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영화의 거대한 세계 속에서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는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영화에는 악령도, 살인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힘이, 정해진 운명을 벗어난 이들을 집요하게 추격할 뿐이다. 나는 이 기이하고 잔혹한 서사를 보며, 이것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거대한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서늘한 가설을 던지고 있음을 직감한다.
1. 운명인가, 알고리즘인가
주인공은 끔찍한 사고를 예견하고, 몇몇 사람들과 함께 죽음의 순간을 피한다. 하지만 안도감은 잠시뿐, 생존자들은 이내 일상 속의 사소한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낸 기괴한 사고로 하나씩 목숨을 잃는다. 이것은 과연 ‘신의 장난’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신의 장난이라면, 그 안에는 어떤 의도나 피드백, 최소한의 대화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죽음’은 어떠한 감정이나 의도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시스템의 오류를 찾아내고 수정하는 비인격적인 알고리즘처럼, 오직 정해진 절차에 따라 ‘버그’를 수정할 뿐이다.
주인공의 예지 능력으로 인해 발생한 생존자들은, 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의 예정된 시퀀스를 벗어난 ‘오류값’이다. 시스템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 오류값들을 제거하는 자동화된 패치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처절한 생존 투쟁으로 보이지만, 시스템의 관점에서 그것은 그저 당연한 ‘균형 맞추기’ 절차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주는 진짜 공포는, 우리의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절실한 사건이, 거대한 시스템에게는 사소한 데이터 정리 작업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2. 시뮬레이션의 경계를 엿본 자들의 비극
이러한 생각에 깊이 빠져들다 보면, 나는 역사 속 위대한 철학자나 천재들의 비극적인 말년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 이 세계의 근원적인 코드를 파헤치려 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 코드의 끝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설계된 것일 수 있다’는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존엄한 삶이 누군가의 시뮬레이션 속 하나의 로그에 불과하고, 우리의 고통과 기쁨마저 그저 시스템의 변수 값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정신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의 주인공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시스템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듯, 그들 역시 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의 경계를 엿본 대가로 현실과의 접속이 끊어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3. 그럼에도, 현실을 살아가는 일
이러한 생각들은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현실을 살아가는 나 자신과 마주한다. 눈앞에 해결해야 할 일들, 내가 가르쳐야 할 제자들, 그리고 주말이면 감당해야 할 편의점의 소란함. 이 구체적이고도 치열한 현실의 무게가, 나를 철학적 망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나는 아이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진짜 공부는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머리를 써서 사고의 힘을 키워나가는 과정이다. 나는 그저 그 길을 안내하는 코치일 뿐이다. 이처럼, 거대한 시스템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나의 역할이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의 인물들은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저항과 연대는, 비록 시스템의 관점에서는 무의미할지라도,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는 눈물겹도록 숭고하다. 어쩌면 이 시뮬레이션의 진짜 의미는, 정해진 운명 속에서도 끝까지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의 이 처절한 몸부림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