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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ul 30. 2024

21. 전공 아니 세웠는데 몸이 먼저 죽는구나

제갈량과 <출사표>의 족적을 따라

필자는 지난 7월 28일에 '중국 음식과 인간관계'를 거론하면서 <삼국지를 읽으면 꽌시가 열린다>를 올린 바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Another time 자축인묘 작가님께서 댓글에 진수陳壽(233~297; 서진西晉의 역사가)의 정사正史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의 함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과거에 발표했던 글 한 편이 생각나네요. 《現代文學》, 1996, 10. 혼자 배낭 하나 둘러메고 제갈량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며 썼던 기행문이기도 합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의 저자 문제, 그리고 역사 fact와 소설 fiction 사이의 간극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았습니다.  (이하 역사책은 《삼국지》, 소설은 《삼국지연의》로 표기합니다.)


@Another time 자축인묘 작가님께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을 소개하지만, 필자의 주 전공이 아닌지라 치밀하지 못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거의 30년 전 상황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질정을 바랍니다.                                             




《삼국지》의 마지막 무대, 오장원     


세계 4대 고도古都 중의 하나인 서안西安에서는 이제 우리나라 관광객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진시황의 병마용, 그리고 당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얽힌 화청지華淸池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1,700여 년 전 삼국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요 군사가인 제갈량이 죽어간 오장원五丈原이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서안을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 과거에는 주로 한당漢唐 시대의 유적지를 둘러보고자 함이었지만, 이번의 주요 목표는 근 한 달 동안 제갈량의 족적을 따라나선 답사여행의 최후 목적지, 오장원을 찾아 그가 남긴 마지막 한恨의 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함에 있었다. 


그러나 서안 서쪽 120 km 떨어진 기산현岐山縣 그 어드멘가 있다는 오장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며칠간의 수소문과 자료 조사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편을 이용하여 찾아가겠다는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득불 택시를 대절하였지만 관광 도시 서안을 누비는 베테랑 운전기사도 오장원을 찾아 한 시간 이상 차를 이리저리 돌려야 했다.

오장원은 그렇게 고즈넉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삼국지연의》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는 이 역사의 현장에 감도는 뜻밖의 적막감이 일순 당혹스러웠지만, 인파에 시달려 고색古色을 잃어 가는 사시沙市의 형주성荊州城이나 성도成都 무후사武侯祠 등 다른 유적지보다 훨씬 더 시골스러운 그 모습이 역사의 훈향을 더듬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오장원은 150m 높이로 10km에 걸쳐 좁고 길게 누운 황토 고원 이름이다. 가장 좁은 곳의 폭이 다섯 장丈 밖에 안 된다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졌단다. 그 고원의 북단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제갈량이 최후의 기력을 다해 군사를 휘몰고 넘어왔을 해발 3,000m의 진령秦嶺산맥이 아스라이 남쪽에 보였다. 

(상) 오장원과 그 남쪽으로 이어지는 진령산맥. (하) 진령 정상


(상) 오장원의 북쪽으로 흘러가는 위수가 보인다. (하) 오장원의 가장 좁은 곳. 폭이 오장五丈 정도다. 

고원의 좌우는 제법 깊은 황토 골짜기다. 북쪽 탁 트인 벌판 너머로는 그 옛날처럼 위수渭水가 흐르고 있었다. 위魏나라 사마의司馬懿는 그때 저 위수 건너 어디쯤에 진을 치고 있었을까.




뒤바뀐 임금과 신하의 위치     



나는 어느덧 제갈량의 족적을 따라 대륙의 서북부를 거슬러 온 지난 달포 간의 여정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실제로 찾아가 본 그 공간 무대는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지만, 미처 생각지 못했던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은 것이 큰 소득이었다. 중국 4대 기서奇書의 첫 번째로 꼽는 《삼국지연의》의 위력이 생각보다 훨씬 더 엄청나다는 것이 그 첫째요, 중국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역사적 인물은 필경 제갈량일 게라는 느낌이 그 둘째였다. 


