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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un 14. 2024

14. 황제도 침을 흘린 양자강 고급 요리

때는 지금으로부터 이백 오십 년 전. 여기는 소주 땅에서도 <송서계어松鼠桂魚>를 가장 맛있게 만든다는 유명한 음식점 송학루松鶴樓. (대문 사진 참조) 그 이층 누각 모퉁이의 탁자에 중년의 두 남자가 앉아 있다. 두 사람은 한눈에 보아도 주종主從 관계 같았다.

 


강남땅 요릿집의 때아닌 만세 소리



허리에 쌍검을 찬 흑의黑衣의 사나이. 형형한 눈빛에 툭 튀어나온 관자놀이가 범상치 않은 무공의 소유자임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가 상전은 아닌 것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청의靑衣 소모小帽 복장의 중년 남자. 비록 남루한 복장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 풍겨 나고 있다. 아무래도 그가 주인 같았다. 그런데 흑의의 사나이, 뭔가 염려스러운 표정이다.


“황, 아니 참, 대, 대인 나으리. 가지고 나오신 황금은 아까 탁탁 털어 거지들에게 던져주신 지라 지금은 저희가 거지 신세인 판국이옵니다. 그런데 이 비싼 음식점에 들어오시면 어찌하시려고요.”


“어허, 자네도 참, 걱정도 팔잘세. 아, 차 한 잔 마시겠다는데 무에 그리 비싸겠나? 아니, 근데 저게 뭐지? 다람쥐처럼 생긴 생선 요리일세? 햐, 고것 참 맛있게 생겼군. 으음~ 향기도 아주 죽이는 걸? 여보게, 관關 서방, 종업원 좀 불러보게.”


청의인이 옆의 탁자 위에 놓인 생선 요리를 보며 입맛을 쩝쩝 다시는데, 흑의의 사나이 관서방은 점점 더 난감한 표정이다. 하지만 어찌 감히 지엄한 명을 어기겠는가? 더구나 자기 역시 힐끗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침이 질질 흐르는지라,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즉시 다람쥐 생선을 나르던 종업원을 대령시켜 요리 이름을 물어보니, 아니, 이 녀석 좀 보게? 두 사람의 행색을 아래위로 살피더니 퉁명스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니, 그 유명한 <송서계어>도 모르시오? 하지만 값이 장난이 아니니 장난칠 생각일랑 아예 마시오.”

“하하! 알겠노라. 값은 걱정 말고 어서 가서 맛있게 한 접시 가져와 보거라.”


청의의 중년 남자가 분노를 터뜨리려던 흑의인을 눈빛으로 제지하며 음식을 시켰다. 종업원 녀석은 남루한 복장의 그들이 영 미덥지 못했지만, 흑의인의 무공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지라 하릴없이 투덜대며 내려간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흑의인이 다급히 물었다.


“황, 아니, 대인 나으리, 어쩌시려구요?”

“하하, 걱정 말거라.”


청의인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흑의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황금빛 호박 노리개였다. 흑의인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이다. 다만 이 귀한 패물을 요리 한두 접시와 바꾼다는 게 조금 억울하기는 했지만, <송서계어>인지 뭔지 그 폼 나는 요리를 자기도 한 점 얻어먹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커다란 다람쥐 닮은 생선 튀긴 요리가 나왔다. 이천 이백여 년 전, 전제가 오료에게 바쳤던 바로 그 요리였다.

“허허, 그것 참, 볼수록 신기하구먼. 어쩌면 이렇게 송서松鼠를 빼어 닮게 만들었을꼬? 이야, 보기가 좋으니 맛도 참 기가 막히는구나! 아삭아삭 이 소리가 낙엽에서 도토리 갉아먹는 다람쥐의 그 소리가 아니던가! 절묘하구나, 절묘해! 하하!”


청의인이 연신 혀를 끌끌 차며 탄복에 탄복을 거듭한다.


“아니, 아니, 이럴 게 아니야. 보아하니 이 집에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많이 있는 것 같으니, 내 오늘 안계眼界를 크게 넓혀 보리라!”


