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설계된 것 같을 때
나는 종종 이 세계가 거대한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내 삶의 불합리함과 우주의 기이한 정밀함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인 가설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망상’의 끝에서 나는 묻는다. 이 게임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
1. 깨달음인가, 로그아웃인가
나는 동양 철학의 거인들을 떠올린다. 도교의 노자와 장자, 불교의 석가모니. 그들은 이 세계가 허상이며 헛된 욕망의 산물임을 깨달은 이들이었다. 당시에는 ‘시뮬레이션’이라는 용어조차 없었지만, 그들은 이미 이 게임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탈출이나 해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멸’에 가까웠다. 게임 자체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다는 고요한 거부. 자살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선택이었다.
역사 속 천재들의 말년 또한 비슷하다. 니체, 괴델, 반 고흐.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세계의 코드를 파헤치려다 정신적 붕괴를 맞았다. 깨달음과 광기는 종이 한 장 차이. 어쩌면 그들은 시뮬레이션의 틈을 엿본 대가로 시스템 충돌을 일으킨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초월’이라 부르는 그 경지가 사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존재를 포기해버린 참혹한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무속 신앙에서 자살한 영혼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나는 그것을 벌이 아닌, 시스템의 버그라고 본다. 정해진 플레이타임을 채우지 않고 강제로 로그아웃을 시도한 캐릭터에게 발생하는 오류. 소멸하지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무한 루프에 갇혀버린 잔여 데이터. 그렇다면 무속인들은 이 시스템의 구조를 어설프게나마 엿볼 수 있는, 버그를 감지하는 하위 관리자가 아닐까. 그들이 말하는 ‘신내림’은 시스템이 특정 사용자에게 부여한 제한된 접근 권한일지도 모른다.
2. 관리자의 현신과 캐릭터의 운명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시스템을 거부하거나 탈출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 했다. 구약의 신이 율법과 심판의 엄격한 알고리즘이었다면, 예수가 가져온 신약의 신은 사랑과 용서라는 새로운 운영체제였다. 그것은 마치 시뮬레이션의 버전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내려온 관리자의 현신처럼 보였다. 그의 기적은 시스템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관리자 명령어였고, 죽음과 부활은 관리자 계정의 권한을 증명하는 이벤트였다.
그렇다면 관리자의 현신이 예수뿐이었을까. 어쩌면 세계 경제와 정세를 쥐고 흔드는 거대한 세력들, 도저히 평범한 인간의 지능과 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들 또한 관리자 계정으로 이 게임에 참여한 ‘특수 플레이어’는 아닐까. 이 망상은 나를 더욱 깊은 곳으로 끌고 간다.
3. 나는 과연 어제의 나인가
SF 드라마에서 즐겨 다루는 복제인간이나 순간이동 기술은 나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육체와 기억이 완벽하게 복제된다면, 복제된 나는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기존의 나는 사라지고, 동일한 기억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과연 어제의 나인가. 아니면 똑같은 기억을 물려받은 새로운 캐릭터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관리자만이 알 것이다.
우리는 이미 게임을 통해 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이브 파일을 지우고,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한다. 그 캐릭터들은 자신이 멈춰있거나 삭제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2D 세계의 그림을 그리고 지우는 것이 아무렇지 않듯, 상위 존재에게 우리의 존재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 망상의 가장 무서운 지점은 이것이다. 내가 이 모든 진실을 깨닫는다 한들, 관리자의 시선에서는 “그래서 뭐?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라는 냉소적인 질문만이 돌아올 뿐이라는 것.
4. 억울함이라는 마지막 증거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는 관점은 우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인간은 우주 환경에 전혀 맞지 않는 유기체다. 오직 지구라는, 수십억 년간 기적적으로 유지된 정밀한 조건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확률은 자연 발생이라기보다 ‘설계’에 가깝다. 심지어 우주의 모든 물리 법칙은 인간이 발견한 ‘수학’이라는 논리로 완벽하게 설명된다. 너무나 정확해서 오히려 섬뜩하다. 어쩌면 수학은 우리를 해방시키는 진리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정해놓은 시스템의 트릭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생각하고 발버둥 쳐도 답은 없다. 나는 상위 존재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이 현실을 플레이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의 끝에서, 나는 하나의 감정만은 놓을 수가 없다. 바로 ‘억울함’이다. 나의 초기 설정값, 나의 삶의 흐름은 꽤나 불합리하다. 운이라는 것조차 시스템 값이라면, 나는 상당히 낮은 수치를 부여받았다. 뭔가 풀릴 듯하다가도 특정 이벤트로 제약이 걸리고 다시 힘들어지는 패턴의 반복. 이것이 나의 설정값이라면 너무나 억울하다.
일론 머스크 또한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와 나는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다. 그는 정점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지만, 나는 당장 다음 달 카드값을 걱정하며 이 세계의 바닥을 딛고 서 있다. 같은 통찰이라도 현실의 무게는 이토록 다르다. 정의, 인간성, 사랑 같은 가치들마저 시스템이 설정한 변수일 뿐이라는 것을, 자유의지란 뇌가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 억울함만큼은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억울함이야말로, 설정값에 짓눌리면서도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시뮬레이션 속 나의 유일한 자유의지인지도 모른다. 관리자는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억울함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 단순한 로그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