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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언가 Jul 12. 2022

내 몸이 사라졌다

<내 몸이 사라졌다 I lost my body, 2019>


    전갈과 개구리가 강가 앞에 있다. 전갈은 강을 건너고 싶지만 수영을 할 수 없었기에 개구리에게 "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달라"라고 부탁한다. 개구리는 전갈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란 걸 겁내 하며, 태우지 않겠다고 한다. 전갈이 다시 개구리에게 "널 찌르면 나도 같이 죽을 텐데 그러겠어?"라고 말하자 개구리는 전갈을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강에 중간쯤 도달했을 때 큰 물결이 전갈과 개구리를 덮치자 겁이 난 전갈은 독을 품은 꼬리로 개구리를 찔러버린다. "모두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왜 찌른 거야!" 개구리가 화를 내며 죽어가자 전갈은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가 없었어. 이게 내 천성이야." 전갈도 당연히 개구리를 찌르는 것이 죽음을 자초한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푸념으로 알 수 있듯, 그건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란 이름의 천성이었다. 전갈의 천성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 이미 태어남과 동시에 얻은 천성으로 내 인생은 정해졌었단 말일까. 우리는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까? 


    <내 몸이 사라졌다>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우화를 인용했다. 영화 안에선 전갈도 개구리도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몸을 잃은 잘린 손이 열심히 주인을 찾으러 가는 내용이다. 기괴한 설정이다. 잘린 손이 주인을 찾겠다는 일념 하에 도시를 누비는 모습은 어느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공포를 주기 위해 만든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를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정해진 불행을 자신의 현존재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줬기 때문이다. 


    주인공 나우펠은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그 사고 이후 뒤틀어진 인생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부모님의 재능을 이어받아 피아니스트도 우주인도 하고 싶어 그렇다면 피아노 치는 우주인을 하겠다고 말하던 꿈 많던 소년은 성인이 되어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도 잊어버렸다. 두렵거나 슬플 때 혹은 인생이 철저히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나우펠은 정지를 선택함으로써 불행을 끝없이 유예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죽음을 맞이할 일은 없다. 죽음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생이 끝나는 것이니 삶이라 부를 수 없다. 우리의 생은 죽음 직전까지 우리를 인도할 뿐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언제나 살아있다는 뜻이다. 길을 걷다가 내가 아직도 살아 있음에 문득 감사하여 눈물을 쏟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순간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살아있는 상태로 태어나서 언제나 살아있는 상태로 끝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살아있다'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이다. 좀비들도 살아있다. 해괴한 꼴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도 심장이 뛰고 두 다리를 움직여서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린 그들을 보고 살아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가 태어난 목적이 뭐라고요 할머니?" 영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주인공 영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할머니를 쫓아가며 끝까지 알고 싶어 했던 질문. '그래서 제가 태어난 이유가 뭐라고요?! 알려주세요!' 어쩌면 나우펠은 영군이처럼 이런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모두에게 어렵고 난감한 질문이다. 


    우리는 이 우주에 아무 의미 없이 태어났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원자들이 뭉쳐서 만들어졌고 죽음이란 것도 원자들이 흩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만져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실제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상상과 의미를 믿으며 무한한 감정을 감각하는 생명이다. 태어나면서 얻은 목적도 없고 어떤 그 누구도 내 인생을 알려줄 수 없기에 언제나 삶의 의미는 새롭게 탄생한다. 감독은 잘린 손의 험난한 여정과 변화하는 나우펠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있다는 것은 오롯이 오늘의 존재가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려준다. '여기에 내가 있다'라는 그래피티 위에 우뚝 서있는 잘린 손이 듬직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운명을 믿어요?"

"인생은 다 정해져 있고 우린 그냥 따라갈 뿐이라고요? 아무것도 못 바꾸고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죠. 우리가 아예 엉뚱한 행동을 한다면 모를까."

"그게 뭔데요?"

"그러니까.. 왜 있잖아요. 걸을 때 여기로 오는 척하며 딴 길로 새서 저 크레인으로 점프하는 거예요. 하면 안 되는… 뭔가 즉흥적인 일. 금지된 행동을 하는 거죠. 덕분에 다른 세상에 가서 잘 됐다며 후회도 안 해요."

"그러고요? 드리블로 운명을 피한 다음엔 어떻게 해요?"

"계속 피하는 거죠. 냅다 뛰는 거예요. 행운을 빌면서요."


    나우펠은 자신에게 트라우마였던, 부모님의 사고 순간의 녹음테이프 위에 새로운 소리를 덮는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싶다면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해보라던 나우펠은 멀리 떨어진 크레인으로 냅다 달린다. 행운을 빌면서. 발을 조금이라도 헛디디면 추락할 높이지만 그는 자신의 천성을 그리고 운명을 거스른다. 겨울의 칼바람을 가르며 크레인에 무사히 착지한 나우펠은 큰 숨을 몰아쉬며 그 언제보다도 살아있음을 느낀다. 크레인에 누운 나우펠 위로 별빛 같은 눈송이들이 떨어지고 그곳은 어릴 적 꿈꾸던 우주인의 모습처럼 온 우주가 나우펠을 감싼다. <내 몸이 사라졌다>는 우리의 삶이 존재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감긴 태엽처럼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지 묻는다. 당신의 몸은 당신과 함께 잘 살고 있는가? 아니면 사라져 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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