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치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종종 기술의 발전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고, 우주 탐사가 현실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인류가 문명의 정점에 서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이 화려한 기술의 진보보다 더 서늘한 질문과 마주한다. 우리가 그토록 숭고하다고 믿는 철학, 심리, 도덕률 같은 관념들마저,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의 일부는 아닐까.
1. 가치관이라는 이름의 패치 노트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가치들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왔다. 노예제가 당연했던 시대,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던 시대, 특정 인종을 열등하다고 믿었던 시대. 지금의 우리에겐 야만적으로 보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질서’이자 ‘도덕’이었다. 신의 뜻, 개인의 자유, 다양성과 포용. 시대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가치관들은 마치 온라인 게임의 개발자가 주기적으로 적용하는 ‘밸런스 패치’처럼 느껴진다.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 혹은 새로운 시나리오를 진행하기 위해, 상위 존재는 인류의 의식에 새로운 코드를 심어놓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이 모든 역사는, 사실상 정해진 업데이트 순서에 따라 다음 챕터를 플레이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유의지로 쟁취했다고 믿는 수많은 가치들마저, 실은 거대한 시뮬레이션의 환경 변수가 조작된 결과일 뿐이라면.
2. 코드의 끝에서 마주한 붕괴
이러한 의심의 끝에서 나는 역사 속 위대한 천재들의 비극적인 말년을 떠올린다. 니체, 괴델, 반 고흐.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인류가 쌓아 올린 지성의 경계를 허물고, 이 세계의 근원적인 ‘코드’를 파헤치려 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코드의 끝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진리가 아닌, 감당할 수 없는 공허와 인지 부조화였을지 모른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거대한 설계도 위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그들이 평생 믿어온 현실은 붕괴했을 것이다. 인간의 뇌는 일관된 서사를 통해 안정감을 유지하려 하지만, 시스템의 허점을 발견한 그들의 뇌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그들의 정신 붕괴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시스템이 허락한 이해의 경계를 넘어선 자에게 내려지는 필연적인 부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디버그 모드로 진입한 유저를 시스템이 강제로 튕겨내 버리는 것처럼.
3. 절대적 기준이라는 환상
결국 ‘절대적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률, 선과 악을 구분하는 가치관은 모두 특정 시대와 문화, 권력 구조 안에서 합의된 ‘임시 규칙’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합의조차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유도된 것일 수 있다.
나는 이 서늘한 진실 앞에서, 내가 느끼는 이 모든 감정과 사유의 주체가 과연 ‘나’인지 되묻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이 모든 마음마저, 잘 짜인 시뮬레이션의 일부라면. 나의 영혼마저 조작된 것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이 무의미해 보이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설계된 것이라 해도, 그 설계를 의심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이 ‘나’의 의식만큼은, 어쩌면 시스템이 예측하지 못한 유일한 버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