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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Sep 14. 2020

고구려의 불교 조각 - 1

한반도로 불교가 들어온 경로

우리 역사상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인 372년이다. 이 당시 중국은 북방 유목민족과 한(漢)족이 각각 양자강 이북과 이남을 차지하고 대치하고 있는 형세였다. 역사 교과서에는 이 시기를 (위ㆍ진)남북조 시대로 일컫고 있다. 


소수림왕의 등극 이전 고구려 국왕은 고국원왕이다. 그는 41년간 재위하면서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느라 고생을 많이 하였다. 재위 전반기에는 모용선비가 세웠던 전연과 여러차례 전쟁을 치렀고, 말년에는 백제의 침공을 평양성에서 직접 막다가 그만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국왕이 갑작스레 전사하였으니 고구려로서는 전례없는 위기였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372년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 이념을 정치에 도입하고자 하였고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율령을 반포한다. 이 대목에서 단순 종교인 불교를 도입한게 어떤 의미가 있는것인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짧게나마 설명을 해본다.


조선시대 이후 불교는 단순히 복이나 빌고 죽고나서 극락에 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종교가 되었지만, 삼국시대 부터 고려까지는 일종의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 측면이 크다. 이는 앞선 중국의 사례를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불교가 공식적으로 중국에 처음 전래된 것은 유교에 기반하여 국정이 운영되었던 한나라 때이다. 이 시대에는 불교가 그다지 큰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교이념이 그 수명을 다하고 이를 대체할 사상이 없어서 혼란스러웠던 위진남북조 시기에 불교가 급속히 확산되었고 지배층의 후원을 전폭적으로 받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차적으로 불교의 내세구원(종교적) 성격은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살면서 흔들리던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고, 제왕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을 자처함으로써 그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 내포된 윤회사상은 반란이나 살육,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꺼리게 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켜주는 기능도 수행했을 것이다.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들은 이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불교를 후원했으리라 생각된다. 


불교는 이렇게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일찌감치 고구려에 들어왔으나 현존하는 불교 미술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먼저 고분벽화에 일부 남아있는 흔적을 살펴보자. 불교적인 요소가 표현된 대표적인 고분은 길림성의 장천 1호분이다. 이 무덤의 전실 동쪽 천장에는 불상에 예배를 드리는 모습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사진1). 대좌 위에 양쪽 어깨를 감싼 통견의를 한 불상이 모셔져 있고 대좌 아래쪽에는 좌우로 한쌍의 사자가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 묘사된 불상은 중국식 의복을 입고 있으며 두손을 모아 단전에 대고 있는 도교식 선정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주조되던 불상은 다소 고식의 불상인 듯 하다. 이 고분의 축조 연대가 5세기 후반인데 불좌상의 양식은 중국 초기의 양식에 가까운게 다소 의아하다. 미술사학자 최완수 선생은 본인의 저서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에서 중국에서 고구려에 불상을 전해줄때 그들 나름대로 소화하고 창안한 신식(중국식)보다는 안전한 구식(간다라 양식에 가까운)을 전파해줬을것이라고 추측 하였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벽화 속 불상이 하고 있는 수인이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사진이 작아서 잘 안보이지만 불상 주변에는 하늘에서 날아 내려온 비천상도 있고 절을 하고 있는 신도들의 모습도 보인다. 절을 하는데 정수리 부분이 땅바닥에 닿는 모습이 재미있다. 지금은 이마를 땅에 닿게 하는 식으로 절하지만 저 시대엔 저런식으로 했었나보다.

사진1. 장천 1호분 벽화에 그려진 예불도.



미술사 책에 흔히 등장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고구려 불상은 한강의 뚝섬에서 출토된 불좌상이다(사진2). 금동으로 주조된 이 상은 높이 4.9센티미터로 아주 작은 크기이다. 금도금은 군데군데 벗겨지고 얼굴과 대좌의 세부가 대부분 마모되서 자세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드나 옷주름과 수인은 어느정도 알아볼 수 있다. 대좌에 앉아서 선정인을 하고 있는 모습인데, 불교의 선정인이 아닌 양손을 모아서 단전에 대고 있는 도교식 선정인을 하고 있다. 중국의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의를 착용하고 있으며, 가슴 부위의 옷주름은 U자 모양인데 거의 사다리꼴에 가깝다. 양팔에도 가로 방향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대좌에는 두마리의 사자가 양편에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상의 조성시기는 5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당 상이 발견된 뚝섬 지역은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각축전을 벌이던 지역이고, 소형불이기 때문에 이동이 용이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제작국을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학계에서는 고구려 불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필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이 있지만 선명하지 못한 관계로 퍼온 사진으로 대신한다.)

