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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y 22. 2023

남해 금산 - 졸업생의 편지

1. 文學으로 literature 톺아보기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어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에 사랑에 값할 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 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 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 테지요.

오, 나의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다시 한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1986) 후면 표지의 글



오래전 일이다. 한참 전에 졸업한 어느 여학생이 문득 내 홈페이지를 찾아와 게시판에 편지를 올렸다.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가득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지구를 떠날 것만 같은 어조...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 편지에서 「남해 금산」이라며 인용했던 글이 바로 위의 작품이다. 그나저나, 뭐지, 이 허무주의는? 그 친구 가슴속의 허망함과 황량함이 바로 이 글 때문인 것 같았다. 냉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렸다. 살펴보니 「남해 금산」은 시집 속의 다른 작품 이름이었고, 이 글은 그냥 시집 후면 표지에 실린 글이었다.


이 글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뒷면 표지에는 보통 책의 본문 내용 중에서 독자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을 발췌해서 싣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글은 책 안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작가의 그 어떤 설명도 없고, 평론가의 그 어떤 해설에도 언급이 없다.(못 찾은 것일 수 있다) 게다가 제목도 없다. 시인지 산문인지조차 헷갈린다. 시집 전체에 대한 작가의 의미심장한 해설인가, 아니면 독자에게 바치는 작가의 편지인가? 대체 뭐지??


『남해 금산』에 수록된 시는 난해하다. 납득하기 힘든 정황 묘사가 나오는가 하면, 설명되지 않는 절규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김현, 『남해 금산』해설 「치욕의 시적 변용」) 시집의 발간 시점으로 미루어, 혹시  5.18의 비극을 숨죽여 노래한 것 아닌가, 나름대로 추측하며 감상하니 그제야 공감이 간다. 모성母性을 모티프로 노래한 작품도 좋았다. 현대 한국 시단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작가 중의 하나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작품의 질적 수준을 떠나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 시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뭘까? 나에게는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아니었다. 위의 표지 글이었다. 나만 그런 걸까. 그 졸업생 친구도 그런 것 같았다. 다른 일반 독자도 그럴 것 같다. 왜? 두 가지 이유를 꼽아보겠다.


첫째, 이 글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다. '연애'는 인류의 최대 관심사 아니던가. 작가의 다른 의도가 숨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다른 시와 달리 그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닐 거라고? 하지만 느끼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둘째, 작가가 구사하는 저 ‘순수한 언어'의 현란한 재주넘기를 보시라! 눈이 부시다. 그래서 화가 난다. 독자들이 그 눈부신 글재주에 현혹되어 '사랑'이란 게 그런 것인 줄로만 알게 될까 봐.


.........................................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간절히 원하지요.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당신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어요.

나는 “당신의 사랑에 값할 만큼 미더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 지를.”

나는 오직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     


그렇게 내뱉듯 고백(?)하고 도망가 버리는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그렇게 바들바들 ‘몸부림’ 치다가 그렇게 쫓기듯 떠나가 버리고 나면... 그래서, 그 떠나간 삶에서 얻는 것이 대체 무엇일지 궁금하다. 허망함, 공허함, 황량함... 그 외에 무엇이 남을까? 그런 것이 과연 '사랑'이요, '문학'일까? 이성복 님처럼 훌륭한 시인에게 개인적으로 대단히 죄송하고 외람된 말이지만, 나는 화가 난다. 무슨 유감이 있어서 그분을 비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있다면 일제 때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literature' 문단의 분위기일 터! 종잡을 수 없는 현학적인 단어의 나열, 딱딱하기 그지없는 평론... 독자는 머리가 어질어질, 자신의 무지가 탄로 날까 두려워 짐짓 감탄으로 두리뭉실 얼른얼른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면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그리운 내 님이여, 어데로 갔나..." 따위의 나약한 감상주의 분위기다. 청춘 남녀들은 그 현란한 언어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서, 그런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 알고 헬렐레 찬사를 보내기 일쑤다. 그렇게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완약婉弱한 감상 부스러기는 결단코 참된 '사랑'이 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사건이 있다. 서양학의 'literature'가 '신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막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어느 대학에서 어느 문학청년이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청년이 남긴 유작이 있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런 구절이 도처에 쓰여 있었다고 한다. (김세환, 『끝나지 않은 식민지 학문 100년』참고.) 그럴 것이다. 그 마음에 어찌 가식이 있겠는가. 진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한다는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 것이,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그것이 과연 '문학'일까?


