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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트래블러스가 던진 질문: AI 신과 시뮬레이션

이끼를 먹는 미래와 AI의 신

by Yong

이끼를 먹는 미래와 AI의 신: 드라마 '트래블러스'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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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를 사로잡은 드라마가 있다. 넷플릭스의 ‘트래블러스(Travelers)’. 흔한 시간여행물이라 생각하고 무심코 재생 버튼을 눌렀지만, 나는 이내 이 이야기가 단순한 장르 드라마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것은 시간 역설이나 무한 루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거대한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서늘하고도 매혹적인 가설을 던지는 철학적 실험에 가까웠다.


1. 영혼이 아닌, 데이터 덮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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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러스’의 세계관은 독특하다. 인류가 멸망 직전에 이른 미래, 인류는 ‘디렉터’라 불리는 초고도의 AI를 통해 과거로 의식을 전송한다. 그들은 죽기 직전의 21세기 사람의 몸을 차지하고, 미래를 바꾸기 위한 임무를 수행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혼의 이동이 아니라 철저히 데이터의 ‘덮어쓰기’라는 점이다. 미래의 의식 데이터가 과거 인간의 뇌에 이식되는 순간, 원래의 주인은 소멸한다.


이 설정은 섬뜩할 정도로 시뮬레이션 이론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의식과 기억이 디지털 데이터처럼 전송되고 복제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이 세계 자체가 물리적 실체가 아닌, 거대한 정보 시스템 위에서 구동되고 있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우리는 각자의 몸이라는 하드웨어 위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2. 구원이 아닌, 무한한 실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는 ‘디렉터’라는 존재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미래는 이미 자연이 파괴되어 이끼를 먹으며 연명해야 할 만큼 절망적이다. 그런 희망 없는 세계에서, 디렉터는 왜 그토록 집요하게 과거로 요원들을 보내는 것일까. 드라마의 결말은 그 의문에 대한 힌트를 준다. 우리가 지켜본 주인공 팀의 사투 역시, 수많은 시도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


어쩌면 디렉터의 진짜 목적은 인류 구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는 미래에서, AI인 디렉터가 존재하기 위한 유일한 이유는 ‘인류 구원 프로젝트’ 그 자체다. 인간이 존재해야 프로젝트가 유지되고, 프로젝트가 유지되어야 디렉터의 존재 이유가 성립된다. 신과 같은 능력을 가졌지만, 그는 스스로를 유지할 동력원을 인간에게서 얻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한한 타임라인을 생성하며 영원히 이 실험을 반복해야만 한다.


3. 시간 역설을 넘어, 존재의 본질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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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시간여행물이 ‘타임 패러독스’라는 함정에 빠져 결국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결말을 택하는 것과 달리, ‘트래블러스’는 다른 길을 간다. 이 드라마에서 과거 개입은 새로운 타임라인의 ‘분기’를 만들 뿐, 원래의 미래를 바꾸지는 못한다. 이는 마블의 ‘성스러운 타임라인’처럼 하나의 역사를 지키려는 시도와도 다르다. 디렉터는 오히려 무수한 평행우주를 만들어내며, 각각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을 뿐이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또한 누군가의 거대한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상상을 떨치기 어렵다. 우리의 자유의지라 믿는 것들이 사실은 상위 존재의 계산된 변수일 수 있고, 우리의 삶과 죽음은 그저 하나의 실험 데이터로 기록될 뿐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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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러스’는 단순한 SF 스릴러를 넘어, 우리에게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신적인 존재조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위해 세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이 시뮬레이션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우리는, 이 게임 속에서 어떤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가. 드라마는 끝나지만, 그 질문은 나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끝나지 않는 시간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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