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먹기 전에 기록하자
이게 맞나?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고객에게 집착한다.
우선 고객 데이터에 집착한다.
예를 들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뽑아내고 최소한 3개 이상의 관점에서 데이터를 분석한다. 학생 나이, 과목별 성적대, 수시/정시 지향, 사는 지역, 출석률, 성적 향상 추이, 프로그램 참여 이전 이후 지표, 고객군별 마케팅 지표들 등 무수하게 많은 데이터를 추출한다. 그리고 데이터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여 인사이트를 뽑아낸다.
데이터만 집착하는게 아니다.
CRM 마케팅을 하면서 고객이 우리한테 화나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문자들을 보냈다.
고객이 3000명이 안되는 단계임에도 문자 보내는 비용만으로 한 달에 200만원 이상씩을 썼다. 뽑아낸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객군을 분류하고, 고객군에게 알맞는 스크립트를 작성하여 문자를 보냈다. 고객들은 하루에 2-3번씩 우리의 광고성 문자를 받았다. 나중에는 수신차단을 하겠다고 항의성 CS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다음과 같다.
당시 우리 팀은 신인 수학 선생님의 온라인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무료특강을 진행한 결과, 열댓명의 학생들이 수강신청 의향이 있다고 답했지만 결제를 하지 않고 있었다.
팀 회의 결과 문자 푸시를 보내는 것 보다 직접 전화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객 만족도 조사를 하기 위해 내가 직접 50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전화를 한 적도 있으니까.
회의 결과, 수학 선생님이 직접 학생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결국 수학 선생님은 주말에 직접 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왜 결제를 하지 않게 되었냐고 이유를 물어보셨다. 이는 동네 학원에서는 흔한 일 일수 있어도, 중견기업 규모에서 이런 일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사실 무엇이 맞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amazon의 '고객집착'은 상당히 유의미한 지향점이고 회사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매일 광고성 문자를 발송하고, 고객이 불편할만한 전화를 여러 번 하는 것은 의문이 남는다. 내가 나중에 회사를 차린다면 이런 방식을 택할지는 조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다만, 고객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상식 이상의 노력과 철면피가 필요하다는 것은 배웠다.
위에서 언급했듯, 상당히 많은 데이터를 추출하고 분석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턴인 내가 아무리 데이터를 많이 분석하고 인사이트를 뽑아내봤자, 의사결정을 하는 분들은 데이터 분석 결과를 제대로 읽어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과정에서 현타를 많이 느꼈다. 데이터를 보는 개인의 실력은 커가는 느낌인데 그게 팀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는 의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팀장님을 비롯한 여타 팀원들이 데이터를 온전히 숙지하고 다음 프로젝트에 인사이트를 반영할만한 시간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데이터는 쌓여가고,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상당한 품이 들었다. 사업에 반영되지도 않을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고 있었다. 안그래도 바쁜 업무에 데이터 분석 업무까지 추가되어 여러 팀원들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한창 서비스 런칭을 준비하고 있어서 모두가 바쁜 와중이었다. 마케팅을 담당하던 팀원이 그 주차 마케팅 액션과 CAC 변동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회의에서 팀장님과 작은 갈등이 있었다. 팀장님은 데이터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 앞으로 꼭 챙겨달라고 당부하셨지만, 당시 그 팀원은 하루에 3-4개의 회의, 매주 새로운 마케팅 프로젝트 등 업무에 데이터 분석까지 처리하느라 하루도 빠짐없이 야근을 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몇몇 팀원들에게는 불필요한 데이터 분석이 업무량을 과도하게 늘리는 주범이었지만
어떤 팀원들은 과도한 Alignment 회의 및 불필요한 업무 프로토콜 때문에 힘들어했다.
작은 프로젝트도 여러 부서의 승인을 꼭 받아야 했고,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여러 사람의 감독 하에 진행해야 했다. 이를 통해 스타트업에서 진정한 '자율과 책임'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과한 업무는 사업의 본질을 흐리게 된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해서 큰 그림을 놓치게 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우리 팀원들도 우리 서비스와 타 서비스 간의 차이에 대해서 1줄로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본인에게 주어진 과제를 바쁘게 처리하느라 기초부터 차근차근 기획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는 서비스의 한줄 설명, 서비스의 핵심 가치, 서비스의 차별점은 가장 말단의 직원까지도 명확하게 꿰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직원들이 그 서비스를 설명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고객들에게 일관적인 가치를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지나친 업무는 독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글을 쓸 기회가 많을 테니 간단하게만 언급하려고 한다. 내가 있었던 회사가 테크 스타트업은 아니었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업무는 직원들에 노동에 의존한다는 것을 배웠다. 기술 자동화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직원을 한 명 더 채용하는게 더 빠르다.
수년-수십년 미래에는 기술 대체가 활발해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아무리 화려한 스타트업도 man power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다가 온 팀원한테 물어보니, 우리만 이렇게 노동집약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90%의 일은 기술이 아닌 이 때문에 직원 한 명 한 명의 역량이 상당히 중요하다. 심지어 인턴도 중요한 일을 담당한다. 나도 5개월 간 일을 하면서 '내가 이 일까지 해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의 주요 업무를 받아본 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