사랑의 의무? 사랑의 소실? 사랑의 습관? 사랑의 모독? 어리석은 나는 그렇게 어려운 단어를 들을 때마다 머리가 핑핑 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린다”면서, 대체 무엇이 사랑의 의무이고, 소실이고, 습관이고, 모독이길래 ‘떠나감’으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겠다는 것인가! 그런 건 ‘너’와 ‘나’를 따지고 나누는 이분법적인 생각의 틀에서 비롯된 허망한 금 긋기요, 자존심의 가면을 쓴 나약한 패배주의자의 변명에 불과한 것 아닐까? '사랑'은, 그리고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까닭 모를 나의 안타까움, 심지어 때때로 일어나는 노여움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약하고 무책임한 감상, 그리고 관념적인 언어의 유희! 이것 역시 식민지 학문, 동양학의 잔재다. 거짓 문학의 함정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문학 풍토는 아직도 그 심각한 후유증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문학 풍토는 현실 사회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아리따운 국민 배우, 최진실 씨...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길래 사랑하는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로 떠나갔을까. 그게 '문학'과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바로 이분법적 분리의 패러다임이다. '문학'은 시대의 불빛이요, 영혼의 소리 아닌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 그래서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 아니던가. 툭하면 터져 나오는 '극단적 선택'에 관한 뉴스들, 잘못된 문학/문화/사회적 풍토가 빚어낸 비극이다.


문학과 인생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소년 소녀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영향을 받아 우울증과 패배주의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갉아먹었을까. 혹시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나 자신도 그러했다. 이성복 님이 말한 것처럼 몸부림이나 치다가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너무나 많았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결단코 '문학'이 아니다. 참된 '문학'이란 참된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문학'이요, 어떤 것이 '사랑'의 이야기일까? 중국 당나라 때의 시성詩聖 두보杜甫(712~770)가 생각난다.



나그네 길 신안 땅에 들어서니 떠들썩 점호하는 소리.   신안 관리에게 물어보았다.

작은 고을인데 장정이 남아 있수?”

엊저녁 징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지라 애들이라두 뽑고 있수다.”

키도 쬐그만 애들이 왕성(王城)을 어찌 지킬꼬…’


客行新安道,喧呼聞點兵。      

問新安吏小更無丁

帖昨夜下,次選中男行”   

男絕短小,何以守王城 


그나마 살집이 붙어있는 아이는 어미라도 있어 배웅하고 있었지만,

삐쩍 마른 아이 녀석은 홀로 가련하게 끌려가고 있었다.

저무는 강물은 하얗게, 하얗게 동으로 흘러가는데, 푸른 산은 통곡소리를 내는 듯싶었다.

그렇게 눈물이 마를 정도로 울지는 말려무나. 뼈아프게 통곡해 봤자 이 세상은 끝내 무정한 법이란다...


男有母送,瘦男獨伶俜。

水暮東流,青山猶哭聲。  

“莫自使眼枯,收汝淚縱橫。

枯即見骨,天地終無情 


두보,「 신안 땅의 관리(新安吏)」 중에서



전장으로 끌려가며 통곡하는 비쩍 마른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보는 짐짓 무정한 척 야속하게 중얼거린다. '얘야, 너무 그리 슬피 울지는 말려무나. 그래봤자 세상은 끝내 무정한 법이란다...' 그러면서도 해 저무는 하얀 산과 함께 소년의 벌거벗은 영혼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진정한 휴머니스트, 정성情聖 두보! 사랑의 의무, 소실, 습관, 모독? 그의 사랑에 그런 관념의 유희가 있었던가?     


