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괘불탱 관람 후기 - 1

2025년 드물었던 괘불 전시

by 늦깎이 미술사학도
20251029_134406.jpg 작년 10월 29일 KTX 울산역. 돌아오는 길에 촬영.


작년 10월 28일 저녁, 저는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 열차를 타고 울산역에 내렸습니다. 당시는 경주 APEC 행사가 한창이었죠. APEC 행사를 주관한 지자체는 경주시였으나 인접한 울산이나 포항 등도 상당히 분주했던 모양입니다. 울산역에 내리자 그런 분위기가 어느정도 감지됬거든요.


20251029_140605.jpg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며 한 컷.

하지만 제가 APEC 행사 때문에 울산역에 간 것은 아닙니다. 저는 언론인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니고, 기업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울산역에 갔을까요? 힌트는 이 역의 부역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통도사를 방문하려고 울산역에 내린겁니다. 이곳이 KTX 경부선에서 통도사와 가장 가까운 역이니까요.


본래 당일치기행을 계획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탓에 울산에서 하룻밤을 묵고 움직였습니다. 아침 일찍 숙소 근처에 있던 언양읍성을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양산행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는 양산에 있는 통도사 신평터미널로 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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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울주 언양읍성. 사적으로 지정된 문화유산.


통도사 신평터미널에서 내린 저는 통도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통도사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립니다. 청년 남성이라면 15분 이내로도 가능합니다. 걷다보니 저 멀리 커다란 통도사 영축산문(靈鷲山門)이 보입니다. 산문은 통도사의 입구 역할을 하는 관문으로, 얼마전까지 입장료를 받던 곳입니다. 지금은 사찰 입장료가 폐지되어 주차비만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도사의 위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문이죠.


이제 저 문으로 진입하면 통도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잠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이전부터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유적이 있었거든요. 그곳은 통도사 <국장생석표>입니다. 국장생석표는 통도사에서 동남쪽으로 약 4.4KM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 약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상당히 멀죠.

_HTU4850.JPG 통도사 입구에 있는 현대식 일주문. 영취산문이라 적혀있다. 2021년 사진이지만 지금과 별반 다름없다


통도사에서 버스를 타면 손쉽게 갈 수 있으나 배차 시간이 불규칙한 관계로 그냥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걸어갔습니다. 처음 가는길이라 10분 정도 해맸지만, 덕분에 주변에 흐르던 맑은 하천을 구경하고, 물장구치는 오리도 구경했습니다. 실은 헤맨 시간보다 오리 구경하고 사진 찍느라 허비한 시간이 더 많습니다. 나이를 먹으니 점점 동물이 좋아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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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양산을 잇는 35번 국도로 진입하자 이렇게 국장생석표 안내판이 나타납니다. 보물이라 적혀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유적이길래 보물로 지정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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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번 국도 상에 있는 통도사 국장생석표 안내판


통도사 <국장생석표>의 외형은 보물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다소 초라합니다. 길쭉한 돌을 대충 깎아 세워놓은 것 같죠. 가까이 보니 표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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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한문에 자신이 없는데, 그나마 새겨진 글자들도 반듯하지 않네요. 세월이 흐르며 풍화가 많이 진행된 탓일까요? 다행히 근처에 안내문이 있으니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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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에 의하면, 통도사 <국장생석표>는 고려시대 통도사가 소유한 토지의 경계에 세웠던 표지석입니다. 고려시대엔 이렇게 사찰마다 장생표를 세워 토지 소유권을 표시하고 풍수 비보효과까지 얻었죠. 통도사는 본래 12개의 장생표를 세웠다는데,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양산시에 하나,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또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양산시의 장생표는 국가의 명으로 선종 2년(1085)에 세웠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의 불교 정책, 통도사의 사세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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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생석표를 봤으니 왔던 길을 되돌려 다시 통도사로 갑니다. 30여분을 걸어가니 다시 산문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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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을 지나면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라는 소나무 숲길을 지나게 됩니다. 무풍한송로는 '소나무를 춤추게 하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길'이라는 뜻으로, 구불구불하게 자란 소나무들이 운치있는 숲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길 옆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데, 주변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운치가 있습니다. 그동안 통도사를 답사할 때마다 무심코 지나쳤는데, 알고보니 201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연인이 생기면 함께 이곳을 걸으며 데이트 하겠다는 철딱써니 없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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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문을 지나면 마주치는 무풍한송로.