덩샤오핑邓小平이 중국의 문호를 개방한 것은 1970년대 말의 일. 중국인들이 관광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이다. 그런데 '삼국지 답사 여행'은 이미 보편화되어 최고의 관광 인기 품목이 되어있었다. 호남성의 북단에 위치한 적벽대전 유적지로부터, 사시의 형주성, 봉절奉節의 백제성白帝城을 거쳐 성도의 무후사에 이르기까지, 나처럼 《삼국지연의》에 심취하여 그 자취를 찾아 나선 나그네는 정말 엄청나게 많았다. 

중앙에 있는 섬의 정상에 보이는 것이 유비가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기고 죽은 백제성白帝城. 장강 삼협댐의 건설로 육지이던 곳이 섬으로 변했다. 우측 협곡이 장강 삼협이 시작되는 기문협. 


그리고는 대만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중국인들과 어울려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었던 칠성단이 저기쯤 일 게라는 둥, 효정猇亭의 전투에서 유비의 군사를 대파하고 기세등등하게 밀려오던 오나라 육손陸遜을 제갈량이 돌무더기 몇 개로 물리친 팔진八陣이 여기쯤 수몰되어 있을게라는 둥, 밤을 새워 격론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한 달 동안 한국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오직 나 혼자였다.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는데...


아무튼 제갈량은 그들의 대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삼국지연의》를 통해 형성된 그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그를 이미 신격화하고 있었다. 하기야 제갈량 없는 《삼국지연의》를 생각해 보라! 속된 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 아니고 무엇일까 보냐. 초등학교 시절 《삼국지연의》를 일곱 번 읽은 내 경우만 하더라도, 그가 오장원에서 죽은 뒤로는 맥이 풀려서 끝까지 제대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삼국지연의》의 저자는 이런 독자들의 심정까지 헤아려 제갈량이 죽은 후 아직도 창창한 삼국 쟁패의 스토리를 속전속결로 끝내고 있음을 보아도, 그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을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중국인에게 물어보아도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적 인물은 분명 제갈량이었다.




제갈량의 자취를 따라 이곳 오장원까지 오는 도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촉蜀나라의 도읍지 성도에 자리 잡은 무후사武侯祠였다. 중국 전역의 무수하게 많은 제갈량을 모신 사당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무후사에서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목도하고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후사는 원래 한漢나라 소열昭烈 황제의 무덤인 혜릉惠陵이었다. 소열 황제가 누구인가? 삼국지의 주인공이자 제갈량의 주군이었던 유비劉備 아니던가. 그러니까 무후사는 원래 장강 삼협 어구의 황량한 백제성에서 죽어간 유비의 시신을 운구하여 모신 곳이다. 그런데 왜 유비의 '혜릉'이라고 하지 않고 제갈량의 '무후사'라고 할까? 


2014년 현재, 무후사는 제갈량을 기리는 무후사와 유비의 무덤인 혜릉, 그리고 유비의 사당인 한소열묘漢昭烈廟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있는 유비의 존재를 모르고, 오로지 제갈량의 사당만 있는 줄로 알고 있다. 


유비의 무덤 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손질하지 않은 듯, 잡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뭔가 소홀하게 대접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실漢室 부흥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간 효웅 유비의 죽음보다는 무덤조차 남아있지 않은 제갈량이 더욱 안타까웠다.  



수의壽衣를 입히지 말고 평복 그대로 묻어라. 

부장품을 묻지 말아라. 묘를 세우지 말고 그냥 정군산定軍山 어귀에 묻어라.



그가 남긴 유언 때문에 한중漢中 땅 굽어보는 정군산 어디쯤엔가 흔적 없이 묻혀 있을 그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하) 섬서성 한중시漢中市 면현勉縣 정군산 어구에 있는 제갈량의 무덤인 무후묘武侯墓. 그러나 그의 진짜 주검을 모신 곳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후주 유선은 제갈량의 사후(234) 29년이나 지난 뒤에야 민의를 받들어 이곳에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을 건축하였다.(263) 그의 54년 생애를 기리는 의미에서 54그루의 측백나무도 심었다. 이곳의 제갈량 무덤은 명나라 정덕 황제 때 만든 것이다.(1513) 



하지만 그 정도의 감상은 늘 있기 마련. 충격과 혼란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유비의 무덤 뒤에는 대전大殿이다. 황제 유비를 중심으로 만조백관이 도열해 있는 모습을 밀랍상으로 만들어놓았다. 신하들이 그 직책에 따라 크고 작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결의형제였던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여타 문무 대신들의 신상神像보다 훨씬 더 큰 모습으로 소열황제 유비를 좌우에서 모시고 있다. 