본격적으로 음식을 시키는데, 흑의인은 이미 값비싼 호박 노리개가 손에 들어온지라 마음이 든든, 안심하고 주인의 분부대로 계속 이런저런 요리를 시킨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던 종업원 녀석도 그들이 하도 호기 있게 비싼 요리를 마구 시키는지라, 믿는 구석이 있겠지, 안심이 된 듯 군소리 없이 연신 음식을 내왔다.


이윽고 소주 최고의 고급 요릿집 송학루의 나(↗)서우(↓)차이(↘), 절예絶藝 요리들이 총출동! 오색찬란한 모습을 자랑하며 상위에 펼쳐지자, 청의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양자강 요리였다.

나(↗)서우(↓)차이(↘) : 拿手菜[ná  shǒu cài] : 시그니처 요리
나(↗)서우(↓)꺼(→) : 拿手歌[ná  shǒu gē] : 18번 노래
나(↗)서우(↓) : 拿手[ná  shǒu] : ~에 뛰어나다. 장기長技


“아, 아니,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음식들이 있다니! 참으로 놀랍구나! 내, 온갖 부귀를 다 누렸으되, 천하가 넓고도 넓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겠구나! 아하, 그러고 보니 그게 그렇구나! 할아버님이 그래서 그러신 거였구나!”


무릎을 치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훌훌 쩝쩝 침을 흘리며 이것도 한 입, 저것도 한 입, 빠짐없이 골고루 맛을 보는데, 그때마다 쯧쯧 혀를 차며 탄성을 그치지 않고 토해낸다. 참으로 환상적인 예술의 세계였다.


그나저나, 끄윽 잘 먹었다, 견문을 크게 넓힌 청의인과 흑의인, 드디어 마이(↓)딴(→), 계산을 하기 위해 종업원을 불러 값비싼 호박 노리개를 내놓는데, 아니, 이 시러베아들 같은 종업원 녀석 좀 보소? 노리개를 힐끗,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호통을 쳐대는 게 아닌가!


마이(↓)딴(→) : 買單 [mǎi dān] : 계산하다
지에(↗) ㄹ짱(↘) : 結帳[jié zhàng] : 계산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아니, 이것들이 나를 뭘로 알고 사기를 치는 거야! 야, 이 녀석들아, 내가 장사 하루 이틀 하는 줄 아냐? 얘들아!”


큰소리를 치면서 동료들을 부르니 삽시간에 우르르 힘깨나 써 보이는 장정들이 이층 누각 위로 올라와 주위를 에워쌌다. 하기야, 떠꺼머리총각 녀석이 그런 진귀한 패물 노리개를 생전 구경이나 했겠는가! 그런 식으로 흰수작하며 공짜 요리 쳐 먹는 백수들을 어디 한 두 번 보았어야 말이지...


처음부터 두 사람의 행색이 영 미덥지 못했던 종업원 녀석, 무공 깨나 있어 보이는 흑의인이 다소 켕겨 보이는지라 만약에 대비하여 미리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청의인은 태연자약하기만 하다. 어쭈? 쫙, 부채를 펼쳤다가, 탁, 부채를 접었다가, 무엇이 재밌는지 연신 빙글빙글 웃기만 하네? 표정을 보니 난감한 건 흑의인 같았다. 무공으로 말한다면야 저런 촌것들이 어디 한 주먹거리라도 되겠는가! 다만 주인의 얼굴에 똥칠하는 일이 생길까 그게 염려스러울 뿐.


흑의인은 어떻게든 사태를 원만하게 넘기고자 열심히 입을 놀려 노리개의 값어치를 설명해 주었지만, 일단 귀를 닫아버린 종업원은 막무가내다. 점점 소리가 높아지고, 옆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알아서 슬슬 자리를 피한다. 이제는 송학루의 모든 종업원들이 손에 손마다 몽둥이를 들고 모여들었다. 흑의인의 태양혈太陽穴 관자놀이가 불뚝 튀어나온 그 모습에,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임을 느낀 모양이다.