두보에게는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하나였다. 허술하면 허술한 대로, 미덥지 못하면 미덥지 못한 대로, 그는 가여운 소년의 영혼을 끌어안고 하나가 되고, 가여운 우리 모든 인간들의 영혼과 하나가 되고, 가여운 대자연과 부둥켜안고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거지 신세였던 두보는, 그 자신부터가 너무나 가엽고 허술했으니까.


그는 평생 우울했지만 ‘떠나갈’ 생각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운명의 여신은 잔혹하리만큼 그를 늘 외면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패배주의에 물들지 않았다. 삶의 뼈아픈 현실 앞에 수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한 번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가 말년에 거의 반신불수에 귀머거리, 가진 것 하나 없는 무일푼 거지 신세로 선상船上 난민이 되어 방랑 생활을 할 때, 떠오르는 달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보시라!



별이 떨어져 내리니, 평야는 드넓어지고

달이 솟구쳐 오르니, 강은 흘러간다.

星垂平野濶, 大江流.

  나그네 길의 어느 밤(旅夜書懷)」 중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별빛에 점차 드러나는 수평의 광야! 여기에 문득 어둠을 깨고 달이 순식간에 튀어 오른다. 여기서 두보는 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샘솟을 용湧' 자로 묘사했다. 평범하게 솟는 게 아니다.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거다. 달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서 온 세상을 밝혀주자, 어둠 속에 흐르는 커다란 강이 보인다. '그래, 여기 진리의 큰 강이 흘러가고 있었어. 그 사실을 잊지 말자...' 거의 반신불수 귀머거리의 늙은 거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 얼마나 건강하고 강인한 정신세계인가!


나는 이 시를 소리 내어 천천히 읽을 때마다 감동에 몸을 떤다.

거의 반신불수 상태의 우울한 작가가 보여주는 너무나 역동적인 그 모습이 감격스러워 언제나 눈물을 흘린다.




'문학'은 두보의 인간 사랑처럼 통곡할지언정 절망하지 않는다. 이백李白(701~762)처럼 비극 속에서도 꽃과 달님과 술을 초대하여 낭만과 자연을 즐긴다. 소동파蘇東坡(1037~1101)처럼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긍정의 요소를 찾아내어 유머를 즐기며 하하하 웃어넘긴다. 그런 것이 진짜 '사랑'이요 '문학'이다. 참된 '사랑'과 '문학'은 힘들고 괴로운 우리네 삶의 여정을 함께 헤쳐 나가는 따스한 벗이요, 스승이 되어준다. 그것이 서양학의 'literature'와 가장 다른 점일 것이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그곳.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 그곳. 절망과 희망, 불행과 행복, 위대함과 허술함, 선과 악... 그 모든 이분법의 함정을 뛰어넘은 그곳. 그래서 역경逆境을 오히려 위대한 사랑의 원천으로 삼은 그곳. 그 완성된 결합 패러다임의 세계가 바로 진정한 '문학'이요 우리네 '인생'이라고, 나는 그렇게 배웠다.


세종대왕도 그 뜻이 아니었을까. 한글을 창제하자마자 『두시언해 杜詩諺解』를 만들어서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 '문학'의 건강하고 강인한 정신 아니었을까. 우리도 세종대왕의 그 애민愛民의 교육 정신을 본받아 'literature' 대신 '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졸업생 친구에게 밤을 새워 답장을 보냈다. 나약한 감상주의는 '사랑'이 아니다. '문학'이 아니다. '인생'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그 후로는 무소식이 희소식. 다행이었다.

     



[ 표제 사진 ]

◎ 남해 금산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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