어라? 근데 제갈량은 어디 갔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제갈량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의혹은 곧이어 충격과 혼란으로 이어졌다. 대전을 나가서 그 뒤로 돌아가보니 또 다른 전각이 나타난다. 거기에 제갈량이 있었다. 유비의 밀랍상보다 거의 두 배 크기의 모습으로 학우선을 부치면서 의연히 앉아 있는 제갈량의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유비는 황제였지만 제갈량은 옥황상제 같았다. 


이럴 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비를 이곳에 묻고 난 뒤 약 300년 후, 그들의 돈독했던 군신君臣 관계를 널리 알리고자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를 여기에 함께 두었다는 후인들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 '소열황릉'이 아니고 '무후사'란 말인가? 어떻게 신하인 제갈량의 신상이 그의 주군主君 유비의 그것보다 더 클 수 있단 말일까? 《삼국지연의》를 통해 신격화된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소설 《삼국지》는 그 후로도 천년 세월이 흐른 뒤에 민중 사이에 유행되던 구전 문학을 나관중羅貫中을 비롯한 이야기꾼들이 문자화시켜놓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흔히 《삼국지연의》의 저자가 명나라 때의 나관중이라고 알고 있다. 잘못이다. 

당나라 말부터 중국의 민중 사이에는 '귀로 듣는 소설'이 유행한다. 처음에는 승려들이 포교를 위해 저자 거리에서 재미있는 부처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전문 이야기꾼들이 재미있는 역사 스토리를 민중에게 들려주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삼국지는 이미 송나라 때부터 민중 사이에 크게 환영받던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야기꾼들에게도 글로 쓰여진 대본이 필요할 게 아닌가. 대본의 스토리는 민중의 호응을 반영하여 점차 수정되어 갔다. 민중들이 좋아하는 스토리여야만 돈벌이가 잘 되기 때문이다. 

명나라 때가 되자 수많은 대본이 탄생했다. 나관중은 그중 제일 환영받은 대본을 편찬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읽는 《삼국지연의》의 큰 얼개는 청나라 때 모종강毛宗岡 판본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삼국지연의》의 저자를 엄격하게 따진다면, 천 년 중국 역사 속의 수많은 민중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삼국지연의》속의 신격화된 제갈량 이미지는 백성을 지극히 위했던 참된 정치가를 사랑하는 중국 민중들이 공동으로 창조해 낸 것이라고 해야 타당할 것이다. 

한편 '연의 演義'란 장회章回 소설로 쓰여진 역사소설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역사 연속극'이라는 이야기. 저자거리에서 한참 재미있을 때 이야기를 스톱하고, 궁금하면 돈 가지고 내일 또 오세요. 하는 식이다.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 민중들을 문학과 문화의 세계로 인도한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여기에 노래와 동작을 가미하여 경극과 같은 종합예술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금과 신하의 위치가 뒤바뀐 수수께끼! 이 엄청난 의혹 앞에서 어찌 당혹스럽지 않을까? 답답한 마음에 무후사의 관리인을 비롯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그들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 글쎄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제갈량쯤 되는 인물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식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이 문제를 홀로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 제갈량의 실체     



《삼국지연의》속에서 신격화된 제갈량이 아닌, 실존 인물 제갈량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숙소로 돌아간 나는 진수의 《삼국지》와 몇 권의 역사책을 쌓아놓고 읽다가 생각하고 생각하다 읽으면서 점점 더 충격에 빠졌다. 이게 뭐지? 그럼 그게 다 사실이 아니었다고? fiction을 fact로 알고 있었던 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 첫째는 유비와의 관계였다. 유비와 제갈량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군신 관계로 칭송받는 사이 아니었던가! 그 첫 번째 증거로는 물론 유비의 '삼고초려 三顧草廬'를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유비와 제갈량이 '물과 물고기의 관계 水魚之交'였다고 단정하기가 힘들었다. 