드디어 상황은 일촉즉발, 먹구름이 몰려오고 한 바탕 비바람이 몰아친다. 우르릉 꿍꽝, 이얍! 급기야 우글우글 몰려든 종업원들의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며 내려치는 그 순간!


“멈추어라!”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층 누각 밖으로 소주蘇州 관부官府의 한 대인이 수 십 명의 관병官兵들을 이끌고 황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공짜 음식을 먹는다고 누가 신고를 한 겐가? 그랬다고 언제부터 관청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신속 무쌍하게 달려왔지?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 의아한 눈초리를 던지는데, 아니, 이 관청 사람들 하는 짓 좀 보소? 청의인 앞으로 몰려들더니 황망하고 다급한 표정으로 두 번 옷깃을 탁탁 털고 소매를 떨치더니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머리를 두드리며 절을 하는데, 그 자들이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에 좌중의 모든 사람, 기겁을 하고 놀란다.


()수이(), ()수이(), ()()수이()!


‘완/수이(萬歲)’라니? 그런 호칭을 들을 사람이 당금 천하에 누가 있단 말인가? 만세야萬歲爺, 황제 폐하! 그 한 사람 외에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종업원들은 사색이 되어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청나라는 황제를 알현할 때 두 번 옷깃을 털고 소매를 떨쳐내고 큰절을 하는 독특한 예법을 행했다. 이는 (1) 존경 : 먼지를 털어내어 깨끗한 상태로 알현하겠다. (2) 청렴 : 텅 빈 소매처럼 마음을 비우고 청렴하게 지내겠다. (3) 안전 : 소매 속에 암기를 숨기지 않았다. (4) 충성 :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진솔하게 충성하겠다는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황제도 침을 흘린 양자강 요리     



그렇다. 그는 바로 청淸나라의 고종高宗 황제 애신각라愛新覺羅 홍력弘曆이었다. 아니, 건륭乾隆 황제라고 부르는 게 보다 더 이해가 빠르겠군. 그나저나 북경의 자금성 구중궁궐 안에 있어야 할 황제 폐하가 돌연 강남땅 소주蘇州의 여염 음식점에 나타나다니, 이게 대체 웬 말인가!

( 1 ) 청나라는 고려와 거란이 싸울 때 그 사이에 끼어 있었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여진족은 결국 거란족의 요遼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국 정통 왕조인 송宋나라까지 침략하여 중원을 차지하고 금金나라를 세운다.(1115) 그 후, 몽골족이 흥성할 때는 만주 한 구석에 숨 죽이고 있던 여진족은, 1636년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건국하고 다시금 중국을 침략하여 이번에는 대륙 전체를 장악한다. 중국 역사상 마지막 봉건 왕조였다.

( 2 )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청나라 황실의 성씨姓氏 Aisin Gioro를 중국어로 음역 한 것이다. '애신'은 '황금'이라는 뜻. 소오생의 성인 '김金'에 해당하나 보다.

(좌) 강희 황제 (우) 건륭 황제. 두 황제는 중국 역사상 최장 기간 집권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늙었을 때까지 매년 궁중 화가가 그린 수많은 초상화가 전해 내려온다. 둘 다 상당히 미남형이다.

( 3 ) 청나라를 반석으로 올려놓은 황제는 4대 성조聖祖 현엽玄燁이다. 연호年號는 강희康熙. 재위 기간은 61년(1622~1722)이나 된다. 청나라는 황제 한 명이 하나의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一世一元制), 습관적으로 황제를 연호로 호칭했다. 따라서 '성조'라는 정식 명칭보다 '강희 황제'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강희는 영토를 적극 확장하여 오늘날 중국의 외형을 갖추게 하였으며 한족 문화뿐만 아니라 유럽 문화도 적극 수용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현명하고 인자하며, 정사를 부지런히 돌본 임금이다. 군사적으로도 세계 최강국이었고 경제 규모도 세계 시장의 2/3를 차지했다. 중국 무협소설을 학문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진융(김용, 金庸)의 《녹정기 鹿鼎記》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 4 ) 건륭乾隆은 청나라 6대 황제 고종 홍력(1711~1799)이 61년 간 사용(1736~1796)한 연호다. 건륭은 할아버지 강희 황제를 매우 존경하여 재위 61년이 되자 할아버지 치세 기간보다 더 오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며 아들 가경제에게 양위한 후 물러났다. 태상황으로 실제 치세한 기간까지 합치면 중국 역사상 최장 기간인 64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황제다.


