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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y 30. 2023

철학과의 첫 만남

2. 文學으로 philosophy 톺아보기

"저, 저 놈 이름이 뭐야? 당장 학번하고 이름을 대! 가만 두지 않겠어."


선생님의 분기탱천하신 목소리가 강의실 안에 쩌렁쩌렁 울린다. 왜 아니겠는가. 어떤 키다리 학생 '놈'이 강단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서, 당신은 교수 자격이 없노라고 삿대질을 한 후에 강의실을 나가버렸으니, 그 어떤 교수가 분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학생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당시 우리는 새내기, 대학 1학년. 입학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까? 3학점 짜리 교양 수업으로 철학을 배우고 있었다. 담당교수는 그때 막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신 분. 훗날 문민정부에서 장관 직까지 역임하시게 되는 훌륭한 분이었다. 문제는 박학다식하신 선생님의 명 강의를 우리가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는 사실. 급기야 과 대표가 총대를 메고 정중하게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교수님, 죄송한데요, 강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뭐? 자네, 수업 빠진 적은 없나? 노트 필기는 다 했고?"


기습 공격을 당한 선생님 얼굴이 순간 벌게지셨다. 노트 검사를 하신다. 한 번도 빠진 적도 없고, 필기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별다른 하자를 찾지 못한 선생님께서 당황하신 나머지, 순간적으로 실언을 하셨다.


"역시 서울대 못 간 이류 대학 놈들이라 어쩔 수 없군."


오 마이 갓! 이 정도면 실언이 아니라 망언 수준이었다. 모두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 순간, 문제의 그 키다리 학생 친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교수가 학생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요?!" 냅다 소리를 친 것이다. 놀란 선생님이 얼굴이 시뻘겋게 되면서 "뭐라고? 너 이 놈, 앞으로 나왓!" 손짓을 하셨다. 키다리 친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강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더니 큰 소리에 삿대질까지 하고는 꽝,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분기탱천하신 선생님이 그 친구를 퇴학시키겠노라, 학번과 이름을 대라고 애꿎은 우리를 다그친 것이다.




우리가 이름을 댈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그 순간, 사건의 발단이 된 바로 그 과 대표가 일어나서 이름을 대는데, 맙소사! 키다리 친구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학번과 이름이었다. 선생님이 수첩에 받아쓰시자 우리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 아녜요. 그건 그 친구가 아니라 이 친구 이름예요."

"뭐, 뭐야? 똑바로 이름 안 댈 거야? 어서 말해!"


그러자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며 각자 자기 학번과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눈이 동그래진 선생님이 침묵에 빠지더니 한참만에 입을 여신다. 차분한 말투였다. 인간의 도리와 학습의 목적 등등,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인상만은 지금도 또렷하다. '어라, 이 선생님이 원래 이렇게 말씀을 쉽게 잘하시는 분이었네? 그런데 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억압적인 '인문학' 교육에서의 엑소더스를 주장하는 상징적 장면이다.


철학 강좌는 2학기에도 이어졌다. 여전히 같은 선생님이었다. 그 후 강의는 어땠을까? 우리 삶과 연계하여 쉽고 재미있고 소탈하게 진행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여전히 낯선 서양 단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어렵고 딱딱한 논리와 따분한 분석만 쏟아졌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수십 년 전의 에피소드를 꺼낸 것이 아니다. 요새 기준으로는 선생님의 실언은 분명 비난 대상이 되겠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키다리 학생의 언행이 더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스승은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불만이 있더라도 꾹 참고 '그 깊은 뜻'을 묵묵히 헤아려보거나, 정 말씀을 드리려면 아주 공손한 태도였어야 했다. 그게 그 당시 스승과 제자 간의 윤리였다.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 순간이 '철학'과의 첫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수업을 1년이나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것,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는 것, 우리 삶과 괴리된 느낌을 주는 것, 그런 인상뿐이었다.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후로도 지금까지 이런저런 경로로 '철학'을 경험했지만,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철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식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철학'은 어쩌다가 그런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일까?


                                                   < 계 속 >




[ 표제 그림 ]

◎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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