당시에는 조조와 손권 등, 모든 군주 된 자는 천하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재를 구하려 애썼다. 손권의 형인 손책孫策이 현인 장굉張紘을 모시기 위해 몇 차례나 그의 집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간청한 일도 있었으니, '삼고초려'만 가지고 두 사람의 관계를 단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사正史의 기록에 의하면, 적벽대전이 끝난 후 유비의 신임은 오히려 봉추鳳雛 방통龐統에게 있었던 듯싶다. 당시 제갈량과 방통의 직책은 모두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 그러나 방통은 유비와 함께 공안公安 땅에서 모사 역할을 담당했던 것에 반해, 제갈량은 멀리 떨어진 영릉零陵 일대에서 세금이나 걷으며 군수軍需 조달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촉나라 익주(益州; 오늘날의 사천성)를 정벌하러 가면서도 유비는 제갈량 대신 방통을 군사로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게 역사의 팩트다. 


미심쩍은 곳은 또 있다. 결의형제 관우가 동오東吳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유비는 국력을 기울여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그때 유비는 왜 제갈량을 군사軍師로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감정적으로 오나라 정벌에 나서는 유비를 제갈량은 왜 말리지 못했을까? 역사의 기록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유비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한 내용을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오호통재라! 법정法正이 살아 있었다면 당초에 주공을 말릴 수 있었을 터인데!”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제갈량은 아직도 국가의 중대 문제를 결정하는 위치에 올라있지 못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닌가? 유비는 제갈량을 그다지 신임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 아닌가? 유비가 백제성에서 죽어가며 어린 자식 유선劉禪을 제갈량에게 맡긴 것도 그러하다. 


“만약 이 아이의 그릇이 모자라다면 그대가 대신 이 나라를 맡아주오.”


실로 엄청난 말이다. 《삼국지연의》는 이 발언을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극진한 신임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럴 리는 없다. 오히려 충성심을 유도한 유비의 고단수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기면서도 이엄李嚴을 상서령尙書令으로 임명하고 군사 지휘권을 넘겼다. 이것은 제갈량과 이엄이 상호 견제하여 어린 아들 유선의 권력을 위협하지 못하게 한 유비의 또 다른 고단수 인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비가 죽고 난 후, 후주後主 유선은 정말 제갈량을 아비처럼 믿고 따랐을까? 유감스럽게도 역사의 기록은 이 또한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유선이 보좌에 올랐을 때는 아직 애송이 티를 못 면한 열일곱의 나이였다. 그 후 점차 나이가 들며 그는 제갈량에게 일부 맡겨 놓았던 권력을 되찾아 절대 황권을 누리고 싶어 했음이 기록의 곳곳에 엿보인다. 


제갈량의 휘하에 있는 승상부丞相府는 늘 궁중 인사들에게 시빗거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위나라를 토벌하러 나선 제갈량의 여섯 번 원정 중에서 후주의 의심 때문에 부득불 회군한 것이 두 번이나 되었다. 결론적으로 제갈량은 유비에게는 그다지 신임을 얻지 못했고, 유선에게는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던 처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비는 왜 제갈량을 신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신임하지도 않는 제갈량에게 모든 후사를 맡겼을까? 제갈량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역사가 진수陳壽는 《삼국지 제갈량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제갈량은 매년 위魏나라를 정벌하러 나섰으나 아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장수로서의 지략이나 임기응변의 재주에 있어서는 뛰어난 편이 못 된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三國志 · 諸葛亮傳》: “(諸葛亮) 連年動衆, 未能成功, 蓋應變將略, 非其所長歟!”