무풍한송로를 지나면 좌측편으로 큰 주차장이 있으며, 반대편에는 많은 비석과 부도(승탑)가 밀집해 있습니다. 통도사에서 이곳을 부르는 정식 명칭은 부도원입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본래 이들은 통도사 사역 곳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1993년 당시 방장(方丈)스님이던 월하(月下)스님의 교시로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전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현대까지 통도사에서 활약한 스님들의 부도 60여기와 비석 50여기가 남아있어 통도사의 역사와 정통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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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원 전경. 전면에는 비석이 세워졌고, 뒷면에는 승탑(부도)이 자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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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원을 지나면 또 하나의 문을 보게 되는데, 솟을삼문 형태를 한 총림문입니다. 영축총림(靈鷲叢林)이라는 커다란 편액을 달고 있는데요. 총림이란 본래 산스크리트어 Vindhyavana의 의역으로, 많은 수행자와 대중들이 함께 배우기 위해 모인 것이 마치 나무가 우거진 숲과 같다하여 붙여진 명칭입니다.


다만 오늘날 한국 불교는 총림(叢林)을 약간 다르게 정의합니다. 참선수행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을 가르치는 율원(律院) 및 염불원을 모두 갖추고 여법하게 수행 정진하는 사찰을 의미하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은 현재 사찰 7곳을 총림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영축총림 통도사, 해인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덕숭총림 수덕사, 금정총림 범어사, 쌍계총림 쌍계사입니다.

_HTU4877.JPG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을 갖춘 대사찰 통도사는 영축총림이라는 또다른 명칭을 보유하고 있다.


총림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통도사의 가람이 시작되나, 여기서 50미터 정도를 지나니 이날 저의 목적지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통도사 가람에 대한 소개는 추후 별도의 글에서 하겠습니다. 당시 성보박물관 외벽에는 전시를 소개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는데, 사경전과 괘불탱화전, 자장율사 가사전입니다. 저의 방문 목적은 괘불탱화 전시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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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찰 전각을 모티브로 건축한 성보박물관. 외벽에는 당시 진행되던 전시 현수막이 걸려있다.


박물관에 입장하자 로비에 걸린 괘불탱화가 저를 맞이했습니다. 괘불(탱화) 앞에 마련된 작은 단에는 간단하지만 공들여 차린 과일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전에 괘불탱화 앞에서 의식을 진행했던 모양입니다. 그 앞에 놓인 유리 케이스에는 자장율사 친착 가사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이 괘불은 조선 후기 통도사에서 제작하여 의례에 활용해왔으며, 현재는 보물로 지정되어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소장ㆍ관리하고 있습니다. 상세한 이미지는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나 국가유산포털 누리집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박물관에서 느꼈던 현장감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고 싶기에 직접 촬영한 이미지를 보여드립니다.

20251029_121235.jpg 성보박물관 로비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던 거대한 괘불탱.



통도사 괘불탱의 외형

이 괘불은 2015년 성보문화재연구원에 의한 정밀조사가 진행 되었습니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바탕은 삼베 15폭을 한데 이어 마련하였습니다. 높이는 12.22m, 폭은 4.918m 입니다. 무게는 84.8kg입니다.


