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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Jul 01. 2024

진천 영수사 괘불탱 관람후기

2024 괘불 특별전

2024년 5월.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회화실 한쪽 벽면에 괘불(탱화)이 걸렸다(사진1). 매년 연례 행사처럼 이루어지는 괘불 전시지만 익숙함을 넘어 조금은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변의 안내문이나 전시도록을 보면 박물관 측에서 크게 신경쓰지 않은 느낌이 살짝들고, 종교화의 특성상 개별 작품의 개성이 묻어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산으로 이전 후 괘불전을 처음 시도할때는 크기가 거대하니 주목을 받았겠지만, 비슷한 작품을 매년 접하다보니 특별함을 못 느끼는 탓일거다. 의식용 불화인만큼 범패를 초빙해서 공연을 한바탕 하거나 실제 의식을 소규모로 재현해보는 시도도 의미가 있을거 같은데, 아쉽다. 훌륭한 소프트웨어가 있는 유산인데 하드웨어만 보라고 하니, 매력이 반감된다. 무료 전시라서 그런가? 가치에 걸맞는 관심을 못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하간 올해의 괘불은 진천 영수사에서 올라왔다. 여느 괘불처럼 석가모니불이 주인공이다. 다른 괘불과 유사해보이지만 이 작품만의 특징이 4가지나 존재한다. 그 4가지를 미리 접한다면 좀 더 알찬 감상이 되지 않을까?


사진1. <영수사 괘불>, 1653년, 삼베에 채색, 919 x 570.5cm, 진천 영수사, 보물


영수사 괘불의 특징 4가지


1. 조감법(鳥瞰法)의 사용


<영수사 괘불>은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을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자그마치 140명의 인물이 묘사되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화폭에 담기 위해 높이 나는 새가 아래를 바라본 것 같은 시점이 선택되었는데, 이런 시점을 조감법(鳥瞰法)이라 한다.

 

<영수사 괘불>과 달리, 조선 불화는 대부분 평면적인 시점을 활용하며, 석가와 보살, 사천왕 등 소수의 권속을 중점적으로 묘사한다. 불단 뒤의 후불벽에 봉안되므로 일정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사진2). 눈 앞에 펼쳐놓고 감상하는 일반 회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사진2. 일반 회화와 불화 감상의 차이


이러한 경향은 괘불에서도 관찰된다(사진3). 야외에서 의식을 치르게 되면 의례를 주관하는 승려들과 의뢰한 시주자들 외에도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괘불을 눈앞에서 자세히 관찰하기 어렵다.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많은 인원을 상세히 묘사하기 보다는 부처와 보살 같은 소수의 힘있는 존재들을 부각시키는 방식이 선호되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괘불들은 부처를 중심으로 소수의 권속들을 크게 배치한 사례가 다수이다. 


물론 <영수사 괘불> 처럼 다수의 권속이 등장하는 작품들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17세기에 집중되어있다. 이는 괘불이 임진왜란 이후 유행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학계의 추정과 어느정도 맞닿아 있다. 17세기에 이런저런 괘불을 조성하고 의식을 치러보면서, 승려들은 경험적으로 <사진3>과 같은 괘불을 선호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영수사 괘불은 초기 괘불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서 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사진3. 좌측) 영천 은해사 괘불, 중앙) 고성 옥천사 괘불, 우측) 서울 청룡사 괘불



2. 앉아있는 부처


이것 역시 첫번째 특징과 맞닿아 있는데, 17세기 초중반의 괘불에서는 주로 앉아서 설법하는 형상의 부처가 선호되었다(사진4). 처음 괘불을 그릴때 법당 내부에 봉안된 후불탱화를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앉아있는 모습보다는 서있는 모습의 부처가 보다 큰 생동감을 준다(사진5). 고난을 해결하고자 부처를 찾는 중생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는 인상도 주므로 점차 서있는 부처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수사 괘불>의 부처가 앉아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시기성을 감안해야 한다. 


사진4. 앉아있는 형상의 부처가 묘사된 괘불들. 주로 17세기에 많이 제작되었다.


사진5. 진관사 수륙재. 서있는 모습의 부처는 의식이 펼쳐지는 현장에 친히 강림하셨다는 인상을 주며, 보다 적극적으로 중생 구제에 나서는 듯한 느낌을 준다.


3. 대규모 군중


본 괘불의 하단부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군중들이 운집하고 있다(사진6). 이들은 석가모니불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하거나, 공손히 합장을 한 채 서있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보살이나 나한, 신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수의 군중들을 등장시키는 불화는 드물다. 그러나 비슷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안성 <칠장사 괘불>(1628년, 사진7)과 주륜지(十輪寺) 소장 <오불회도>(15세기 후반)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다. 이들은 불화를 조성할때 시주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투영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본 괘불도 비슷한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6. 하단에 묘사된 대규모 군중들. 이 괘불을 발원하고 시주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아닐까?



사진7. <칠장사 괘불>에 묘사된 군중들. 영수사 괘불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벼슬아치와 도사, 아귀 등 여러 중생들이 붓다를 향해 예경을 올리고 있다.