사진2. 뚝섬출토 불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다음 살펴볼 상은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되시겠다. 다행스럽게도 비교적 상태가 온전하고 광배 뒷면에 명문이 남아 있어서 조성시기와 목적, 봉안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에서 도로공사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진3-1.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사진3-2.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의 연꽃 대좌와 측면 모습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가 비교적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배에는 이글거리는 불꽃 문양이 음각으로 표현되었다.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으며 얼굴은 살짝 미소짓는 표정을 하고 있다. 앞서 보았던 뚝섬출토상에 비해 양감이 두드러지며 왼쪽 팔에 가사자락을 걸치고 있는 점이나 옷자락이 바람이 불어서 양 옆으로 나부끼는 듯한 모습의 옷자락 표현이 비슷한 시기의 북위 불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사진4). 연꽃 대좌를 보면 꽃잎의 끝부분을 도드라지게 만들었고 큰 꽃잎 사이마다 작은 꽃잎이 살짝 보이게 표현하였다. 

사진4. (좌)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중국식 법의를 입은 불상. 북위 혹은 동위(520~30년대 추정). (우)운강석굴 제 6동 포복삼존불입상


광배에 쓰인 명문은 다음과 같다. 


延嘉七年, 歲在己未, 高麗國樂良 東寺主 敬弟子僧演, 師徒卌人, 共造賢劫千佛, 流布. 第二九因現義佛, 比丘法穎所供養.

연가7년 기미년에 고려국 낙랑 동사 주지이며 (부처님을)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이 사도40인과 함께 현겁천불을 조성하여 유포합니다. 제 29인현의불, 비구 법영이 공양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연가 7년은 역사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연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고구려의 연호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정황과 불상의 양식을 감안해 보았을때 안원왕 시기인 539년으로 보는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고려국은 고구려를 의미하며 낙랑은 오늘날의 평양지역을 의미한다. 


현겁천불은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그러자면 인도 이야기를 다시 잠깐 꺼내야한다. 

불교는 인도에서 처음 탄생하였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인도 대륙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점차 불교가 그 세를 넓혀나감에 따라 인도 바깥에도 무수히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아는 세상 말고도 무수히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넓어진 세계관은 여럿의 부처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비슷한 논리로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무수히 많은 부처가 존재했었고 출현할 것이라는 신앙도 생겨나게 되니 이것이 삼겁삼천불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겁은 과거 장엄겁, 현재 현겁, 미래 성수겁을 뜻하며, 각자의 겁마다 천불이 존재한다. 명문에 등장하는 29인현의불은 현재현겁의 천불 가운데 29번째 부처인 인현의불이다. 




다음 소개할 불상은 평양 토성리에서 출토된 도제 불상 파편과 원오리에서 출토된 소조여래상이다(사진5). 토성리 출토 상은 하반신 부위만 발굴되었는데, 도제틀 파편으로 찍어낸 것이다. 옷자락이 다리를 덮고 대좌로 흘러내린 상현좌를 하고 있는 좌상이다. 자세히보면 선정인을 하고 있는 왼손이 보인다. 틀을 만들어 찍어낼 정도로 당시 이러한 선정인 좌상이 유행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옆의 상은 원오리에서 출토된 여래좌상이다. 발굴 당시 비슷한 모습의 상이 여럿 발견되었는데, 모두 같은 틀로 찍어서 구워내어 칠을 한 것이다. 연화대좌 위에 앉아서 배꼽 부근에 양손을 가만히 대고 선정에 잠긴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고졸(기교를 부림없이 예스럽고 소박하다)한 미소가 엿보인다. 통견을 입고 있으며 목부터 손까지는 U자 형태의 옷주름이 두줄 있고 그 밑으로는 세로방향의 주름이 여러개 잡혀있는데 중앙의 깊은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사진5.(좌)평양 토성리 출토 도제 불상 파편 (우)평양 원오리 출토 소조여래좌상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불교가 융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현재는 남북 간의 교류가 막힌 탓에 고구려의 불교 미술 관련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다. 미술사 책에 서술된 분량도 백제와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서 이 글 한편으로 고구려의 불교 조각상을 모두 다뤄보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쓰다보니 생각보다 분량이 많아져서 다음 글에 이어서 쓰도록 하겠다.





사진출처

사진1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18_0040_0020_0010&whereStr=

사진2 : e뮤지엄 사이트에서 "뚝섬출토불좌상" 검색하면 나옴

사진3-1, 3-2 :  본인 촬영

사진4 :(좌)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PwF_E29T2p_TSw?childAssetId=7AHYrMt5Wrmufw (우)한국불상의원류를 찾아서1, 대원사, 최완수 저

사진5 : 한국불교미술사(미진사), 1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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