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SF 영화나 소설 속 우주 전투 장면을 보며 환상에 젖곤 한다. 거대한 우주선들이 섬광을 뿜으며 미사일과 에너지 빔을 주고받는 모습은 박진감 넘치기 그지없다. 하지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이 질문은 우주 물리학의 거대한 벽을 넘어,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우주 공간에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았다. "현재의 기술로 우주 공간에서 미사일을 쏘면서 우주선 자세 제어가 가능할까? 계산으론 가능하겠지만 그 반작용을 막기 위한 에너지가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직관이었다. 뉴턴의 제3법칙을 떠올리며 반작용의 필연성을 직감했지만, 놀랍게도 한두 발 정도는 충분히 제어 가능하다는 설명을 접했다. RCS 추진기나 반작용 휠 같은 현재 기술로도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상상한 것은 '우주 전쟁 급'의 상황, 즉 수많은 미사일이 발사되고 심지어 레일건까지 사방으로 쏘아대는 난전이었다. 대량 발사 시에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여러 발을 연속으로 쏘면 우주선은 가속된 회전·병진 운동에 크게 노출되며, 레일건을 사방으로 쏜다면 우주선은 문자 그대로 "드릴처럼 미친 듯이 회전"할 것이라는 냉철한 분석이 이어졌다. 이는 "가능은 하지만, 효율이 너무 나빠서 실질적으로는 자멸에 가깝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들은 SF 작품들이 얼마나 물리적 현실을 간과하는지 깨닫게 했다. 대부분의 SF 작품에서는 '자세 제어 시스템이 있다'라는 한마디로 모든 복잡한 물리적 문제를 넘어가버린다. 화려한 연출을 위해 현실성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물리적 반작용을 현실적으로 다루려 노력한 미드 《익스팬스》의 사례는 인상 깊었다. PDC(Point Defense Cannons)나 레일건 발사 시 추진기를 이용해 반작용을 상쇄하려는 노력을 설명하며, 이 작품이 얼마나 드문 시도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에너지 빔 무기 위주인 《스타게이트》의 경우 반동 문제가 적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근원적인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 막대한 에너지를 어디서 얻는가?" 스타게이트 세계관에서는 '나쿠아다' 반응로나 '제로포인트모듈(ZPM)' 같은 가상의 고효율 에너지원을 사용한다.
ZPM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ZPM은 "우리 차원이 아닌, 다른 위상/포켓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꺼내 쓰는" 에너지라고 설명되었다. 현실 물리학에서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영점 에너지'를 다른 차원에서 가져온다는 설정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만 있어도 "하나의 나라 전력이 감당 가능한 정도"라는 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현대 국가 몇 개를 합친 전력망 수준의 공급 능력을 지닌다는 분석이었다.
ZPM의 존재는 단순한 에너지 문제를 넘어섰다. 워프/초광속 여행도 가능하게 하여 "사실상 '은하 문명 단계'로의 도약이 가능한 장치"라는 설명은 압도적이었다. 즉, ZPM은 스타게이트 세계관에서 문명의 수준을 결정짓는, 궁극적인 해결책이자 플롯 구동 장치인 셈이다. 상온 초전도체와 같은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해도 "에너지를 어떻게 그렇게 많이 만들어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남겠지만, ZPM은 그 질문을 "다른 차원"이라는 설정으로 과감히 해결한 것이었다.
ZPM 같은 강력한 에너지원 덕분에 가능해진 '스타게이트'와 같은 순간이동이나 포탈을 보면서,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바로 영혼의 존재 유무 문제야. 결국 원자 수준으로 쪼개져서 다시 다른 곳에서 생성되는 건데 신체와 메모리가 유지되는 거지 영혼 자체가 이동이란 개념으로는 맞지가 않거든."
이 질문은 아주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순간이동이 신체를 원자 단위로 분해했다가 재조립하는 과정이라면, 원본은 소멸되고 새로운 복제본이 탄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의식이란 건 단순한 뇌 신호 집합이 아니라, 시간적 연속성이 핵심이라는 주장"이라는 설명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나는 나의 기억과 패턴인가, 아니면 '영혼'이라는 별도의 실체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핵심은 "그게 기존의 그 사람인가 그냥 똑같이 재현된 복제인가의 문제"였다. 기억과 패턴이 100% 동일하면 그 사람이 맞다고 보는 '정보주의 관점'과 달리, '본질주의 관점'에서는 의식의 연속성이 끊겼으므로 새로운 복제본일 뿐이라고 본다는 설명이었다. 이는 테세우스의 배나 클론 논쟁처럼, 철학계의 오래된 딜레마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클론을 만드는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리며 "그 클론은 그 클론을 만든 원본 기준으로는 내가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나의 직감은 정확했다. 복제된 순간부터 다른 개체이고, 그 이후의 경험은 곧바로 갈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본은 죽고 복제 신체에 기억을 이식해 '내가 이어진다'는 설정의 영화들에 대해서도 "논리적 허구에 가깝다"는 설명을 접했다. 원본의 의식은 죽었고, 새 몸은 단지 원본을 흉내 내는 또 다른 개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클론의 입장에서는 어떤 단절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아이러니였다. "클론 입장에서는 아무일도 없이 쭈욱 이어지는 삶이야." 이 부분은 이 문제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클론은 기억과 인식이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원본의 의식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SF 속 가상의 기술들을 현실 물리학의 잣대로 재어보는 것은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우주선 자세 제어에서부터 막대한 에너지의 근원,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까지. SF는 허구의 세계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확장하고, 때로는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이 탐구를 통해 나는 과학적 상상력의 한계와 가능성,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얻을 수 있었다. SF가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넘어,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창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