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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왜 민주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가

by Yong

미래의 왕들: SF는 왜 민주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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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SF 드라마 속 미래 문명은, 당연히 현대 민주주의보다 한층 더 진보한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수많은 SF 작품 속 고도로 발달한 문명들은 민주주의가 아닌, 왕과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의 모습을 하고 있다. 《스타워즈》, 《듄》, 《얼터드 카본》.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정치 체제는 마치 중세 시대로 회귀한 듯하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들의 상상력 부족 때문일까? 아니, 나는 이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한계와 미래 사회의 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자 경고라고 생각한다.


1.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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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들이 미래 문명을 왕권 국가로 그리는 이유는 서사적 편의성을 넘어선다. 그 밑바탕에는 ‘효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깔려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합의와 조율을 중시하는 만큼, 필연적으로 의사결정 속도가 느리다. 외계의 침공, 행성급 재난, 자원 고갈과 같은 극단적인 위기 상황이 일상인 SF 세계관 속에서, 더딘 민주적 절차는 곧 문명의 멸망을 의미할 수 있다. 반면, 황제 한 사람의 결단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제국은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그려진다.



이는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피시주의(Political Correctness)’의 피로감과도 맞닿아 있다. 약자 보호와 다양성 존중이라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피시주의는, 어느새 과도한 규제와 자기검열, 끝없는 논쟁으로 사회적 효율성을 갉아먹고 있다. 중요한 사안조차 ‘정치적 올바름’과 ‘모두의 감정’을 만족시키느라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 이러한 답답함 속에서, 강력한 리더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왕권 국가는 역설적으로 매력적인 대안처럼 보이게 된다.


2. 기술이 만드는 새로운 귀족


더욱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민주주의를 강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기술은 권력을 극소수에게 집중시켜 새로운 형태의 귀족 계급을 탄생시킬 수 있다. 《얼터드 카본》의 ‘므두셀라’ 계급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의식을 저장하고 육체를 갈아 끼우며 영생을 누리는 그들은, 시간을 무기로 부와 권력을 독점하며 불멸의 왕족으로 군림한다. 기술의 혜택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오직 그것을 소유한 자들의 지배를 영속시키는 도구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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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세계관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이 과연 옳은가. 어쩌면 기술은 인류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불평등, 즉 군주와 노예의 시대로 우리를 되돌려 놓을지도 모른다.


3. 도덕적이지 않은 도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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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피시주의는 더 이상 순수한 도덕적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정의의 편’으로 규정하며 상대를 손쉽게 단죄하는 권력의 무기가 되었다.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된 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위선과 이중잣대는 돌아보지 않는다. 이러한 ‘도덕적이지 않은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피로감은, 차라리 모든 것이 힘의 논리로 결정되는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SF 속 제국들은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힘을 숭배하고, 질서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 모습이 잔혹할지언정,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교묘하게 상대를 억압하는 현대의 풍경보다는 차라리 정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결국 SF가 그리는 미래의 왕들은, 현대 민주주의와 피시주의가 가진 내재적 한계에 대한 우리의 불안감을 비추는 거울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어쩌면 더 단순하고 강력한 질서를 갈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서사를 만들기 쉽다는 편리함을 넘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왕권 국가로 회귀할 수 있다는 상상은, 어쩌면 우리가 맞이할 미래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예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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