먼저 중앙에는 엎드려 절하는 무리가 보이는데, 중앙에 좌정한 여래를 향해 예경을 드리는 것이다(사진8). 석존(釋尊)께서 살아계실 당시 야외에서 설법이 이루어졌다면 저런 장면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진8. 석가 여래에게 엎드려 절하는 무리들.


그 좌우로는 공수한 채 홀을 든 제왕(혹은 귀족 남성)들이 서있으며, 향좌측(감상자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귀족 여인들과 도가의 선인(仙人)처럼 보이는 대중들이 합장하고 서있다(사진9). 제왕을 가장 중앙에, 여성을 그 옆에, 대중을 가장자리에 배치한 것은 신분질서의 반영으로 보인다. 


사진9. 신분이 높아보이는 남성과 여성들, 일반 대중들이 합장하거나 홀을 들고 서있다.


이렇게 다수의 대중을 묘사한 것은 본 괘불이 영산회상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영산회상도의 경전적 근거가 되는 『법화경』에는 다수의 대중들이 영축산에 집결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참고가 된다. 



그때 하늘에서는 만다라꽃ㆍ마하만다라꽃ㆍ만수사꽃ㆍ마하만수사꽃을 내려 부처님 위와 대중들에게 흩으며넓은 부처님의 세계가 여섯가지로 진동하였다그때 모인 대중 가운데 있던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와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摩睺羅伽) 등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들[人非人]과 소왕(小王)ㆍ전륜성왕(轉輪聖王) 등 모든 대중들이 전에 없던 일을 만나 환희하 합장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뵈었다.


                                                        - 『묘법연화경』, 서품 -



그리고 화면 하단부의 우측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무용을 선보이는 다수의 여성들이 배치되어 있다(사진10). 이들의 공연은 설법을 해주실 석가모니불을 찬탄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일종의 음성 공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역시 『법화경』에 근거한 도상이다. 



다만 보살이 교화하여 무량 중생을 건졌노라어떤 사람은 탑과 묘나 불상이나 화상(畵像)에 꽃과 향, 깃발과 덮개(幡蓋)로써 공경하여 공양하거나 사람을 시켜 풍악을 울리고북도 치고소라를 불며퉁소ㆍ거문고ㆍ공후나 비파ㆍ요령ㆍ바라와 같은 묘한 음악을 정성으로 공양하며환희한 마음으로 노래불러 찬탄하되…”


                                                       - 『묘법연화경』, 방편품 -



그리고 악사와 무희 무리 가운데 웬 보따리를 든 여성이 한명 보인다(사진11). 이것은 의식을 통해 천도될 영가(靈駕, 영혼)을 모신 함(또는 위패)으로, 이 여인은 재단에 영가를 모시기 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 11. 영가를 모신 함을 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



4. 청문자


마지막으로 다룰 부분은 석가모니불 아래에 무릎 꿇고 앉은 한 비구(比丘)이다(사진12). 이 승려는 석가의 수제자인 사리불 존자로, 대승의 설법을 설해줄 것을 거듭하여 청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 12. 석가모니불에게 설법을 청하는 사리불 존자. 이러한 도상은 흔히 청문자로 일컬어진다.


일명 청문자(聽聞者)로 일컬어지는 이 도상은 『법화경』「방편품」과「비유품」에서 이루어진 석존과 사리불의 문답에서 기인한 장면으로, 15세기 법화경 변상도에서 처음 등장한다. 다만 이시기 청문자 도상은 스님이 아닌 보살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17세기까지 이어져 괘불에도 영향을 미쳤다(사진13).

사진 13. 15세기 법화경 변상도와 17세기 괘불에 묘사된 보살형 청문자.

 

다만 16세기 중반이후 사찰의 승려 교육이 체계화되며『법화경』의 내용을 그린 불화에 보살형 청문자를 삽입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결과 1531년 영천 공산본사(公山本寺)에서 간행한『법화경』판본부터 비구형(比丘形) 청문자 도상이 등장한다. 다만 이러한 인식이 불화에 적용되기까지는 시차가 필요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불화를 그리는 화승들이 보수적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시주자들이 보살형 청문자 도상을 선호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조선 전기 불교의 주된 후원 세력은 왕실 여성들로, 이들은 고승들과 교류하며 불교학에 상당히 해박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을 중생이 아닌 수행자 내지 보살로 여겼고, 그러한 인식을 불화에 투영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추측에 불과하므로, 더이상 구체적인 논의를 펼치지는 않겠다.


여하간 현존하는 불화 가운데 비구형 청문자 도상이 나타나는 가장 이른 사례는 <영수사 괘불>이다. 이후 <청룡사 괘불>과 <칠장사 괘불> 등을 거치며 보살형 대신 비구형 청문자 도상이 일반화 되었다(사진14). <영수사 괘불>은 청문자 도상이 처음 나타난 불화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진 14. 좌측) 안성 <청룡사 괘불>(1658년), 중간) 안성 <칠장사 괘불>(1710년), 우측) 구례 <천은사 아미타불회도>(17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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