만든것 마냥 그 솜씨가 공교하기 이를데 없다. 다보탑과 석가탑을 주제로 글 여러편을 써도 될만큼 숨겨진 이야기도 많고 밝혀진 연구 결과도 많다. 하지만 주제에서 벗어나는 만큼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다.(사진4) 

사진4. 불국사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다보탑이, 서쪽에 석가탑이 서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쌍탑가람은 경주의 황복사이다. 이곳 역시 폐사지인데, 최근 몇년간 이루어진 발굴에서 큰 성과가 있었다. 금당과 동서 쌍탑, 중문, 회랑 등의 주요 건물터가 발굴이 되었고, 금동불과 녹유전을 비롯한 각종 유물 700여점이 발굴되었다. 거기에 십이지신상으로 기단을 꾸민 건물지와 신라 34대 효성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완성 왕릉도 발굴되었다. 이곳은 의상대사가 29살 되는 654년에 출가했던 사찰로서, 좀 더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사천왕사보다 연대가 앞서는 쌍탑 가람일 가능성도 존재하는 만큼, 학계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사진5-1, 5-2) 

사진5-1. 황복사지 사진.
사진5-2. 황복사지에서 출토된 십이지신상(소)과 금동여래입상


그렇다면 이런 쌍탑은 갑자기 왜 나타난 것일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아래의 2가지이다. 


1. 불상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상대적으로 탑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

2. 법화경이 유행하면서 그 교리의 내용이 건축적으로 반영되었음




최근에는 이 두가지 말고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브런치는 학술지가 아니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것까지 이야기하면 구독자 떨어질까봐 두렵다. 


첫번째 이유부터 천천히 설명 해보겠다.

모든 종교 집단은 신자들의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석가모니는 생전에 자신의 형상을 만들고 숭배하지 말라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과 재가신자들은 그 당부를 한동안 잘 지켰다. 그래서 붓다의 형상을 표현하지 않는 무불상 시대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을 따로 공부하지 않는, 단순히 종교로만 여기는 재가신자들은 붓다를 실제로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가르침은 점차 옅어져 갔을 것이고 결국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서북인도의 간다라와 중인도의 마투라에서 불상이 처음 출현하게 된다. 


그래도 초기에는 불상보다 탑이 우위를 점한다. 탑은 붓다의 일부인 성스러운 사리가 들어있지만 불상은 인간이 만든 조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와서도 탑과 금당의 지위가 비교적 대등했던 것은 이러한 영향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탑 하나에 금당이 3개나 붙어 있어서 마치 탑 하나를 금당 세곳이 외호하는 듯한 인상도 준다. 그렇지만 불교가 계속 확산되고 신자들이 많아지면서 불상의 상대적 지위는 계속 올라갔을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이것이 역전되었으리라 본다.


그렇게 된이상 거대한 탑은 더이상 신성한 사리를 모신 성소가 아니라 금당의 부처님을 가려서 안 보이게 하는  구조물로 전락하였을지 모른다. 그런 탓에 새로 지어지는 절에서는 탑이 가운데 명당 자리를 내주고 동서 양편으로 물러나는 형태로 되어 두기의 탑이 금당을 협시보살처럼 양편에서 보좌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 이유는 법화경의 유행에 따른 건축물 배치의 변화이다. 법화경의 견보탑품에는 영취산에서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설할때 다보여래의 보탑이 땅 속에서 솟아났는데, 이를 열어보니 다보여래가 선정에 든채 앉아 있었고 이후 석가모니불이 함께 보탑에 들어가 앉아서 법을 설했다고 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으니 참고하기 바람)





그 때 부처님 앞에 7보탑이 하나 있었으니, 높이는 5백 유순이요 너비는 250유순으로, 이 탑은 땅으로부터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가지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으며, 5천의 난간과 천만의 방이 있으며, 한량 없이 많은 당번을 장엄하게 꾸미고, 보배 영락을 드리우고 보배 방울을 또 그 위에 수없이 달았으며, 그 사면에는 다마라발전단향(多摩羅跋栴檀香)을 피워 향기가 세계에 가득하고, 모든 번개(幡蓋)는 금·은·유리·차거·마노·진주·매괴 등 7보를 모아 이루니, 그 탑의 꼭대기는 사천왕궁에까지 이르렀다..... (중략) 


 이에 석가모니불께서 오른 손가락으로 7보 탑의 문을 여시니, 큰 성문의 자물쇠가 풀리어 열리는 것과 같이 큰 소리가 났다. 그 때 거기 모인 모든 대중들은 보배탑 안의 사자좌에 산란치 않으시고 선정에 드신 다보여래를 보며, 또 그의 음성을 듣고 말하였다.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도다! 석가모니불께서 이 『법화경』을 쾌히 설하시니, 이 경을 듣기 위하여 이곳에 이르렀노라." 
그 때 사부대중들이 한량없는 천만억 겁의 오랜 과거에 멸도하신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미증유라 찬탄하며, 하늘의 보배꽃을 다보불과 석가모니불 위에 흩었다. 그 때 보배탑 가운데 계신 다보불께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석가모니불께 드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자리에 앉으소서."
그러자 곧 석가모니불께서 그 탑 가운데로 드시어 그 반으로 나눈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셨다....(중략)
 


- 묘법연화경, 제 11 견보탑품 중에서




금당 앞에 놓인 두기의 쌍탑은 칠보탑 안에 나란히 앉아서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불국사 대웅전 영역의 두 탑에도 반영되어 석가탑과 다보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조각으로 나타낸 이불병좌상이 많이 보인다. 우리나라는 이불병좌상이 드물지만 통도사 영산전에 이를 묘사한 회화 작품이 하나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6. (좌)신구 원년명 금동이불병좌상, (우)통도사 영산전 견보탑품 벽화

 

지금까지 탑과 금당(불전)을 중심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들어서는 탑과 금당의 배치에서 의미있는 관계를 도출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로는 교종보다는 선종이 우세해지는 까닭에 이전처럼 형식적이고 짜임새 있는 건축 양식 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건축이 선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평지가람 보다는 산지가람이 많아지면서 지형지세에 순응하는 방식의 건축이 각광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탑의 중요성이 계속 하락한 점도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 한가지 원인이 아닐까 한다. 부처의 사리는 유한하여 복제가 불가능하니 이를 대신할 경전이나 작은 불상 등의 성물을 집어넣지만 불상을 조성할 때도 복장이라 하여 같은 성격의 물품을 넣을 수 있으므로 탑의 위신이 하락하는 것은 어찌보면 예견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에 지어진 사찰에서 탑은 전대보다 크기가 작아지고 사찰에서 차지하는 면적 또한 줄어들게 된다. 사찰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물, 혹은 풍수적 비보물로 위상이 추락해 버린 것이다. 사찰에 답사를 갈 일이 있다면 이 점을 유심히 관찰해 보는 것도 쏠쏠한 한가지 재미가 될 것이다.  






사진출처

사진1(좌)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39_0050_0040_0010

사진1(우) : http://m.gjnews.com/view.php?idx=37362

사진2 : 본인 촬영

사진3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333700310000#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4 : 본인 촬영

사진5-1 : (좌)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8946

사진5-1: (우)https://www.yna.co.kr/view/AKR20190515037400005

사진5-2 : https://www.yna.co.kr/view/AKR20190515037400005

사진6 : (좌)동양미술사(미진아트히스토리2), 미진사

사진6 : (우)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9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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