아니, 뭐라고? 제갈량이 지략이 뛰어나지 못하다고? 진수란 친구, 이거 문제가 있는 거 아냐? 진수의 아버지는 제갈량에 의해 처벌받아 사형을 당한 진식陳式이다. 그러니까 진수에게 제갈량은 아비를 죽인 불공대천의 원수 아니겠는가? 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후세의 논자들은 진수의 이 말에 근거하여 제갈량이 뛰어난 군사 지략가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적벽대전 당시 신출귀몰한 지략을 과시하던 제갈량의 모습은 전부 뻥이란 말인가? 의심하던 나 역시 역사서를 읽으며 생각을 거듭할수록 점점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제갈량은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것처럼 신기묘산神機妙算의 지략가가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유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유비는 그런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겼을까? 위나라를 토벌하러 군사를 일으키면서 후주 유선에게 바친 <출사표>에서 제갈량은 이렇게 고백한다. 



선제께서는 소신이 근면하고 신중하다는 점을 알아주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겨주셨나이다. 

“先帝知臣謹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 <출사표>


영명하신 선제께서는 일찍이 소신小臣의 재주를 헤아리시며, 이미 미약한 소신의 재주로는 강대한 저 도적들을 토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셨나이다. 하오나 도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왕업王業도 멸망하고 말 터이니,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도적을 토벌하러 나서야 되지 않겠나이까? 그러므로 소신에게 그 일을 맡겨주신 것이 틀림없나이다.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故知臣伐賊, 才弱敵彊也;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故託臣而弗疑也。" <후출사표後出師表>



요컨대 유비가 자신에게 대사를 맡긴 것은 지략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재주는 모자라지만 매사에 신중하고 근면한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실제로 매우 정확했다. 우선 그는 지나칠 정도로 매사에 신중하였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어보아도 그는 필승의 자신이 없으면 결코 싸우지 아니하였다. 위나라를 정벌할 때 진령산맥을 타고 자오곡子午谷으로 빠져 장안(長安; 오늘날의 서안)을 급습하자는 위연魏延의 계교를 그는 끝내 채택하지 않았다. 실패할 경우 받는 타격이 너무 크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신중하다는 점을 제갈량의 단점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매우 근면하고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공명정대했고 사리사욕이란 추호도 없었던 훌륭한 정치가였음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진수가 아버지를 죽인 제갈량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읽어보자. 

   


제갈량은 나라의 승상으로서 백성을 따뜻이 어루만지며 예의와 규범을 보여 주었다. 언제나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하여 공정무사公正無私함이 무엇인가 알려 주었다.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비록 자기가 미워하는 자일 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고 태만히 하는 자에게는 비록 자기와 친하다 해도 반드시 벌을 내렸다. … 중략 … 모든 일에 사물의 근본 이치를 헤아려 최선을 다했다. … 중략 … 마침내 온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게 되었다. 형벌이 비록 엄해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그가 공명정대하게 마음을 쓰고 권선勸善에 그 목적이 있음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로 다스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뛰어난 인재로서, 가히 관중과 소하蕭何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라 하겠다.

진수, 《삼국지 · 제갈량전》마지막 부분의 評語: “諸葛亮之爲相國也, 撫百姓, 示儀軌, 約官職, 從權制, 開誠心, 布公道; 盡忠益時者, 雖讎必賞; 犯法怠慢者, 雖親必罰。 …… 庶事精練, 物理其本。 …… 終於邦域之內, 咸畏而愛之, 刑政雖峻而無怨者, 以其用心平而勸戒明也。 可謂識治之良才, 管、蕭之亞匹矣!”


  

정말 감탄스럽지 않은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이런 평을 한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자기가 죽인 사람의 아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라니! 이런 인물을 그 어떤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훗날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위로는 후주 유선으로부터 아래로는 여염집의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목을 놓아 통곡하지 않은 이 없다 하니, 임금에게는 그 충성이 아쉬웠고 백성에게는 그 공명정대함 뒤에 숨어 있는 따사로운 사랑이 못내 그리웠을 것이다. 또 다른 기록을 보자.



촉나라의 백성들은 제갈량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골목마다 그의 위패를 걸어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 그에 의해 정복당한 남만 땅의 만족蠻族들까지도 황량한 들판에서나마 그를 추모하는 제사를 올렸다.