본존은 여느 괘불과 달리 보관을 쓰고 양손에 연꽃을 든 보살 모습입니다. 보관 중앙에는 짙은 청색 연화대좌에 좌정한 화불 5위가 보입니다. 아쉽게도 화불들이 모두 옷자락에 손을 감추고 있군요. 본존은 불신(佛身)에 여래의 복식인 대의를 착용하였습니다. 대의 표면은 지극히 화려한 문양으로 장엄되어 눈길을 끌며, 가슴과 무릎에는 화려한 수식이 달려있습니다. 괘불의 본존이니 분명히 부처일텐데, 그 외형은 나발과 육계를 갖춘 여래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살에 가깝죠. 이러한 특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의문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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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괘불탱의 본존을 확대한 모습. 좌측은 상반신, 우측은 하반신


머리에는 원형의 녹색 두광을, 불신(佛身)에는 거대한 황색 신광을 갖췄습니다. 신광은 너무나 거대하여 화면에 담지 못할 정도입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저 여백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신광의 내부는 탐스러운 꽃으로 드문드문 장식되었습니다. 추정하건대 이는『법화경』에 의거한 내용으로, 영산회상에서 부처가 설법할 당시 흩날렸던 꽃비를 구체화 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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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하단의 여백은 본존의 신광으로 활용된다. 신광 내부에는 탐스러운 꽃들이 그려졌고, 화면 테두리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범자가 그려졌다.


삼베로 만든 이유


채색을 한 바탕은 종이가 아니라 삼베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괘불은 대개 10미터 이상되는 거대한 크기이므로, 야외에 내걸면 위아래로 가해지는 인장력이 매우 커집니다. 괘불을 걸고 의례를 진행하다보면 가끔씩 세찬 바람이 부는데, 폭이 넓기 때문에 바람으로 받는 압력도 무시 못합니다. 이렇게 상하좌우에서 가해지는 힘을 버텨내려면 종이나 비단보다는 질긴 삼베가 더 적합했을 것입니다. 현존하는 괘불 대부분이 삼베로 조성된 배경은 여기에 있죠.


또한 조선 후기 불교의 주요 신도층이 서민인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왕실이나 귀족층에서 거액의 시주를 받는게 아닌 이상, 대부분의 불상과 불화는 가난한 백성들이 십시일반 시주한 금액을 바탕으로 조성하게 됩니다. 그러니 값비싼 비단보다는 저렴하면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삼베가 주재료로 선택된 것이죠.


2023082218223600.jpg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1767년, 통도사 성보박물관, 보물 (사진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중요 정보가 담긴 화기


조선 불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화면 아래쪽 붉은 네모칸에 작성되는 화기(畵記) 입니다. 화기는 불화의 조성 시기, 봉안처, 발원자, 시주자, 화승 등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명함 같은 존재입니다. 최근 해외로 반출된 우리 불화들이 일부 환수되었는데, 그때마다 화기에 적혀있던 정보들이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했죠. 이 때문에 사찰의 불화를 전문적으로 약탈하는 강도들은 화기를 잘라 도난품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통도사 괘불에도 화기가 있으니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통도사 괘불의 화기는 좌우측으로 나뉘어 작성되었군요. 불사에 참여한 인원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입니다. 참고로 화기에 이들의 명단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이유는 불사에 참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불사에 참여한 공덕으로 극락왕생하거나 다음생에 더 나은 존재로 태어나는데 보탬이 되길 기원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화기에 이름을 기입함으로써 다른 신도들로 하여금 불사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역할도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통도사괘불5(화기).png 하단에 적힌 화기. 좌우로 칠해진 붉은 네모칸이 화기이다. (사진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화기의 내용이 상당히 많아 이 글에서 전부 열거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내용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통도사괘불6(화기).png 화기를 조금 더 확대한 모습. (사진 : 대형불화 정밀조사보고서 2 :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편)


먼저 우측 화기 첫머리에는 隆三十二年丁亥九月日掛佛一座奉安于梁山通度寺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건륭32(1767)년 정해 9월, 괘불 한 축을 (조성하여) 양산 통도사에 봉안하였다” 는 내용입니다. 괘불의 조성시기와 봉안 장소를 알려주는 정보이죠.