사연인즉슨 이러했다. 청나라는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 처음에는 한족漢族과의 충돌로 나라가 어수선했지만 강희康熙 · 옹정雍正 황제를 거치면서 점차 나라의 기틀이 공고하게 자리 잡혔다. 그리고 건륭 황제!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어언 이십칠 년, 중국은 유사 이래 가장 안정된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에서 말하는 이른바 '강건성세康乾盛世'가 바로 이 시기다.


애신각라 홍력은 궁금한 게 너무도 많은 황제였다. 가만히 구중궁궐에 쳐 박혀 지내는 게 너무너무 싫은 사람이었다. 책도 읽을 만큼 읽었고, 공부도 할 만큼 했고, 나라도 열심히 다스릴 만큼 다스렸다. 이제 그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혀보고 싶었다. 미복으로 갈아입고 민심도 직접 살펴보며 자신이 다스린 치적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궁궐 속에서 어여쁘게 치장하고 자신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는 인형 같은 궁녀들보다는, 들판에서 뛰어노는 싱싱한 여염집의 처녀들과 자유롭게 달콤한 밀어蜜語를 나누고도 싶었다.


그리하여 건륭 황제가 맨 먼저 선택한 곳이 바로 이 강남땅! 이유가 있었다. 과거에 할아버지 강희 황제가 여섯 번이나 미복을 하고 지방에 민정 시찰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목적지가 모두 강남땅이었던 것이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어. 대체 할아버지는 왜 강남땅만민심을 살피러 다니셨던 거지?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어... 


너무나 궁금했던 건륭 황제는 드디어 얼마 전부터 은밀히 강남에 내려와 소주 관아에 묵으면서, 이따금 호위대장 관노서關老西만을 데리고 밖에 나가 여기저기 민심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만 송학루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하는 바람에, 놀란 소주 태수가 황급히 황제를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하하하! 그랬군, 그랬어! 틀림없이 양자강 요리 때문일 거야. 건륭은 너무나 유쾌하고 즐거웠다. 비밀을 알아낸 즐거움! 할아버지 황제께서 오색 영롱한 양자강 요리를 보고 탄성을 지르며 침을 흘리셨을 그때의 그 광경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하하하! 그게 어디 할아버지 얘기인가? 바로 오늘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 생각을 하니 아까 먹은 양자강 요리의 화려한 모습들이 눈앞에 점점 클로즈업이 된다. 꼴까닥, 쩝쩝... 금방 입안에 침이 다시 흥건하게 고여 왔다. 나이 오십에 이제야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낸 것 같았다.


만주족에게는 요리라고 할 만한 음식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산에서 잡은 짐승들을 불에 구워 먹거나 펄펄 끓는 물에 삶아 먹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황제 노릇을 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음식들을 맛볼 수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푹 고아 내거나 찐 음식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언제든지 수라상을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 즉시 상을 올려야 하는지라, 어선방御膳房에서는 미리미리 음식을 준비해두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바다도 없고 변변한 물도 없는 북녘 땅에서 살아있는 싱싱한 물고기로 즉석요리를 한다는 건 더더군다나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사연이 그러하니, 민심 시찰 차 강남땅을 찾았던 강희 황제가 그 휘황찬란한 양자강 요리를 대하고 어찌 눈이 뒤집히지 않았으랴! 실컷 포식을 하고 북경에 돌아간 뒤에도 늘 그 모습이 눈에 선하여 침을 질질 흘리다가, 에라! 더 이상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마다, 음, 아무래도 강남 민심을 한 번 더 살펴야 되겠어. 핑계 대고 식도락 여행을 떠나기를 무려 여섯 번! 그러다가 마침내 먼 훗날, 손자인 홍력에게 그 비밀이 탄로 나고 만 것이다.

