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구미 최종본_진짜진짜최종

by 유리

난 청순하고 튀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고급스러움이 한 스푼 들어간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 그게 내 추구미다.

추구미를 좇으려 하지만, 현실은 거기에서 살짝 아니면 많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경우도 그렇다.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 해 말을 별로 안 하니 튀는 편은 아니긴 한데 청순한 인상은 영 아니다. 고급스러움도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인위적으로 비싼 물건을 휘둘러 “나 고급스럽지?”를 외치는 게 아니고 분위기나 태도에서 나타나는 고급스러움 같은 것 말이다.

40대에 접어들면 사람의 인생이 얼굴에 나타난다고들 한다. 사람들은 내 얼굴에서 어떤 삶을 찾을까? 핑계 가득 구구절절한 삶? 수면 위로는 괜찮은 척 쿨한 척 해놓고 수면 아래에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애쓰는 삶? 제발 그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추구미와 동일하지는 못 해도, 발 끝 정도는 닮고 싶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내 추구미로 살려면 세상 여유롭고 인자하며 말도 조근조근해야 하는데 상황이 도와주지 않는다. 등교 시간이 다가와도 학교를 다니는 건 정작 본인인데, 내 아이는 아주 천하태평이다. 반면, 나는 마음이 조급해 미치겠다. 거북이마냥 느릿느릿, 소파에 슬라임마냥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다가 결국 아침부터 소리를 빽 지르고는 기어이 아이 눈에 눈물 방울을 그렁그렁 맺히게 만들었다. 그렇게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죄책감으로 가득찬다. 왜 난 또 화를 참지 못 하고 소리를 질러버린 건가. 내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오고, 미간에는 빡 11자 주름이 새겨진다. 청순하고 고급스러운 삶? 니미, 개뿔이다.

오래된 친구들과 있으면 편하고 좋지만 가끔 웃픈 상황도 생긴다.

아이 방학이 되면 난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 원래 살던 지역에 잠시 다녀 온다. 가서 양가 부모님도 뵙고, 짧은 일정 중 시간이 난다면 가끔 친구도 만난다.

이 곳에서 나는 아주 편하다. 왜냐하면 아주 오래 전 학생으로서의 나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엄마로서의 나는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로서의 인맥, 생활, 이미지는 이 곳에 흔적조차 없다. 어른으로서의 사회적 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곳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자유를 맘껏 누린다.

하지만 나와 학창시절을 이 곳에서 함께 보내고 여기서 결혼해 엄마로서 제2막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은 나처럼 이방인이 된 친구를 보면 안절부절 못 할 때가 있다.

“야, 나 그런 이미지 아니다. 아는 엄마 누가 볼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는 조심해라.”

그들이 나직하게 말한다. ‘그런 이미지’에는 여러가지가 포함돼 있다.

순대국이나 해장국보다는 브런치를 좋아하는 이미지

거친 욕설보다는 고운 말을 쓰는 이미지

아등바등 조급하기 보다는 여유로운 이미지

휴대폰보다는 아이와 독서하는 이미지

이해한다. 나도 그러니까. 내가 이방인이어서 편한 게 그거 때문이니까. 난 어른이 돼서 만난 인맥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 곳이 참 편하고, 친구는 좌불안석이다. 다 추구미와 현실이 달라서 아니겠는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만약, 내 친구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온다면 반대로 내가 좌불안석이 돼 친구에게 입단속을 시킬 것이다.

“야 진짜 조용히 해라. 나 여기서 그런 이미지 아니니까.“

대중 앞에 서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정했든, 타인이 정했던 정해진 추구미의 이미지를 팔고 산다. 그리고 나 같은 대중은 그 이미지를 소비한다. 그래서 가끔 나도 모르게 착각할 때가 있다.

“어? 예전에 그런 이미지 아니었는데? 사람 변했네.“

변한 게 아니고, 추구미가 바뀐 거니까 그냥 서로서로 모른 척 해주면 된다. 옛날에 아등바등 옆에서 받쳐주는 캐릭터였더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받쳐지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옛날에 학교에서 은따를 당했던 적이 있어 남 눈치를 많이 봤더라도, 지금은 남 눈치 같은 거 신경 안 쓰는 자기 신념 꼿꼿한 사람인 척 살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 추구미가 그것이라면 말이다.

어차피 인생은 실수의 연속이다. 내 추구미가 내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흑역사일 수도 있다. 그럼 그 때 또 수정하면 되는 거다. 나도 현재 많이 수정된 상태이고, 앞으로도 더 수정될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n차 수정본’이 될 테니, 이것이야말로 추구미와 현실의 간극이 좁아질 절호의 찬스 아닌가. 이대로 가면 ‘인생 추구미 최종본_진짜 진짜 최종’도 금방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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