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나의 서열은 늘 애매했다. 고참이라기엔 부족했고, 마냥 후임이라기엔 이미 내 밑으로 줄줄이 후임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 어중간한 위치 때문에, 나는 부대 내에서 시행되는 새로운 정책의 첫 번째 실험 대상, 즉 '첫 타자'가 되기 일쑤였다.
내가 군대에 막 적응하기 시작한 일병 3~4개월 차, '선진병영'이라는 슬로건 아래 새로운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첫 번째가 '각 소대별 자체 의무기술자 육성'이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첫 번째로 차출되었다. 연대본부 의무대에 가서 2박 3일간 타 부대원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의무교육 수련증'을 받았다. 덕분에 심폐소생술만큼은 확실히 배웠고,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을 옮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깨달았다. 그것은 군에서 받은 몇 안 되는, 지금까지도 유용한 기술로 남아있다.
두 번째 큰 차출은 상병 6호봉 때였다. 분대장을 달 차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나는 '분대장 교육대'로 향했다. 졸지에 가본 적도 없던 7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한 달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짬의 다른 부대 고참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하… 이 짬에 교육이라니" 하는 불만 가득한 표정들이 역력했다.
출발 전, 대대장은 성적을 잘 받아오면 휴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예상과 달리 교육은 엘리트 장교들이 진행하는 양질의 군사 교육이었다. 나는 휴가를 받기 위해 열심히 시험에 임했고, 90점 중반대의 높은 성적을 받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휴가가 아닌 외박권이었다. 군대란 그런 곳이었다. 약속과 현실 사이에는 늘 미묘한 간극이 존재했다.
교육이 한창이던 어느 날,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수색대대에서 크레모아 폭발 사고로 4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매복을 마치고 탄약고에 장비를 반납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교육생 중에는 그 수색대대 소속 대원 두 명이 있었고, 그들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우리는 감히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크레모아는 원래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 사고가 잦은, 두려운 지뢰였다. 그날, 교육대의 모든 훈련은 잠시 무게를 잃었다. 우리는 눈앞에서 전우의 죽음을 마주하며, 군 생활이 목숨과 직결된 현실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교육의 마지막 밤, 우리는 고기 파티를 열었다. 사단장도 잠시 참관했는데, 나는 훗날 그가 별 네 개를 달고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것을 TV에서 보게 되었다.
분대장, 그리고 리더의 무게
자대에 복귀했을 때,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정식으로 교육받고 임명된 첫 기수 분대장이라는 사실에 간부들은 우리를 인정했고, 후임들도 우리를 다르게 봤다. 분대장의 역할은 단순히 작업을 지시하는 것을 넘어섰다. 소대 내 선임과 후임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길 때, 그것을 조율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나는 때로 가까운 후임들에게 미리 언질을 주고, 평소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분대장이자 왕고인 내가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질서를 잡곤 했다.
나는 일을 직접 하기보다 후임들에게 합리적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맡았다. 훈련이든 작업이든, 체력과 능력에 맞춰 역할을 나누는 것이 리더의 몫이었다. 다행히 후임들은 나의 위치를 이해하고 잘 따라주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난 뒤, 새로 들어온 후임들은 결국 그들만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나의 역할은 내가 그곳에 있을 때까지만 유효했다. 그것이 순환하는 군대라는 조직의 숙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