청나라 왕휘王翬 등이 3년에 걸쳐 그린 《강희남순도康熙南巡圖》의 제9권의 일부. 전당강을 건너는 장면이다. 《강희남순도康熙南巡圖》는 모두 12권으로 각 권마다 10~20m 길이의 대작이다. 2권과 4권은 프랑스 파리에, 3권과 7권은 미국 뉴욕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하하, 선생님, 너무 재밌어요! 황제도 별 거 아니네요. 우리랑 똑같이 먹을 거 밝히고 말이죠. 아무튼 황제도 침을 흘린 양자강 요리라! 정말 대단하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 뒷얘기는 없나요? 하하, 내가 누구냐? 너의 선생 이야기꾼, 소오생이 아니더냐? 없을 리가 당근 없지!


건륭 황제가 송학루에 다녀간 그 결과, 첫째, <송서계어>가 천하 최고의 유명 요리로 떠올랐다. 황제가 체면도 없지, 글쎄 침을 질질 흘리다가 돈도 없이 시켜 먹었대. 그래? 아니 대체 얼마나 맛있어 보였길래 그랬을까? 하하, 온 천하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도 하지?


둘째, 황제 폐하, 강남땅에 납시었소!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그날 그 즉시로, 그 근방 그 일대의 수많은 관리들과 수많은 부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황제 폐하 알현하며 아부에 방귀를 뀌어대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아부를 했겠는가? 말이 필요 없다. 집집마다 황제를 모셔다가 산해진미를 바치는데, 조금 아까 소오생이 뭐라고 했느냐? 어디 요리사가 제일 뛰어났다고? 그렇다. 부자 집 전속 요리사가 진짜 프로 중의 프로였던 것이다.


그러니 어땠을까? 그림 같은 강남땅의 아름다운 대자연에, 나긋나긋 애교 많고 수양버들 몸매 닮은 서시西施의 후예들이, 좌우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입 속에 양자강 고급 요리 넣어주니, 송학루서 침을 질질 흘리시던 황제 폐하, 여기서는 드디어 눈이 뒤집히셨다는데, 백약이 무효로다 이 일을 어찌할꼬? 할 수 없지, 뭐. 할아버지 강희 황제 본을 받아 강남으로, 강남으로! 전철을 밟아 여섯 번이나 식도락 여행을 나오셨다, 이 얘기다.      




우리는 거지 닭과 <천하제일채>!



엉엉, 선생님, 근데 세상은 참 너무 불공평해요. 누구는 그런 거 먹는데 우리는 이게 뭐예요? 여기까지 와서 <송서계어>는커녕 맨 느끼하고 느글느글한 음식들만 먹자니까 서러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요. 자꾸만 사천에서 먹던 지아/창/차이(家常菜) 생각이 나요. 여기가 정말 황제도 침을 흘린 양자강 요리, 그 동네 맞아요?


하하, 여기는 황제나 부자들의 동네란다. 돈 없는 사람들이 오면 말짱 꽝! 양자강 고급 요리는 그야말로 화중지병畵中之餠, 아니, 그림의 떡도 아니군. 구경이라도 한 번 하면 다행인 셈이지. 하지만 이 녀석아, 아무리 비싸도 그렇지 예까지 왔는데 쌤이 너한테 <송서계어> 한 접시쯤 못 사주겠니? 네 녀석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탓에 송학루에 자리가 다 차버린 걸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예약을 해 놨으니 저녁에는 꼭 한 번 먹어보자꾸나.


그리고 지금 여기서는 <천하제일채天下第一菜>를 먹는 거야. <천하제일채>라뇨?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요리란 말인가요? 에이, 선생님, 장난치시는 거죠? 이런 더러운 음식점에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예끼, 내가 붙인 이름이 아니라 건륭 황제가 인정한 요리란다. 어, 그래요? 헤헤, 그럼 그거 시켜요. 그 스토리도 어서 들려주시구요.




