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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새싹의 실험실 Jun 17. 2023

로스쿨과 유전자 오작동

원시시대 유전자가 지금은 독이 된다

최근 <역행자>라는 책을 읽고 있다.

어찌보면 상식에 가까운 심리학, 진화학 지식들을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다르게 보면 그러한 상식을 현실에 응용하는 법을 알려주는 도움 되는 책이다.


<역행자>에서는 평판 휴리스틱에 관해 이야기한다.


휴리스틱은 우리가 매번 이성적이고 적확한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대충', '그럴듯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원시시대 인간은 휴리스틱을 가지고 있어야 야생동물을 빠르게 눈치 채고 도망칠 수 있다. 호기심을 가지고 위험한 야생동물인지 적극적으로 탐구한 원시인들은 대부분 죽어서 후손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여러 휴리스틱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 이야기 주제는 평판 휴리스틱이다.


평판 휴리스틱을 쉽게 설명하면 사회에서 받는 평판에 휘둘리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예컨대 테니스 동호회에 들어가면 밖에서 뭘 하던 사람이건 테니스를 잘 치는 사람이 왕이다. 따라서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한 사람들은 동호회 내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신경 쓰며 테니스 실력을 연마한다.


평판 휴리스틱을 비롯한 휴리스틱들은 원시시대 인간에게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현대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평판을 지나치게 신경써서 집단 내 본인의 지위에 매달린다거나 본인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평판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유튜브를 하겠다고 생각이 들지만 얼굴이 나오면 평소의 진중한 평판에 금이 갈까봐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이를 유전자 오작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에 도움이 되었던 유전자가 현대에서는 핸디캡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로스쿨이야말로 가장 평판 휴리스틱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 아닐까.

로스쿨은 철저히 성적으로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집단이다. 매 시험의 등수가 공개되고, 알파벳 형태로 등급이 부여된다. 이러한 로스쿨 등수는 로펌 취업에도 직결되며, 변호사 시험 합격 여부를 가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마냥 즐기면서 공부를 할 수 없는게, 상위 50% 내에 들지 않으면 변호사 시험을 탈락하여 1년 더 수험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스쿨을 한 학기 다니면서, 고등학교에 비해 성적을 가지고 사람들의 급간을 나누는 행위가 많지 않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다들 고등학교 3년 + 대학교 4년을 다니면서 사회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쿨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한 번도 못 해본 적이 없는 공부 엘리트들이기 때문에 평판(=등수)을 상당히 신경 쓰는 듯 하다. 동기들 모두와 대화를 나눠 본 것이 아니라서 확언은 하지 못하겠지만 일단 공부를 아예 놓고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대충 대충 하는 사람도 내 주변에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하고, 등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그로 인해 강박증까지 생기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원래 나는 로스쿨 학점이 아닌 변호사 시험 합격을 목표로 로스쿨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무한경쟁과 압박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법 공부가 재미 있으니까 흥미를 가지고 공부해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보니 어느 순간 경쟁에 매물되기 시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공부를 하고 남는 시간이 있어도 '조금이라도 더 해놔야 뒤쳐지지 않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남는 시간을 공부에 쓰게 되었다. 그 결과, 나도 로스쿨 1-1을 재학하면서 혼잣말을 하면서 파찰음을 크게 내는 매우 독특하고 기괴한 강박증이 하나 더 생기고 말았다.


내 사고의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1. 그래도 자격증은 따야지

2. 그러려면 지금 뭐라도 해둬야하는거 아닌가

3. 내신 공부부터 해두자

4. 내신 공부를 했는데 성적을 낮게 받으면 억울하다

5. 성적에 신경이 쓰이네


이런 사고의 굴레가 무한 반복 되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스트레스가 폭발하기 직전에 종강을 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사실 평판 휴리스틱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것도 아니고, 원시시대에 옳았던 것이 현대에 들어맞지 않는 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론만 알았을 뿐 정작 실생활에 응용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속하고 있는 사회집단의 평판에 매몰되는 유전자 오작동에서 벗어나서 '나'라는 브랜드를 개발할 수 있는데 시간을 더 쏟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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