진수, 《삼국지․제갈량전》



또 그의 사후 오백 년이 지난 당나라에 이르러서도 백성들은 제갈량이 남긴 뜻을 칭송하며 곳곳마다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도처에 엿보인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그의 사당은 사천성과 운남성에만 백여 개가 넘어 전국적으로는 얼마나 많은지 통계조차 뽑을 수 없다니, 아마도 제갈량은 중국의 역대 인물 중 가장 많은 사당을 지닌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 두보杜甫는 제갈량이 역대 군주와 지식인, 그리고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이유를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승상丞相의 사당은 어드메 있는가?              

금관성錦官城 밖 빽빽한 측백나무.              

계단의 푸른 풀에 춘색은 절로 완연하고,          

무성한 나뭇잎의 꾀꼬리 하릴없이 우짖는다.

蜀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 

映階碧草自春色, 隔葉黃鸝空好音。

 

세 번씩이나 초려草廬를 찾아주니,              

하나씩 하나씩 천하대계 의논하네.                

이대二代에 걸친 진충보국盡忠報國은,

늙은 신하의 일편단심일레라.                     

전공 아니 세웠는데 몸이 먼저 죽는구나!

후세의 영웅들 소매 적시는 피눈물…     

三顧頻煩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

- 두보, <촉상蜀相>


제갈량의 사당을 찾아와 사색에 잠긴 두보는 필경 제갈량이 남긴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게 틀림없다. 



“죽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鞠躬盡瘁, 死而後已.” 

<후출사표>에서 인용. 이 글은 후세의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만, 최소한 이 구절이 제갈량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는 가을바람 스산한 오장원 벌판에 떨어지는 별을 보며 피를 토하고 쓰러졌던 제갈량을 대신하여 외쳤을 게다. “전공 아니 세웠는데 몸이 먼저 죽는구나!”


제갈량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뛰어난 전략가는 아니었다. 단지 일편단심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매사에 최선을 다한 참된 정치가인 제갈량을 아끼고 사랑하는 수많은 민중들이, 그 아쉬운 심정을 달래기 위해 신비한 색채로 덧칠하여 그들의 영원한 영웅을 탄생시킨 것이라 하겠다. 




전공 아니 세웠는데 몸이 먼저 죽는구나



오장원 벌판에 그때처럼 바람이 불어왔다. 가을도 아닌데 바람이 스산했다. 해도 지지 않았건만 떨어지는 별똥별의 흐름이 눈에 선했다. 아아, 그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곳이 저기쯤이나 될까? 나는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다가 이윽고 허리춤에 끼고 온 책을 펼쳐 다시 한번 <출사표>를 음미해 보기 시작했다.    

 


신臣, 제갈량 삼가 아뢰옵나이다. 선제先帝께서는 일찍이 한실 부흥의 대업을 일으키셨으나 불행히도 그 중도에 붕어하시고 말았나이다. 이제 천하는 삼분되어 있으나 저희 익주益州의 세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으니, 진실로 국가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걸린 시기이나이다.     

臣亮言: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그는 촉나라의 국력이 가장 미약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력이 열 배나 강한 위나라를 정벌하러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그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불가능한 일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끝까지 다하기 위해 나선 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출사표>는 유가儒家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글, 유언장이나 다름없는 글이었다. 후세 모든 동방 세계의 지성인들이 이 글을 읽고 숙연한 마음으로 선비 된 도리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긴 이유였다. 



안에서 폐하를 모시는 시위侍衛들이 태만하지 않고, 밖에서 충성스러운 선비들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선제께 입은 각별한 은총을 폐하에게 갚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하오니 폐하께서도 언로言路를 넓히셔서 선제의 유덕遺德을 빛내시고 뜻있는 선비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심이 당연하며, 스스로를 비하하시거나 잘못된 예를 들어 충간忠諫의 길을 막으셔서는 아니 된다 생각하나이다.   

然侍衛之臣不懈於內, 忠志之士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익주 땅에 안주하여 현실에 만족하고자 하는 소심한 유선을 간곡히 타이르는 제갈량의 답답한 심정이 느껴져 가슴이 아려왔다.



