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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y 22. 2023

우리 '문학'은 초콜릿

1. 文學으로 literature 톺아보기



"문학이 뭐라고 생각하죠? 그렇게 질문했더니, 글쎄 그러잖아요. 문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순간 전율이 일어났어요. 하루 종일 그 말을 되뇌었답니다. 저는 문학을 수십 년 가르친다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었거든요."



언젠가 출근길에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를 켰더니, 유명 대학 영문과 여교수님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대학 면접시험 때 한 수험생에게 "문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질문을 던졌더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답변이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단다.


나는 더 깜짝 놀랐다. 아니, 그 학생이 그걸 어떻게 알았다지? 그건 바로 공자孔子의 문학관이었다. 그래서 내가 중국문학을 가르칠 때 늘 맨 먼저 했던 말이었다. "문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 말을 하고 나서 나는 학생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공자가 그러했듯이. 


물론 공자가 명쾌하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실제로 초콜릿을 나눠준 적은 더구나 없다. 그러나 공자는 분명히 그런 생각으로 달콤하게 문학을 가르치고 장려했다. 그의 이상 세계는 대동사회大同社會. 요새 말로 한다면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공자는 먼저 ‘정치 행위’로 그런 세상을 이 땅 위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군주를 끝내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채택한 방법이 바로 ‘문학' 그리고 '교육’이었다. ‘문학’이 지니고 있는 초콜릿 기능을 활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교화시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문학'에는 함정이 있다.

'literature'의 함정이다.


일제는 'literature'를 '문학'이라고 번역했다. 우리가 지금 가르치고 배우는 바로 그 '문학'이다. 그건 우리의 것이 아니다. 분리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한 '서양학'의 '문학'이다. 앞서 말했듯이 분리 패러다임의 '서양학'은 매사에 논리와 분석을 위주로 한다. 대부분 학생들이 '문학'이 딱딱하고 재미없다며 싫어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동아시아에는 '문학'이 없었을까? 천만의 말씀! 아주 오래전부터 '문학'이라는 단어도 있었고 그 실체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천 년이 넘게 우리 동아시아 지성인들의 영혼과 정신을 싱그러운 세계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 바로 우리의 '문학'이었다.


'문학'이라는 말은 『논어論語 · 선진先進』에 최초로 등장한다. 공자가 제자들을 품평하면서 사용한 단어다.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는 '문학'에 뛰어나구나!" 칭찬해 준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부터 '문학'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동아시아의 문학'은 공자로부터 출발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의 문학'은 'literature의 문학'과 큰 차이가 있다. '우리 문학'은 달콤한 초콜릿 같다. 딱딱한 논리와 분석을 기초로 하는 'literature'와는 방법론에 있어서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일본 학자는 대충 겉모습만 보고 'literature'를 '문학'이라고 졸속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학'의 그런 '내막'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literature의 문학'이 이미 '우리 문학'을 완전히 쫓아내고 우리나라 '문학의 집' 전체를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은 아예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무척 구차하다. 매번 'literature의 문학'이니 '우리의 문학'이니 구분하느라 표기하기가 너무 힘들다. 어떻게 표기해야 독자들이 혼동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 하지만 단지 언어의 혼돈 정도라면 까짓 거 무슨 대수겠는가. 문제는 'literature의 문학'에 함정이 숨어있다는 사실이다. 이 '서양의 문학'에는 관념적인 언어의 유희가 많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나약한 감상 부스러기가 숨어 있다. 허망함, 공허함, 황량함... 삶의 가치와 의미가 엿보이지 않는 그 데카당스한 언어들!


나는 그것이 'literature의 문학'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나약한 정신과 패배주의를 심어주려 했던 일제의 술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OECD국가 자살률 1위라는 현실을 생각해 보시라. 아직도 일본을 숭상하는 친일파가 떵떵거리며 득세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시라. 하루빨리 우리 전통의 문학 정신을 복원하여 그 '거짓 문학'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부터 그 엑소더스의 방법인 '우리의 문학'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것이 왜 초콜릿이라는 것인지, 'literature'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지,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리고 마무리로 구체적인 작품 사례를 통해 그 차이를 느껴보고 공감할 수 있는 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런 이야기는 추상적인 언어만으로는 체감이 잘 안 되는 법이므로.




[ 표제 사진 ]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 공묘孔廟 소장, 명나라 때의 무명 화가가 그린 공자 상.

    짱구에 뻐드렁니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덕망 있는 모습이 돋보인다. 공자는 얼굴마저도 초콜릿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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