어느 해 겨울이었다. 또다시 강남에 식도락 여행을 나온 건륭 황제는 문득 입맛을 잃었다. <송서계어>고 뭐고, 휘황 찬란 오색영롱한 양자강 요리를 보기만 해도 갑자기 입에서 신물이 났다. 그도 그럴 만하지, 제아무리 좋은 말도 자꾸만 들으면 지겨워지고, 산해진미에 진수성찬이라도 자꾸만 먹으면 물리는 법 아니겠니?


입맛 잃은 건륭 황제, 뭣 좀 색다른 게 없을까 끙끙대다가 불현듯 무예가 뛰어난 심복들 몇 명만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목적지가 따로 있나, 괜히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다가 황량한 들판에서 그만 밤이 되고 말았다.


애고 다리 아파라, 조금 쉬었다 가자꾸나. 어디서 쉴까? 호기심 많은 건륭 황제, 두리번두리번 좌우를 둘러보더니, 음, 저기 커다란 나무가 있군. 평평한 바위들도 있고 앉기에 딱 좋구먼. 저기서 쉬자. (황제의 탁월한 선택!) 근데 강남땅도 겨울이 되니 밤에는 으슬으슬 제법 한기寒氣가 느껴지는걸? 모닥불이라도 한 번 피워볼까? (아~ 황제의 이 놀라운 feeling이여!)


그 즉시 모닥불이 지펴졌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근데 추위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슬슬 속이 출출, 꼬르륵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아니 먹는 걸 생각해서 그런가, 어쩐지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네? 어디선가 꼬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는 것이었다. 여봐라, 이게 무슨 냄새이냐? 어디서 나는 냄새 일꼬?


모두 다들 벌떡 일어났다. 냄새를 찾아라! 수색 작업이 벌어졌다. 강호 최고의 무술 고수들이 코를 벌름벌름 킁킁대며 사방을 수색한다. 허, 거 참 묘한 일이네! 가까이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것 좀 보소? 흩어져서 냄새의 행방을 쫓고 있던 무림의 고수들이 사냥개 같은 묘한 포즈로 황제가 앉아있는 나무 주위로 엉금엉금 모여들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왜들 여기로 몰려드는 게냐? 황상皇上 폐하께 아뢰오. 아무래도 모닥불 밑이 수상하옵니다. 그으래? 그럼 어서 파보거라. 삽시간에 모닥불을 옮기고 그 자리 밑을 파헤치니, 어라, 이게 뭐야, 웬 질그릇들이냐?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동글동글 동그랄 뿐, 아무리 살펴봐도 뚜껑도 없는 커다란 공(球) 모양의 밀봉된 질그릇이 한 개도 아니고 무려 대여섯 개나 쏟아져 나온 것이다.


냄새는 바로 그 안에서 나고 있었다. 어서 깨 보아라! 황제의 재촉에 방금 전 모닥불로 잘 구워진 질그릇을 맨손으로 가볍게 내리치니 바사삭 소리도 경쾌하게 으깨지는데, 아니, 이게 웬 일? 이야! 통닭이다, 통닭! 털을 뽑힌 누드 통닭이 발그스레 익혀진 채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공 하나에 한 마리, 대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니, 한 사람 앞에 한 마리 꼴! 앗, 뜨거, 모두들 후후 입김을 불어대며 진진하게 닭다리를 쭉쭉 찢어 정신없이 먹어대는데, 그 맛이 참으로 꿀맛이었다.


이야, 이거 정말 끝내주는 걸!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네. 햐, 술 한 병만 있으면 조~오겠다! 그나저나 누가 여기다가 통닭을 묻었을까? 황상 폐하께 아뢰오.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아마도 개방丐幇의 무리들 소행일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개방? 거지들 말이냐? 아니, 그럼 이 닭이 거지들이 먹다가 남긴 ‘거지 닭’이란 말이냐? 하하하, 재미있군, 재미있어!