그 다음 본사질(本寺秩)에는 산중대덕 비구 찬혜(山中大德比丘䝺惠)를 시작으로 통도사 승려 22인의 명단이 나옵니다. 다음 연화질(緣化秩)에는 괘불을 조성하는 일에 직접 참여한 승려들의 명단을 적었습니다. 불사의 총책임자이자 그려진 괘불이 법식에 맞는지 감독한 증명(證明), 불화를 그리는 동안 다라니를 암송한 송주(誦呪), 불화를 직접 그렸던 경화(敬画) 등 다양한 소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괘불을 제작하는 불사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뭐니뭐니해도 그리는 일이죠. 그런 점에서 경화敬画에 열거된 화승들을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맨 앞에 적힌 수화승 두훈(抖薰)을 필두로, 성징性澄, 윤행玧幸, 통익通益, 수성守性, 정안㝎安, 쾌정快㝎, 탈윤脫閏, 청습淸習, 지환智還, 지열志悅, 민초旻初, 봉정奉正, 수일守一 등 총 14명입니다.


공양주질(供養主秩)에는 등훈(等訓)을 비롯한 9명의 승려가 적혀있는데, 이들은 불사에 필요한 여러가지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왼쪽 화기에는 시주질(施主秩)이 적혔습니다. 괘불 그리는 일에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은 분들의 명단을 기록한 자리이죠. 보통 가장 많은 재물을 희사한 이를 맨 앞에 적습니다. 맨 앞자리에 적힌 인물은 동래읍에 사는 손씨 여인입니다. 이분은 돌아가신 남편 박진영을 천도하기 위하여 특별히 많은 재물을 희사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분 앞에 괘불대시주(掛佛大施主)라는 명칭이 더해진걸 보면 말이죠. 그 외에도 바탕시주, 채색시주, 후배시주, 동참시주 등의 명목으로 많은 인원들이 시주를 하였습니다.




도상의 비밀을 파악하는 열쇠, 개성괘불기(改成掛佛記) 현판


화기를 통해 본 괘불의 조성시점과 봉안처, 제작에 참여한 사람 등 여러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그대로 남습니다. 본존은 왜 여래(부처)가 아닌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죠. 현존하는 전통 사찰의 괘불은 약 120여점으로, 이중 20점 내외가 이렇게 보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는 적지 않은 숫자로, 그동안 불교미술 연구자들에게 많은 의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통도사에는 1767년 괘불을 조성한뒤 그 내력을 기록한「개성괘불기」현판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괘불의 도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로써 학자들이 논저에서 반드시 언급하는 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판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통도사 개성괘불기.jpg <통도사 개성괘불기 현판>, 1767년




건륭32년 정해 9월일 괘불을 새로 조성한 기록과 시주자 명단


나는 항상 비로자나 법계신(法界身)의 넓고도 넓어 경계가 없음과 우주 만유의 보편한 본체인 절대 진리의 이치를 살피면서 조용히 앉아있었는데 지금 괘불화주 태활(兌㓉)이 우리 부처님 석가여래의 장육금신화상(丈六金身畵像)을 성취하고서 나에게 글을 여러번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장육금신은 비로법계신의 그림자 가운데 그림자인데, 그림자로써 어찌 실체를 삼아 그 자취를 적으리오” 하였다. 화주化主가 대답하기를 “그림자로써 본 모습을 찾으면 비로법계의 몸을 보게 될 것이니 그림자로써 본 모습을 찾는 자취를 적어서 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능히 이것을 알고 청하였으니 다행히도 그렇지 않아서 그림자로써 본 모습을 찾는다는 말이 이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로다. 이에 비로법계신을 본다는 말은 오히려 비교하건데 금강경에 말하기를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바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또 삼불(三佛)의 모습이 모두 본 모습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으리라. 그대는 어찌 법계신을 본다고 말하였으며 나는 그림자로써 본 모습을 찾는 것이 이치에 벗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가. 다만 이렇게만 한다면 한 덩어리 구멍 없는 무쇠덩어리이며, 육지가 가라앉음이로다.


