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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Oct 02. 2020

과부 신세 참말로 서럽다

신윤복의 <이부탐춘>

'저런 하찮은 미물들도 전부 제 짝이 있거늘.....'


"마님!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이부탐춘>, 간송미술관 소장

 

소나무 줄기 한가운데 두 여인이 앉아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여자는 댕기머리를 한 것으로 보아 아직 시집가지 않은 처녀인데 수수한 차림새로 보아 낮은 신분이다. 그에 반해 왼쪽의 여자는 소복을 입고 있으면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다. 소복은 왜 입고 있는 것일까? 


소복입은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무언가를 유심히 보면서 배시시 웃고 있다. 뭐가 저렇게 좋아서 웃는 것일까? 그 옆의 여자는 무언가 못마땅한지 입꼬리가 약간 처진게 뚱한 표정이다. 한쪽 손으로는 소복 입은 여자의 허벅지를 꼬집고 있다. 도대체 왜?


이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화첩인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이다. 이부탐춘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다. 소나무에 걸터 앉은 두 여성과 작은 동물들, 주변의 담장과 그 너머의 꽃나무가 전부다. 


두 여인 가운데 소복입은 사람이 해당 작품의 주인공이다. 이 여성은 소복을 입고 머리를 올린 것으로 보아 수절중인 과부이다. 그 옆의 여자는 수수한 모습으로 보아 소복입은 과부를 모시는 몸종이다. 주인공이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다. 바로 아래쪽의 개 두마리다. 

이 녀석들 대낮부터 낮뜨겁게 뭐하는 짓들이냐. 당장 그만둬라!(나도 연애 좀 하면 안되냐?)


민망하게도 이 녀석들은 엉덩이를 맞대고 있는 걸로 봐서 짝짓기 중이다. 이런 남사스러운 장면을 보면서 은근히 미소를 짓고 있으니 옆의 몸종이 보고 민망하여 허벅지를 꼬집는 것이다. 저런걸 저렇게 보고 있을 정도면 상당히 이성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는 이야기일터, 차라리 다른 사내를 찾아 개가를 하는 편이 나을거 같은데 왜 저렇게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옆에서 꼬집는데도 개의 짝짓기에 심취해 정신을 못차릴 정도라면 말 그대로 수절을 위한 수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여성의 재혼을 막는 사회적인 압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려시대까지는 남편이 젊은 나이에 사망할 경우 여성의 재혼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조로 들어서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불교를 이념으로 삼아서 국가를 운영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에서는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래서 재혼이 쉽지 않았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재가한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는 문과,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다."는 조항을 두어서 재가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었다. 나혼자 좋자고 자손들의 벼슬길을 막아 버린다면 그야말로 몹쓸 어미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참고로 양반신분을 유지하려면 4대 안에는 벼슬을 해야한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 개가한 여성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조항이 적혀있다.


그래도 조선 전기에는 고려의 풍습이 남아 있어서 부모의 재산도 물려받고, 제사도 지내고, 족보에 이름도 올리고, 남편이 죽으면 재혼을 하는 등 그런대로 여권이 높았으나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여성 인권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수절은 선택이 아닌 사실상의 강요였다. 나중에는 이런 관행이 하층민까지 퍼지게 된다. 부모님 세대의 여성들이 겪은 성차별 내지 불합리한 관행들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2030여성은 논외)


조선시대에 널리 읽혔던 대표적인 아동 훈육서, 소학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누군가가 정자에게 물었다.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도리에 옳지 않을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정자가 대답하기를, "절개를 잃은 자를 취하여 자신의 짝으로 삼는다면 자신이 절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혹 외로운 과부가 빈궁하고 의탁할 곳이 없거든 개가를 해도 됩니까?" 정자가 답하기를, "안된다, 굶어 죽는 일은 지극히 작고, 절개를 잃는 일은 지극히 큰 것이다."




정자는 송나라의 유학자로, 정명도(1032-1085)와 정이천(1033-1107) 두형제를 말한다. 둘다 유명한 유학자인데, 주자로 불리는 주희와 함께 성리학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기에 정자라는 존칭으로 불리웠다. 한문에 조예가 없는 탓에 정명도와 정이천 중 누구에게서 나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아무튼 절개를 잃어버리느니 목숨을 버리는게 낫다고 말하고 있는데, 절개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발언을 하였는지 이해가 안간다. 이 구절은 혜원의 그림을 설명하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본인도 스스로 검색을 해보았는데 그 결과 소학(집주)에서 이런 기막힌 구절을 발견했다. 