(상) 진융(김용, 金庸)의 무협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천룡팔부天龍八部》에 나오는 개방의 모습. (하) 거지닭 <규화계叫花鷄>. 먼저 연잎으로 쌓아서 진흙을 골고루 발라 땅속에 넣고 은은한 불에 구워 먹는다.


그랬다. 그 닭은 바로 거지들이 먹던 <규화계叫花鷄>였다. ‘규화叫花’는 ‘각설이 · 거지’라는 뜻, ‘叫化’라고도 쓰지. 그러니까 아무튼 ‘거지 닭’이라는 뜻. 강남땅의 거지들은 닭서리를 하면 털만 쏙쏙 뽑아내어 통째로 진흙을 발라서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틈이 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구워 먹었단다. 왜 그런 짓거리를 하냐고?


첫째, 야, 이 거지들아! 늬네들이 닭 잡아먹었지? 이거 왜 이래? 생사람 잡지 말라구! 증거가 어디 있어? 시치미를 떼기 위해서. 둘째, 숨겨놓았다가 먹고 싶을 때 야금야금 꺼내먹으려고.


근데 어떻게 보관해야 오래가지? 각설이들은 오랜 비렁뱅이 경험을 바탕으로, 진흙을 통닭에 발라서 땅 속에 묻어놓으면 오래간다는 사실을 알아낸 거지. 어떻게 오래갈 수 있는 거죠? 생각해 보렴. 공기가 안 통하게 완전 밀봉이 되니까 천연 통조림 아니겠어?


그리고 구울 때도 진흙 채로 구우면 아주 맛있단다. 통고기 구이란 게 원래 열이 골고루 그리고 천천히 퍼져가게 굽는 게 최고로 맛있는 법이지. 요새 밝혀진 사실이지만, 게다가 황토에는 인체의 신진대사에 좋은 에너지 파가 있다니, 이래저래 월매나 맛있겠니?


히히, 우리들도 ‘거지 닭’ 한 번 먹어봐요. 그건 제가 직접 만들어 드릴 게요. 야, 닭서리는 네가 해 와라, 알았지? 하하, 거지들이 먹으면 ‘거지 닭’이지만, 황제가 먹으면 ‘황제 닭’이란다. 근데 신하들도 같이 먹었으니까 그렇게 부를 수는 없고,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부귀계富貴鷄>라고 불렀다나? 그러니까 우리들이 먹으면 <사제계師弟鷄>가 되겠지? 하하하!


근데 말이지, <부귀계>라고 부르는 사람보다는 <규화계>라고 부르는 사람이 훨씬 많단다. 왜죠? 부자가 훨씬 더 좋을 텐데. 간단하지. 그런 말 있잖아, 훔친 사과가 맛있다! 어때, 이해가 가지? 하하하, 너무 재밌어요.


보너스로 하나 더 가르쳐줄까? 삼라만상의 모든 일이 음양의 조화가 잘 맞아야 하듯이, 음식을 먹을 때도 서로 궁합이 잘 맞는 것끼리 먹어야 좋단다. <규화계>를 먹을 때는 소흥주紹興酒와 함께 먹어야 제 격이란다. 아마 건륭 황제도 틀림없이 그날 밤에 소흥주를 마시며 먹었을 거야.


그때 술이 없었다면서요? 음, 건륭 황제가 상당히 똑똑하거든?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 내가 술 생각이 나는데, 거지들이라고 안 나겠어? 틀림없이 술까지 같이 훔쳐서 숨겨놓았을 거야. 음, 어디다 숨겼을까? 나 같으면 어디에 숨겨놓을까?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소흥주를 찾아냈을 것 같은데, 네 생각엔 어떠니?




아무튼 그 이후로 황제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단다. 더럽고 초라한 곳을 찾아가 음식 맛을 보는 희한한 취미였지. 한 번은 느닷없이 가난한 농가農家에 들어가 아이고 배고파라 먹을 것 좀 줄 수 없소? 구걸을 하니(황제 꼴좋다!) 그 모습이 하도 가련하여 아낙네가 부엌을 뒤져보니 있는 거라곤 시금치와 두부뿐, 도수 없이 그 두 가지만 넣어 지지고 볶아서 내오니, 그 맛이 기똥찬지라 <황고채皇姑菜>라 불렀다나?