삼불(三佛)의 뿌리는 간략히 말하면 소위 법신法이란 법계를 두루 하고도 남으니 본래 경계가 없어서 이 이치에 이르러서는 마음으로 헤아리면 어긋나고 생각을 일으키면 그르치게 되며 다만 마음이 의지함이 없이 깃들게 되면 이치를 저절로 현묘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 소위 보신報身이란 몸의 길이가 천장千丈이니 화장세계에 들어가 십지보살이 되어 설법하는 것이다. 소위 화신化身이란 장육의 금신金身이라 하니, 사성육범(四聖六凡)이 평등하게 귀의하여 제각기 이롭고 안락한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에 중생들이 이 부처님을 흠모하여 그림을 그려서 공중에 걸어두고 언제나 불사를 설하여 중생을 이익케 하시느니라. 이 절의 괘불은 순치 6년 기축년에 이루어졌으니 지금으로부터 118년의 세월 동안에 바탕은 떨어지고 빛깔이 바래어진 것이 심하여서 바야흐로 거듭 새롭히려 할 즈음 병술년 12월 8일 성도재일에 바람으로 인해 부서져 떨어진 바가 되어 대중들이 근심하게 되었다.


27세 된 승려 태활은 이 부처님에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래 땅에도 인연이 있었으며 동래 땅의 사람 또한 화주와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부처님에게도 인연이 있었기에 시주가 되고 화주가 되어 이 불상(괘불)을 이루게 되었도다. 앞의 불상이 이룩되고 그 사이 118년 동안 중생들이 이롭고 안락함이 무궁하였는데 이 부처님이 이루어지니 또한 이보다 더 나으리라. 장차 여러 해를 넘어서 다음 세상을 이롭게 하리니 시주 화주의 공덕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그 화주의 간절한 부탁을 좇아 여기에다 적어 후세에 전하여서 보고 느끼게 할 뿐이로다.


정해년 해동사문 응암 희유(凝庵希有)가 적다.

(번역은 성보문화재연구원ㆍ문화재청,『대형불화 정밀조사 보고서 2 :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2016, 134쪽 참조)




내용이 다소 길지요. 이후에는 시주질이 한참 나오는데, 괘불 화기의 내용과 중복되는 측면이 있어 생략합니다. 희유 선사가 쓴 현판 기문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통도사는 118년전(1649년), 괘불을 한 점 조성하여 큰 행사가 있을때마다 활용하였습니다. 1년전인 1766년 12월 8일에도 성도재일 행사를 맞아 어김없이 괘불이 걸렸지요. 하지만 그날따라 운이 없었는지 거친 바람 때문에 괘불이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맙니다.


충격에 빠진 통도사의 사부대중들. 그러나 다시 한번 불사를 일으켜 새로운 괘불을 모시기로 합니다. 괘불을 다시 그린다는 소식에 멀리 동래지역 신도들도 시주에 참여했습니다. 다행히 불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화주(化主, 불사 비용을 맡는 소임)를 맡았던 27살의 젊은 승려 태활(兌㓉)은 같은 절에 주석하던 고승 응암희유(凝庵希有)를 찾아가 불사의 성공을 축원하는 좋은 글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노승은 글을 써주는 대신 오히려 되묻습니다.


''저 괘불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법신)와 거리가 멀다. 그저 흉내만 낸 형상(장육금신화상)에 불과할 뿐인데, 내 어찌 저 그림을 부처님이라 여겨 글을 쓰겠는가?"


27살 된 젊은 화주 태활(兌㓉)은 거듭 청하였으나 노승의 고집은 참 완고합니다. 혈기왕성한 젊은 승려의 머릿 속에서는 '오늘따라 이 스님이 갑자기 왜 이러시나?' 하는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화주로서 소임을 다하려면 반드시 노승에게 글을 받아야 하는 만큼, 납득할만한 답을 찾고자 많은 생각을 합니다. 이윽고 젊은 화주가 말문을 엽니다.


''네, 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 괘불은 부처님이 아니라 그냥 그림일 뿐입니다. 하지만 근기가 부족한 중생들은 저 괘불을 보고 감동하여 부처님의 참 뜻을 헤아려 보려는 노력이나마 하지 않을까요? 부족하지만 그렇게나마 수행을 시작하여 차츰차츰 닦아나간다면 언젠가는 진리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방편으로 저 괘불을 그렸다 생각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젊은 화주의 대답을 들은 노승은 '그림자(괘불)로써 본 모습(진리)을 구하는 일은 이치에 벗어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화주가 괘불을 그리는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생각하여 마침내 글을 써주게 됩니다.


