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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ul 28. 2024

20. 삼국지를 읽으면 꽌시가 열린다

<제3부>  중국 음식과 인간관계 (4)

주선酒仙이 되는 비결, 구름을 올라타고 절정으로 치닫는 최고 고급 편 이야기는 잠시 뜸을 들이고... 지금은 우선 꽌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만(↘)말/라이(↗) 慢慢來~! 아유, 서두르지 마시어요, 천천히 조금씩! 그게 중국식 삶의 패러다임 아니던가! ^^




대만으로 처음 유학 가서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간단한 볼 일이 생겨 교수 님 댁을 찾아갔다. 용무는 금방 끝났다. 바로 돌아가기도 뭣하여 잠시 소파에 앉아 선생님과 함께 TV를 시청하였다. 마침 경극京劇을 방영하고 있었다.


경극이 뭔지 알지? 아, 그거 저두 알아요. 영화 《패왕별희 覇王別姬》에서 장국영이 얼굴에 분칠하고 무대에 올라 연기하던 거죠? 음, 맞긴 맞는데, 너 선생님이 익히라고 했던 '고유명사 표기법'을 제대로 공부 안 했구나? 장국영이 아니라 장궈룽(張國榮)이라고 해야 한단다. 20세기 이후의 중국 인물을 우리말로 표기할 때는 현대 중국어 발음을 존중해 주는 게 원착이라니깐? 음... 이 얘긴 [중국 음식 중국 문화] 매거진을 마무리할 때 정리해서 정확하게 알려주마. 오케이?


패왕별희 覇王別姬 :

패왕覇王은 초楚 패왕 항우項羽. 희姬는 항우의 애첩 우희虞姬. 별別은 이별한다는 뜻. 유명한 고사성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순간. 해하垓下에서 유방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다가 패색이 짙어진 항우는 우희와 마지막 술자리를 가진다. 우희는 노래와 춤으로 항우를 위로하고 마지막 술잔을 바친 후 자결한다. 원작은 리삐화李碧華의 소설. 1993년 천카이거 陳凱歌 감독, 장궈룽張國榮 공리鞏莉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서 같은 해 제4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장궈룽이 여자로 분장하여 우희 역을 맡았다. 여자는 경극 무대에 설 수 없었던 관례에 의한 것이었다. 동성연애를 다루고 중국 현대사의 모순을 풍자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중국 대륙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었다.


아무튼 TV를 조금 들여다보니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이 장판파長板坡에서 조조曹操의 백만 대군 사이를 필기단마匹騎單馬로 헤치면서 아두阿斗를 구하는 장면 아닌가?


그래서 무심코 한 마디 내뱉었지.


"아하~ 싼궈ㄹ쯔!"

“啊~, 三國志!"

"아~, 삼국지구나!”


어라, 그랬더니 갑자기 그 선생님의 눈이 왕방울처럼 휘둥그레지시네?


"아~? 니 전머 ㄹ쯔다오?"

"啊? 你怎麽知道?"

"으응?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경극은 대사를 알아듣기가 매우 어렵다. 일부러 이상하게 목소리를 길게 뽑으며 발음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무슨 말인지 거의 못 알아듣는다. 게다가 얼굴 화장이나 복장도 비슷비슷한지라, 도중에 갑자기 보면 지금 무슨 극의 어떤 내용인지 알아차리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런데 유학 온 지 이제 몇일밖에 되지 않은 외국인 녀석이 불과 2, 30초 TV를 들여다보고는 단번에 그 제목을 정확하게 맞히니, 그 선생님으로서는 정말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나로서는 놀라는 선생님이 더 이상해 보였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삼국지》아닌가!


“선생님, 이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아, 이건 삼국지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 소설 읽어요! 저는 일곱 번 읽었는걸요?”


