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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Jun 12. 2024

겨울날의 바베큐 파티, 난로회(煖爐會)

사진1. <야연(野宴)>, 작자 미상,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야연(野宴)이라는 작품이다(사진1). 화면의 상단에는 성가퀴와 성문으로 추측되는 건물의 지붕이 보이고, 그 아래 경사진 땅에는 메마른 풀들이 나있다. 왼쪽에는 커다란 옹이가 박힌 큰 소나무 한 그루가 푸른 잎을 뽐낸다. 소나무 옆으로는 네모난 자리를 깔고 남녀 예닐곱이 모여 앉았는데 다들 손에 접시와 젓가락을 들고 있는 걸로 보아 무언가를 먹는 중이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그림인데, 지금부터 차분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남자들 중 일부는 귀를 덮는 털모자인 남바위를 썼다. 바싹 마른 주변의 풀, 성가퀴 앞의 앙상한 나무 한그루를 참고하면 추운 겨울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인네들은 가발의 일종인 가체(加髢)를 올려 머리를 꾸몄다. 가체를 올려 머리 숱이 풍성해 보이도록 한 것이다. 요즘은 탈모 때문에 남성들의 고충이 크지만 당시에는 여성들이 머리 숱에 더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대낮에 남정네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여염집 여인네가 아닌 기생으로 추정된다. 


향좌측에는 남자 셋이 앉아있는데, 위쪽 두명은 털방석을 깔고 앉아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먹고 있다. 특히 남바위로 귀를 덮은 인물은 고기를 먹으면서 두 눈으로 뚫어져라 앞의 (붉은 저고리)기생을 쳐다보고 있는데, 수염이 덥수룩하고 가운데 앉은 걸로 봐서 나이가 지긋한 양반처럼 보인다. 반대편에 앉은 갓 쓴 젊은이가 그랬다면 혈기왕성할 시기이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그 모습이 추하게 느껴진다. 아래쪽의 나머지 한명은 손으로 술잔, 오른손으로는 술병을 잡은채 녹색 저고리를 주는 기생이 주는 고기를 받아먹고 있다(사진2). 이 남자도 뜨거운 눈길로 기생을 쳐다보고 있으나, 기생 역시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어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서로에게 호감은 있는 것 같다. 이 기생은 털방석도 깔고 앉아 있는데, 이 남자가 자신의 것을 내준 모양이다.

사진2. 썸타는 남녀인가? 야릇한 분위기가 오고간다.


한편 향우측에 쪼그려 앉은 젊은이는 갓을 쓰고 있는데, 의관을 제대로 갖춘 것으로 보아 모임에서 막내뻘이 아닌가 싶다. 쪼그려 앉은 이유는 뒤에 서있는 남자가 지나갈 있게 비켜주려고 같다. 서있는 인물은 뒤늦게 도착하여 마음이 급했는지 신발도 벗지않고 들어오고 있다(사진3). 아마 털방석을 깔고 앉은 남자들 옆의 빈공간이 자신자리가 아닐지. 아무튼 이 남자들은 전반적인 옷차림이 준수하고, 대낮에 기생을 데리고 정도의 재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으로 추정된다. 


사진3. 지각생은 마음이 급했는지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오고 있다.


무리의 중앙에는 화로가 놓여있고, 그 위로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철판 같은 것이 올려져 있다(사진4). 테두리에는 고기를 올려놓고 굽고 있다. 녹색 저고리 기생 옆으로는 국자와 각종 그릇, 채소 등이 놓여있어 고기 굽기 외에도 무언가 국물있는 요리를 할 모양이다. 


사진4. <야연>의 인물부분. 중앙의 화로 옆으로 각종 채소류와 그릇들이 확인된다.


요즘은 아파트 생활을 많이하고 식당도 많아 야외에서 구워먹는 일이 드물지만, 조선시대에는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일이 흔했을까? 1849년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는 이러한 풍습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서울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석쇠를 올려놓은 다음 소고기를 간장, 기름, 파, 마늘,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데, 이것을 '난로회'라 한다. 또 소고기에 무, 오이, 채소, 나물 등 푸성귀와 달걀을 섞어 장국을 만들어 먹는데 이것을 열구자탕, 또는 신선로라 부른다."


- 동국세시기 제3편, 10월 상달 -



이 작품에서 묘사한 장면이 난로회를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난로회처럼 야외에서 소고기를 구워먹는 풍습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홍석모가 난로회를 서울의 풍속으로 언급하였으므로, 이 작품에 그려진 성가퀴와 성문은 이곳이 도성 인근의 산 속임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홍석모가 언급한 신선로(열구자탕)는 그림에 묘사된 요리 도구와 다소 차이가 있다. 신선로를 끓이는 용기는 뚜껑이 있으며, 테두리에 국물을 끓일 수는 있지만 고기를 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이다(사진5). 반면 그림에 묘사된 요리 도구는 테두리가 넓어 고기를 굽기 좋다. 여러자료를 찾아보니 그림에 묘사된 것은 전립투라는 이름의 요리 도구였다. 


사진5. <신선로>, 광복이후, 국립민속박물관


전립투는 군사들이 머리에 썼던 전립(戰笠)을 엎어놓은 모양과 비슷하여 붙은 이름이다(사진6). 벙거지골로 부르기도 한다. 화로에 올려놓은 뒤 테두리에는 고기를 굽고, 중앙에는 별도의 국물 요리를 할 수 있다.

사진6. (좌) <전립투>, 국립민속박물관     (우) <전립>, 국립민속박물관


몇년전 KBS에서 방영한 '한국의 밥상' 에서 전립투를 활용한 요리가 소개되었으니, 궁금하신 분은 참고하기 바란다(사진7). (방송에서는 전립을 쇠모자이자 솥으로 소개하였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전립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의미에서 전립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 '전립투=쇠모자=솥'은 아니다.)

사진7. 한국인의 밥상에 소개되었던 전립투. 방송의 자막만 보면 무관의 모자를 그대로 솥처럼 이용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야연>에 묘사된 장면은 음력 10월 즈음에 행해진 '난로회'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에 묘사된 것처럼, 당시 힘깨나 썼던 양반들은 기생들과 함께 야외에서 귀한 소고기를 구워먹으며 겨울이 오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결론 

조선시대엔 소의 유무가 농작물의 생산량에 큰 영향을 주었으므로 원칙적으로 소잡는 일을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양반들은 그러한 금기를 종종 무시하고 소고기를 즐겼으며, 여러 기록을 통해 이러한 일탈이 아예 풍습으로 정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모임에는 기생들이 함께하는 등 점잖지 못했던 그들의 놀이 문화도 볼 수 있었다. 역시 사람들은 부와 권력이 있을때 그 본성이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술품과 기록들로 인하여 당시의 요리를 복원할 수 있으니, 마냥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현재이지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현재의 삶을 가꾸어 나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전립투를 활용한 저 요리는 잘만 개량한다면 상당한 인기가 있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사진출처 

1~4. E-뮤지엄(https://www.emuseum.go.kr/main)

5. E-뮤지엄

6. E-뮤지엄

7.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26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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