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변명] 질주하는 폭식기관차

by 차안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다. 비난받을까 봐, 동정받을까 봐, 버림받을까 봐. 다양한 이유들로 꽁꽁 숨겨놓은 내 모습을 마주할 땐 마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학창 시절 격주로 조퇴하는 나에게, 친구들이 어디 가냐고 물으면 항상 안과에 간다고 답했다. 사실 정신과에 가는 것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지금도 우울증이 있다고 말하는 게 막 유쾌하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미워 도망 다니기 바빴던 모습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아직까지도 용납되지 않는 내 모습이 있는데, 바로 '폭식하는 나'이다.


폭식은 감정과 한 몸인 것 같다.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 심해지고, 먹고 나면 나면 반드시 부정적인 정서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중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은 유독 강박증이 심했다. 감정도 따라서 요동쳤고, 학교에 있을 수가 없어서 조퇴하고 집으로 갔다.

나는 매운 치킨을 시키고, 음식이 배달되는 30분을 못 참아 맨밥에 김을 싸 먹기 시작했다. 치킨이 도착하고 난 뒤에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방문까지 걸어 잠그고는 허겁지겁 먹어댔다. 텅 빈 집이었는데도 말이다. 한 손에는 치킨을 잡고 한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밥을 떠먹는데, 숟가락질이 잘 안 되니까 급기야 맨손으로 밥을 퍼먹었다. 그야말로 미친 것처럼 음식을 구겨 넣었다. 그렇게 배가 찢어지는 고통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미뤄뒀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몰려왔고, 나는 그렇게 힘 없이 휩쓸려갔다.



폭식증이 정점을 찍었을 때는 혼자 자취를 시작했을 때였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심하게 느끼던 시기라, 우울이나 강박 모두 많이 심했던 시기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을 일으켜 화장실 가는 게 무서워서 울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화장실은 못 가도 주방으로는 향할 수 있었던 이유, 오로지 먹는 시간만이 내가 사라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정신없이 뭘 밀어 넣는 시간 동안은 내가 뭘 했는지조차 희미해서 잠시나마 해방감이 들었다. 그렇게 폭식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내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는지, 기억나는 하루를 적어보면 이렇다.


<11:30>

기상해서 전날 먹고 남은 족발을 꺼낸다. 기름이 고체로 변해 눌어붙어 있지만,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시간을 못 기다릴 것 같아 그냥 삼킨다. 그러면서 배달 어플을 켠다.

<12:00>

꽈배기와 도넛 2~3만 원어치, 약 30개의 빵이 도착한다. 배가 불러 숨을 못 쉬겠다는 생각이 들 때 남은 빵은 5개 남짓, 불편한 속을 붙잡고 웅크린 채 침대에 눕는다. 속은 계속 더부룩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온다.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머지 빵을 해치운다.

<13:30>

배가 조금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자마자 라면 두 개를 끓인다. 익는 시간이 초조해 항상 꼬들꼬들한 라면을 먹게 된다. 순식간에 먹어치우고는 3개를 더 넣는다. 설거지는 사치다. 음식을 입에 넣으면 넣을수록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 같다. 라면을 다 먹고는 도저히 누울 수가 없어서 의자에 앉았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잔뜩 망가진 기분에 심한 우울감과 불안함이 찾아왔다.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커터칼을 가져와 피를 보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바탕 하고 나면 마음이 축 가라앉아 저녁까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위경련이 오거나 토하기도 했고, 잠에 들기도 했고, 계속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아무에게도 기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뚱뚱한 몸으로 폭식증이 있다고 하면 다들 한심한 핑계를 댄다고 여길 것이라 생각했다. 단지 덩치가 있다는 이유로 내가 겪어야 했던 것들이 그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간 것 같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다 어떤 계기로 정신 병동에 입원하게 되면서 겨우 폭주를 멈출 수 있었다. (입원 후 건강하게 잘 챙겨 먹으니 3주 만에 7킬로가 빠졌다.)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폭식증이 있다는 것은 가족들조차 모른다. 그간 남들과 조금 다른 나를 인정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는데,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무언가 두려움이 남아있는 것 같다.


'폭식증은 개뿔, 그냥 안 움직이고 많이 처먹으니까 살찌는 거임'


이건 병이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무지한 누군가의 글 하나에 무너지는 건, 아직 내 모습을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한 탓이겠지. 뒤늦게나마 내 편에 서려고 애쓰지만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아무렇지 않게 폭식증이 있다고, 그렇지만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어떤 모습이든 그게 나라면 항상 사랑해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리고 그 언제에는 결코 오늘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