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력자는 면접에서 할말이 없다
미술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혹자는 석사학위가 있으니 일 구하는건 어렵지 않겠네?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문학이 처한 현실이 늘 그렇듯, 전공과 관련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 갈 수 있는 일자리는 박물관(미술관), 관련 연구소 정도로 제한된다. 연구소는 연구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일자리지만, 채용공고를 거의 내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전공자들은 주로 박물관(미술관)에 입사하여 학예사(큐레이터)가 되는 루트를 밟는다. 현대미술 전공자들은 갤러리 등에 입사하기도 하는데, 나는 전통 미술을 전공하였기에 그쪽으로는 관심이 안간다. 그들도 전통 미술 전공자보다는 현대 미술 전공자를 원한다. 이리저리 알아본바에 의하면, 갤러리 직원은 영업력도 갖춰야 한다고 한다. 작품 판매 수익이 갤러리의 주된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박물관은 수익을 내는 기관이 아니다. 유물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연구하며, 전시를 통해 대중들에게 선보이는걸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요즈음엔 대중들을 상대로한 교육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렇듯 여러가지 좋은 일들을 많이 하기에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높이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따라서 학예사의 급여는 낮은 수준이다. 박물관이라는 기관의 속성상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국립박물관에 근무하게되면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와 고용의 안정성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업무가 분담되어 각자의 전문성을 높이기도 (비교적) 용이하다. 그다음으로 좋은 곳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립박물관이며,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박물관은 국공립에 비해 안정성과 체계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미술사 전공자라면 대부분 국공립박물관의 학예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요즘 국공립 박물관의 채용공고를 보면, 대체로 1년 미만으로 근무할 기간제 근로자를 원하고 있다. 박물관들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예전부터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몇차례 면접에 가보니, 기간제 근로자 1명을 뽑는데 수십명의 면접 대기자들이 와있어서 구인난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교통이 매우 불편한 군단위의 지역 박물관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박물관에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면서, 다양한 방면의 전공자에게도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따라서 박물관에서 전통적으로 선호했던 미술사나 고고학 전공자 외에도 서지학(고서적이나 목판 등을 다루는 학문), 역사학, 건축학, 박물관학 등의 전공자들이 채용에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지난 정부에서 국공립박물관에서 근무하던 기간제 근로자의 대부분을 공무직(무기계약직)으로 전환시키면서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박물관에서 기간제 근로자를 채용할 필요성이 없어졌다. 공무직 근로자들의 대부분은 고용이 안정화 되었으므로 계속 근무하면서 지금보다 좋은 조건의 채용공고에 응시하거나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등의 선택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이 받는 급여는 정규직 학예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정규직 학예사에 비한다면 책임과 권한이 적다. 대부분 정규직 학예사를 보조하는 방식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도 내부적으로는 고충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하여 나같은 신규 전공자들이 경력을 쌓을 기회가 사라졌다는데 있다. 작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기간제 근로자 채용 면접에 몇차례 가보았는데, 쟁쟁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면접을 보려고 대기하고 있는게 아닌가? 어떻게 알았냐고? 면접이 끝나고 돌아가는길에 몇 명과 대화를 해보기도 하였고, 단체 면접 과정에서 그들이 경력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업무 계획을 어필하는 것을 듣기도 하였다.
나같은 무경력의 지원자는 당연히 불리한 일이다. 물론 채용을 하는 박물관 입장에서는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경력자들을 뽑는다면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일을 가르치지 않아도 금세 적응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경력자들은 면접에서도 면접관이 원하는 답을 척척 해낸다. 경력이 없는 사람은 같은 질문이라도 확신 없이상상을 하여 말할 수 밖에 없으니 불리한 것은 사못 당연하다 하겠다.
이쯤되면 억울하면 너도 경력을 쌓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좀 더 면접을 보아야 확실해지겠지만, 전국 오지에 있는 박물관에도 이미 많은 경력자들이 지원하고 있다. 연고지가 없음에도 많은 지원자들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일반 기업에 응시하는 취준생이라면 시골에 있는 중소기업에 채용되기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경우가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경력자들과 차별될만한 요소를 갖추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뭔지 아직까지는 잘모르겠다. 글을 쓰다보니 억울한 상황에 점점 화만 쌓이는데, 나만의 차별화 요소로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해보아야겠다. 나이많은 무경력자라 언제까지 박물관 채용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20살 이후 언제나 그러했듯이 부모님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다. 나에게 딱 1년의 시간을 허락하고자 한다. 1년간 박물관 구직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그 이후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깔끔하게 접은 뒤 일반 기업체에서 일할 생각이다. 물론 연구가 좋으므로 경제력이 허락한다면 박사과정에 진학할 생각은 있지만, 그건 다른 얘기니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