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하다, 구구절절해

by 유리


내 아이는 말이 늦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 서너 살만 돼도 종알종알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애들이 있었다. 우리 애는 그런 애들 틈에 있으면 옹알이 수준이었다. 그런데 내 아이가 또래보다 훨씬 빨리 깨우친 단어가 하나 있다.

‘구구절절‘

평소에 내가 자주 쓰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뭐라고? 구구절절 말하지 말고 그래서 선생님께 혼이 난 거야? 어쩐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뭐라고 해야 해 이럴 땐? 구구절절 딴 말 하지 말고, 엄마한테 잘못했을 때는 뭐라 한다고?”

“아니, 누가 그림 일기에 구구절절 너 오늘 했던 일을 다 쓰면서 자리만 채우고 있어? 딱 재미있었던 거 하나만 중점적으로 써 봐.”

끊임없이 아이에게 구구절절 하지 말 것을 강요했더니 어느 날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던 내게 아이가 말했다.

“아유, 엄마 그만 좀 구구절절 물어봐라.”

아직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그 조그마한 입에서 ‘구구절절‘ 단어가 튀어나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지간히도 내가 많이 썼던 모양이다. 고쳐야겠다 생각했지만, 그 후에도 나의 ’구구절절‘ 사랑은 식지 않았다.

사실, 사랑하는 게 아니다. 구구절절을 극도로 혐오하기 때문에 많이 쓰는 거다. 그런데 참 웃긴 게 구구절절한 상황은 나한테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난다. 싫어하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다.

운동을 하러 가서 오늘 컨디션 어떠냐, 오늘은 잘 될 것 같냐 묻는 운동 선생님께 구구절절 내가 지금 몸이 어떻고, 어제 밤에 뭘 먹었더니 소화가 안 돼서 좀 찌뿌듯하다고 변명을 늘어 놓는다. 못 할 걸 대비한 ‘밑밥’이다.

하교 후 오늘 저녁은 뭐냐고 묻는 아이에게 일장연설을 늘어 놓는다. 어제 네가 말했던 돈가스를 오늘 튀겨 주려고 했는데 마침 오전에 은행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 오니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다. 그래서 마트에 가지 못 해 돈가스를 못 샀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건강하게 고등어를 구워줄게라고 실망한 아이의 얼굴에 대고 뻔뻔하게 핑계를 내뱉어 본다.

지금도 구구절절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또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다. 변명이 한가득이라 어질어질하다.

자고로 잘하면 깔끔하다. 군더더기 없이 거기서 끝이다.

“시험 잘 봤어?”

“응.”

“시험 잘 봤어?”

“아니, 그게 이번에 내가 시험볼 때 딱 배가 아파가지고…그런데 또 하필 딱 내가 공부 안 한 부분이 많이 나와서…”

TV에서 명MC나 대기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참으로 정갈하다. 질문이 간단하니 돌아오는 대답도 명료하다. 반면, 서두가 길고, 수식어가 화려할 수록 알맹이가 없고 두루뭉술하다. 가는 질문이 그러하니 오는 대답도 장황하고, 꾸미는 말만 있을 뿐 실체가 없다.

대학 졸업 시즌이 되면 다들 취업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내 동기들은 대부분 열심히 노력해 좋은 곳에 턱 하니 취업했다. 노력을 하니 결과가 깔끔하다.

난 어땠는가. 남들 다 가는 대기업은 시시하다며 속으로 동기들을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큰 뜻이라도 이룰 줄 알고, 지상파 방송국만을 고집했는데 그러다가 시기가 남들보다 늦어져 버렸다. 난 뒤늦게 정신 차리고 다른 곳으로도 눈을 돌렸다. 하지만 준비한 건 부족한데 마음만 급하다 보니 내가 겨우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은 남들에게 말할 때 이런 저런 부연 설명이 많이 필요한 곳이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마저 매우 구구절절하고 핑계가 가득하다.

어디 다니냐는 질문에 자기가 다니고 있는 회사 이름 하나만 깔끔하게 말하면 됐던 이들과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했던 나. 이건 명백히 나의 K.O패이다.

언제나 깔끔하게 설명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지향한다. 내가 하려던 대로만, 딱 그렇게 변명 없이 이뤄내고 싶다.

“아니, 그게 내가 매수 버튼 누르려던 게 아니고 예약매수 걸어놓으려던 건데…아휴..”

“내가 진짜 오늘은 액상과당 그만 마시려 했거든? 그런데 마침 누가 주는거야. 버릴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또 마셨지.”

“오늘은 진짜 아침에 애랑 안 싸우려고 했는데 얘가 학교갈 시간이 다 됐는데도 밍기적거리고 있는 거야. 그래서…”

하지만 난 오늘도 구구절절 말이 많다. 많아도 참 너무 많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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