사실 희유(希有) 선사와 화주 태활이 나눈 대화는 불교사에서 상당히 오래된 담론이기도 합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의 열반 이후 오랫동안 불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본인을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당부도 있었고, 제자들도 진리와 하나된 부처를 형상화 하는 것을 어불성설로 여겼기에 금기시 했습니다. 그래서 석가에 대한 숭배는 사리를 봉안한 불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죠. 간혹 신앙 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불상 같은 존재가 필요할 경우, 불족적(부처의 발자국)이나 수레바퀴 모양의 법륜 등을 대체재로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불상이 탄생하기 전까지 수백년 동안 지켜졌습니다.


살짝 논점에서 비껴나지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일부 자료를 보면서 초기 불교 미술의 형태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불족적입니다. 인도 아마라바티에서 출토된 유물로, 불상을 만들기 이전 불교도들이 어떻게 부처를 숭배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BMImages_00135134001_preview.jpg <불족적>, 인도 아마라바티 출토, 석회암, 영국박물관 소장


아래 사진은 BC 1세기경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치1탑(대탑) 북문 장식 부조입니다. 여기에는 석가모니불의 일생이 다양한 부조들로 조각되어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직전 마왕의 유혹을 견뎌내는 부처가 보리수 아래 네모난 대좌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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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대탑 북문 장식 부조>, 기원전 1세기, 고행중인 석가를 마왕과 딸들이 유혹한다. 석가는 부조 왼편 보리수 아래 대좌로 표현되었다.


아래 사진은 산치 3탑의 남문 부조로, 설법하는 부처가 법륜(수레바퀴)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부처는 설법을 하고, 설법을 듣는 불자들은 주변에서 합장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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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 <산치 3탑>, 서기 1세기 우측 : 3탑 남문 부조


부처를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했던 관행은 대승불교의 경전에도 일부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예시는 『금강경』제 26 법신비상분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른 두가지 모습에서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32가지 모습에서 여래를 볼 수가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약 32가지 모습에서 여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면 32상을 갖춘 전륜성왕도 곧 여래일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로는, 32상으로써는 여래를 볼 수 없나이다."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모양으로만 여래를 보려 하거나, 소리로만 여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이니 그는 결코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금강경』제26 법신비상분 -





이렇듯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이나 불화 등 형상으로 부처를 섬기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실제 사람 모습의 부처를 보고 싶다는 열망은 높아져갔고, 신을 인간처럼 표현하는 그리스 문화를 접하며 결국 불상이 만들어집니다.


다시 본론인 통도사 괘불로 돌아와 봅시다. 통도사의 고승 응암희유는「개성괘불기」기문에서 법신(法身)과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언급하였으며, 괘불 속 부처를 화신(化身)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려운 세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법신, 보신, 화신. 이 셋은 통칭하여 삼신불(三身佛)로 부르는데, 쉽게 설명하기 힘든 개념입니다. 그래도 괘불의 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소 골치가 아프지만 이 개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불교학 서적을 거듭해 읽어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불교미술을 전공한 저조차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만큼 복잡한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설명해보겠습니다. 글이 다소 길어진 탓에 독자분들의 피로가 쌓였을테니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글에서 이어 쓰겠습니다.




참고자료

1. 범어사 홈페이지(총림에 대하여)

https://www.beomeo.kr/about/sub4.php

2. 성보문화재연구원ㆍ문화재청,『대형불화 정밀조사 보고서 2 :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 2016.

3. 위키피디아 - 산치 스투파(Sanchi Stupa)

https://en.wikipedia.org/wiki/Sanchi_Stupa

4. 영국박물관 이미지 정보 검색

https://www.bmimages.com/index.asp

5. 국립중앙박물관,『꽃을 든 부처 : 보물 1350호 통도사 석가여래괘불탱』,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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