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둔하고 게을러서 유학 생활 12년 만에 국립대만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식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간신히 막차를 타고 논문이 통과되는 바람에 박사 가운도 입어보지 못했고 기념사진 한 장 찍은 게 없다. 남은 것은 그저 '박사 학위 증서' 한 장뿐.
필자의 국립대만대학 박사학위 증서. (좌)에는 文學博士, (우)에는 Doctor of philosophy로 표기되어 있다.
감개무량하여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읽고 또 읽어보는데, 영어 증서를 살펴보다 보니까... 어라, 이게 뭐야? 'Doctor of philosophy'라고 쓰여 있잖아? 아니, 내가 문학 박사가 아니라 철학 박사라고? 근데 중국어 증서에는 '문학 박사'라고 쓰여 있네? 오타가 난 건가, 아니면 혹시 중국어는 'philosophy'에 '문학'이라는 뜻도 있나? 영중사전을 찾아보았다. (新英漢詞典, HongKong 三聯書店, 1975)
philosophy:
① 철학, 철학 체계
② 철리哲理
③ 인생관
④ 어떤 학문 분야의 기본 원리
⑤ 의학, 법률, 신학 외의 학문 분야
[예] a doctor of philosophy in architecture 건축학 분야의 철학박사
⑥ 지식에 대한 열망 또는 탐구
⑦ 철인哲人의 자세. 달관의 태도.
중국에서도 'philosophy'는 '철학'일 뿐이었다. 굳이 '문학'과 연계한다면 ⑤번을 참고할 수는 있겠다. '의학, 법률, 신학 외의 학문 분야'를 지칭한다니 '문학'도 포함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개념을 적용하면 '문학 박사'는 'Doctor of philosophy in literature'라고 표기해야 한다. 즉 '문학 분야의 철학박사'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 증서에는 내가 'the Graduate Institute of CHINESE LITERATURE' 즉 '중국문학연구소'(연구소는 우리의 대학원)에서 공부했다는 말은 있지만, 정작 학위 명칭에는 'literature'라는 말이 없다. 그러니 이 개념을 적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대만대학은 왜 '문학 박사'를 'Doctor of philosophy'로 표기한 걸까?
그로부터 'philosophy'와 '철학'은 내 삶의 또 다른 화두가 되었다.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문학'과 'philosophy'는 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철학'과의 두 번째 만남이요, 'philosophy'와의 첫 만남이었다.
[ 표제 사진 ]
◎ 국립대만대학國立臺灣大學 정문. 일제의 7번째 제국대학인 대북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이 전신이다. 아직도 '문학원文學院' 등 곳곳이 일제 때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동양학'적인 학술 분위기는 전혀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