(본문)

寡婦之子非有見焉이어든 弗與爲友니라 


(주석)

陳氏曰


有見은 才能卓異也라


若非有好德之實이면 則難以避好色之嫌이라


故로 取友者謹之니라


과부의 자식과는 현명하지(재주가 뛰어나지) 않거든 어울려서 벗을 하지마라.

(寡婦之子非有見焉이어든 弗與爲友)


진씨왈, 

(陳氏曰)

현명하다는 말은 재주가 드높고 남다르다는 것이다.

(有見은 才能卓異也)

만약 덕을 좋아하는 기색이 없다면 호색의 혐의를 피하지 못할것이다.

(若非有好德之實이면 則難以避好色之嫌)

그러므로 벗으로 삼는 일을 삼가라.

(故로 取友者謹之)


과부의 자식은 호색의 기질이 다분히 있으니 어울리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부가 수절한 과부인지 재혼한 과부를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어떤 의미에서든지 황당하기 그지 없는 말이다. 이런 책으로 어린 아이들을 500년 내내 가르쳐 왔으니, 신윤복이 이런 그림을 왜 그렸는지, 그림 속 여인이 왜 저러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영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중략) 

오소사는 일찍 과부(寡婦)가 되어 시부모를 봉양하면서 수절(守節)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개가(改嫁)시키려 하자, 오 소사가 말하기를, "남편의 무덤에 가서 한번 곡(哭)한 다음 허락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젖먹이 어린아이를 업고 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당신이 왜 먼저 가서 나로 하여금 이런 말을 듣게 합니까?"

하면서, 이에 손으로 얼어 붙은 무덤을 마구 파니 열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그리하여 아기와 어머니가 드디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나무하는 여인(女人)이 그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겨 부축하고 남편의 집안 사람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위로하고 달래었으나 끝내 듣지 않고 약(藥)을 마시고 죽었다. (중략)



오소사라는 여인이 남편을 여의고 일찍이 수절하는 것을 지켜본 친정 어머니가 안타깝게 여겨 재혼을 시키려 하였는데  거부하고 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만 듣고도 기가 막힌데 임금인 영조는 이 소식을 듣고 해당 마을에 정표(旌表) 하라는 명을 내린다. 정표는 좋은 일을 칭송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다는 의미이다. 백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국왕으로서 안타까워 하기는 커녕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로 봐야 하겠지만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좌)참새들의 묘한 삼각관계 (우)담장 아래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저곳으로 개들이 들어온 모양이다.


다시 그림을 보자. 열심히 정사에 몰입하는 개들 위로 참새들이 있는데, 이 녀석들 역시 거사를 치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한마리의 참새가 더 있다. 그래서 두마리는 대업(?)을 이루는 중이지만 나머지 한마리는 소외되어 그저 바라만 볼뿐이다. 이 과부와 처지가 비슷하다.


담장 너머로는 큰 나무에 꽃이 피어있는데 계절적으로 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저 수절하는 여인의 마음도 봄날일 것 같다. 담장은 꽤나 높게 그려져 있는데,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과부의 답답한 처지를 은연 중에 드러내는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걸터 앉아 있는 소나무 또한 아래쪽으로 향한 작은 가지에 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있지만 위로 향하는 가지가 전부 부러져 있어서 나무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목숨은 붙어 있지만 여자 구실을 못하고 사는 과부의 상황을 묘사하려고 일부러 그려넣은게 아닌가 한다.

담장 너머의 꽃핀 나무와 가지가 부러진 소나무

지금까지 혜원의 작품 <이부탐춘>을 살펴보았는데, 그림의 구도나 색채, 시점이 어떻다는 식의 미술사적인 관점보다는 그가 그려내고자 했던 시대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역사에 무지하거나 어설프게 공부한 많은 사람들은 조선시대를 도대체 긍정할래야 긍정할 수 없는 대단히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 글도 그런 주류적인 시각에 한 몫 거든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과거의 일을 교훈으로 삼아 더나은 내일을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런 자기반성도 가끔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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