그게 무슨 뜻인데요? 그 아낙네에게 ‘황고皇姑’, 즉 ‘황제의 고모’라는 호칭을 하사했대. 그래서 붙은 이름이지. 하하, 건륭 황제는 ‘황제의 딸’만 뿌리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황제의 고모’까지 거두면서 다녔네요? 그나저나 선생님, <천하제일채天下第一菜> 얘기는 안 해주세요?

건륭 황제는 드라마 《황제의 딸》로 우리에게도 비교적 친숙하다. 《황제의 딸》은 대만의 인기 여류 작가 총야오瓊耀의 동명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환주공주 還珠格格》의 우리말 이름.
※ '거거(格格; gé gé)'는 '공주'라는 뜻의 만주어.


음, 그러고 보니 그 얘길 하려던 거였군. 건륭 황제가 바람난 암캐처럼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다가 꼬르륵 밥때를 넘겼는데, 마침 아주 더럽고 조그만 판(f)괄(↓), 식당이 보이더란다. 아이고 잘 됐다, 그곳에 들어가서 아무 거나 주시오 하는데, 있는 거라곤 꾸오/빠(→)밖에 없었다나? (그게 뭐지? 어쩐지 수상...)


▶ 飯館 [fàn guǎn] 판(f↘)관(↓) : 식당. 예스러운 느낌의 단어다. 그런데 북경어에서는 단어 마지막을 혀를 말고 끝내는 습관이 있다. 그러니까 '판(f)괄(↓)'로 연습하자.

▶ 현대어로 고급 식당은 찬(→)팅(→)[餐廳, 餐厅; cān tīng], 구내식당 같은 곳은 스(↗)탕(↗)[食堂; shí táng]이라고 한다.

※ 조심!
[飯店, 판(f↘)디엔(↘)]은 식당이 아니라 호텔이다. 호텔은 '지우(↓)디엔(↘)'이라고도 한다.

식당: 飯館 [fànguǎn], 餐厅[cāntīng], 食堂 [shítáng]  

▶ 호텔: 飯店[fàndiàn], 酒店[jiǔdiàn]

   

차마 차가운 그대로 주기는 그렇고(점점 더 수상...), 닥닥 긁어서(아니, 대체 뭐길래...), 한 번 살짝 튀겨설랑 그 위에 물을 붓고, (팍! 소리가 요란!) 뭐 집어넣을 게 없나? 둘러보니 엊저녁에 먹다 남긴, 새우가 헤엄쳐간 닭 국물이 보이네? 에라, 이거라도 넣고 끓이자,(으, 드러!) 보골보골 끓여서 엣쑤, 이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요, 흰소리를 하면서 주는데, 후루룩 후루룩 먹어보니 시장기가 반찬이라, 과연 천하에서 으뜸가는 요리로다! 그래서 그 후로 이 지방에서는 그걸 <천하제일채>라고 부른단다.  


선생님! 대체 꾸오/빠(→)가 뭐예요? 설마 이상한 건 아니겠죠? 하하, 걱정 마렴. 느끼하지도 않고, 너희들도 아주 좋아할 거야. 응, 저기 나오네! 자, 먹자! 어? 이게 뭐야? 누룽지 아냐? 으으~~음! 망했다, 여기까지 와서 누룽지 탕이나 먹다니!

<三鮮鍋巴 sānxiān guōbā>. 해물누룽지탕. 후세에 맛난 해산물을 넣어 고급 요리가 되었다.

▶ 꾸오/빠(→) 【 鍋巴,锅巴;guōbā 】누룽지.
▶【 鍋; guō 】는 '냄비'라는 뜻.  '훠/꾸오【 火鍋; huǒguō 】'는 중국식 샤부샤부

누룽지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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