궁중이나 승상부는 사실 한 몸이니, 죄를 벌하고 선행을 포상함에 있어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자신의 충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늘 승상부를 견제하는 어리석은 임금 유선을 다시 한번 달래는 제갈량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싶다.


제갈량은 뒤이어 곽유지郭攸之 · 동윤董允 · 향총向寵 등을 추천하며, 자신이 없을 때 유선이 이들과 상의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자기 사람을 추천한다는 유선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들이 선제 유비가 그 능력을 인정하고 아꼈던 사람임을 조심스럽게 강조하는 그 노력이 눈물겹다. 그 후, 제갈량은 담담히 지난 세월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이 글의 핵심 부분이 전개되는 것이다.     



신은 본래 포의 한사布衣寒士로서 남양 땅에서 농사나 지으며 구차하게나마 난세에 목숨을 보전하려 했을 뿐, 제후들을 찾아 명예나 지위를 얻고자 하지는 않았나이다. 그러나 선제께서는 신을 미천하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황공하옵게도 몸을 낮추어 세 번씩이나 신의 초막을 찾으시어 당금 천하의 일에 대해 자문해 주셨나이다. 이에 감격한 신은 마침내 선제를 위하여 둔마의 노력을 다 할 것을 맹세했나이다.  그 후 패배하여 퇴각하는 위난危難의 군중軍中에서 명을 받아 임무를 떠받기 시작한 지 어언 이십일 년이 되었나이다.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爾來二十有一年矣。


     

삼고초려를 받아 유비를 따라나선 지 21년! 그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는 그 목소리는 온갖 감회에 젖어 떨리고 있을 터였다. 나지막하게 이 부분을 읽는 나의 목소리에도 그 감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선제께서는 신이 근면하고 신중하다는 점을 알아주시어, 붕어하실 때 한실 부흥의 큰일을 맡기셨나이다. 그 명을 받은 이래로, 행여 맡겨주신 그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여 선제의 선견지명에 누를 끼치게 되지나 않을까 자나 깨나 염려하였습니다. 무더운 오월의 염천을 무릅쓰고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의 남만 땅 깊숙이까지 정벌하러 나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나이다.

先帝知臣謹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夙夜憂嘆,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선비는 자신을 인정해 준 사람을 위해 죽는다던가! 마침내 자신을 인정해 준 유비를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제갈량의 모습이, 마치 옆에서 어제의 일을 지켜본 양 눈에 선연하였다. 문장은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비장해지고 있다.



이제 남방이 평정되고 군사와 무기도 충분하니, 마땅히 삼군을 통솔하여 중원을 평정하러 나서야 할 것이나이다. 바라옵건대 간신을 제거하고 한실을 부흥시켜 옛 도읍지로 환도할 수 있도록 둔마의 미력이나마 다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선제에게 보답하고 폐하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 신의 직책이나이다.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於舊都!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

…중략…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신에게 도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 이 임무를 맡겨주소서! 성공하지 못하면 신의 죄를 다스리어 선제의 신령께 고하여 주소서!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 중략 … 


폐하께서도 스스로를 돌보시어 선행에 힘쓰시고, 올바른 간언에 귀를 기울여 주시며, 선제께서 남기신 유지를 깊이 헤아려 주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격하여 마지않겠나이다. 이제 먼 길을 떠남에 앞서 이 글을 올리게 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또 무슨 말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零, 不知所言。   


  

한실 부흥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선제 유비의 신령 앞에 자신의 죄를 다스려 고하여 달라니! 죽음을 각오한 제갈량의 비장함이 그대로 엿보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자신도 앞서 고백한 바 있거니와, 이 정벌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상기해 보면, 이 글은 사실 유언장과 다름없음을 눈치챌 수 있지 않은가! 


죽음을 각오한 그 목소리가 어찌 떨리지 않았을까! 가슴으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인간 제갈량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는 <출사표>. 이제야 그 글자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제갈량의 피눈물이 조금씩 나의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장원을 내려서며 나는 다시 한번 두보의 시 구절을 나지막하게 외워 보았다.


 전공 아니 세웠는데 몸이 먼저 죽는구나!

 후세의 영웅들 소매 적시는 피눈물…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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