그랬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삼국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재미있는 대목이 어디인가? 다섯 권짜리 판본이라면 적벽대전 이야기가 나오는 제3권 아니던가? 1권, 2권을 읽으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3권! 왜 기다렸냐구? 그거야 두 말하면 잔소리! 제갈량이 등장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장강長江에 짙게 낀 안개를 이용하여 하루 밤사이에 화살 십 만대를 만드는 그 재주 하며, 칠성단에서 칠일七日 칠야七夜 동안 기도하여 마침내 삼일 동안 동남풍을 빌어 와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그 신출귀몰한 장면들을 수없이 읽고 또 읽지 않았던가!


비록 그 장면만큼 신이 나지는 않았으되, 조자룡이 조조의 백만 대군을 헤치고 아두를 구하는 장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연인燕人 장비張飛가 장판교에 버티고 서 있다가 조조의 두 장수를 호통 소리 한 번으로 낙마시켜 죽이는 장면은 호쾌하기 이루 말할 데 없지 않았던가! 그렇듯 뇌리에 깊게 각인된 장면이니, 나로서는 2, 30초나 보고서야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게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쨌든 그 뒤 스토리를 조금 더 질문하시던 선생님, 점점 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나는 공연히 신바람이 났고!


연인燕人 장비張飛

나는 중학교 때 처음 《삼국지》를 읽으면서 '연인'을 'lover'의 뜻으로 착각했다. 아니, 왕방울 눈에 고슴도치 수염을 가진 험상궂은 장비를 왜 '연인'이라고 하는 거지? ㅋㅋㅋ
'연인燕人'은 '연燕나라 사람'이라는 뜻. '연나라'는 오늘날의 '북경北京'이다.


중국인은 첫 만남 때 상대방에게 점수를 준다고 한다. 그 선생님에게 A+의 ‘인상 점수(印象分)’를 받은 나는 그로부터 각종 혜택을 누리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다른 선생님과 함께 계신 곳에서 나를 보면 언제나 극찬을 해 주셨다. “저 녀석은 실력이 중국 학생이나 똑같애!”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그런데... 이 이야기는 후일담이 더 중요하다. 화교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어를 기막히게 잘하는 어느 여학생이 있었다. 아,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여학생은 그 선생님에게 인상 점수를 형편없이 받은 모양이다.


내 시험 성적이 안 좋으면, “아~, 이번에 실수를 한 모양이구나?” 또는 “어디 아팠니?” 다정하게 말을 건네시던 선생님이길래, 난 모든 학생들에게 다 그러신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학생의 성적이 잘 나오면 선생님은 웬일인지 이상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시는 것이었다. 마치 커닝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 같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편파성(?)이었다.


궁금증은 석사 학위를 마치고 박사반에 진학할 때 비로소 풀렸다. 다시 그 선생님 댁에 놀러 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여학생이 화제로 떠올랐는데, 그 선생님,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그 녀석은 말만 잘했지, 머릿속에 든 건 아무것도 없어! 아니, 삼국지도 안 읽었더라구? 그런 녀석이 무슨 박사반야, 박사반은!”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다. 조심스럽게 여쭤보니 몇 년 전 내가 선생님 댁을 다녀간 얼마 후, 그 여학생이 선생님 댁을 찾아왔단다. 그다음이야 뻔할 뻔 자 아닌가? 내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삼국지를 읽는다고 얼마나 강조해 놓았던가! 감탄한 얼굴의 선생님은 또 얼마나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던가! 그래도 그렇지,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중국인에게는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가, 정말이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첫인상 점수는 대부분 문학적인 소양에서 판가름 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고 《삼국지》 정도는 반드시 읽어두자! 안 읽으면 그 여학생처럼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읽은 사람은 처음 만난 중국인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 기회를 포착하여 능동적으로 《삼국지》의 지식을 써먹어 보시라. 진정한 꽌시가 달려올 것이다.




<대문 사진>

◎ 영화삼국지: 용의 부활 三國之見龍卸甲; Three Kingdoms: Resurrection of the Dragon》의 한 장면. 조자룡 역의 류더화劉德華가 장판파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과 맞서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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