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성격이 담겨있을까?
철학 전공자 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그분들을 모욕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오로지 '철학'이라는 단어 자체의 문제점만을 비판하려는 거니까, 부디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첫째, '철학'은 교만하고 권위적이다.
'철학'은 잘 생각해 보면 참 웃기는 단어다. '밝을 철哲, 배울 학學', '밝고 현명한 학문'이란다. 아니, 그럼 다른 학문 분야는 우둔하고 어리석다는 말인가? 노골적으로 다른 학문 분야를 깔보고 있다. 누가 만든 말이길래 이렇게 교만할까? 한자 단어니까 예전부터 중국에서 쓰던 말일까? 아니다. 니시 아마네西周(1829 ~ 1897)라는 일본학자가 ‘philosophy'를 번역할 때 '창조'해 낸 말이다.
이 단어는 메이지 유신 당시의 '신조어'다. 기존의 한자 단어를 활용하여 번역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 '신조어' 속에는 당연히 니시 아마네를 위시한 당시 일본 사회 리더 그룹의 생각 패러다임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원래 ‘philosophy'는 어떤 뉘앙스였을까? 그리스어 ‘philosophy'는 원래 '지혜/지식을 열망하고 탐구한다'는 뜻. 다른 학문 분야를 무시하고 깔보는 뉘앙스 같은 건 전혀 없다. 한자로 직역을 한다면 '애지학愛知學' 정도가 적당하겠다. 그런데 이 단어가 일본인에 의해 엉뚱하게 번역이 되면서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진다.
너는 못났고 나는 잘났어!
그렇게 '다른 학문'을 철저히 무시하고 깔아뭉갠 것이 '철학哲學'이라는 단어에 담긴 뉘앙스다. 그들이 깔보고 싶었던 '다른 학문'은 무엇일까? '서양학'의 다른 분야를 말하는 것일까? 그랬을 리가 없다. 깔아뭉개고 싶었던 상대는 동아시아의 기존 전통 '학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늘 동아시아 '학문'의 변방 후진국이라는 열등감에 빠져있었다. 이건 짐작이 아니라 팩트다. 그렇다면 'philosophy'를 번역하는 기회를 통해 열등감에서 탈출하여 '학문'에 대한 우월감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건 합리적인 추론이다. 적어도 이 단어에는 동東과 서西의 서로 다른 생각의 틀이 빚어낸 언어의 갭을 메우고자 하는 진지한 학술적 고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서양학'이라는 신학문을 우월한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차제에 동아시아 학술계의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욕이 엿보인다.
그들은 '철학'을 다시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라. '철학'은 '서양학'의 출발이자 근간이다. 게다가 동아시아에는 애당초 '철학'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뒤에서 다시 얘기해 보자. 아무튼 그러니까 그냥 '철학'이라는 말로 충분하다. 다른 것과 혼동할 우려가 없다. '서양 철학'이라는 말은 사실상 '역전앞'처럼 의미가 중복된 단어인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나누었을까?
필자가 앞서 말했던 것을 상기해 보자. '동양'이란 '일제 군국주의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란 뜻. 그러므로 '동양 철학'이란 말에는 일제 군국주의 중심의 '밝고 현명한 철학'으로 '우둔하고 어리석은 동아시아인의 기존 패러다임'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뜯어고치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점을 인식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 '철학'이라는 이 용어가 얼마나 교만하고 권위주의적이며 심지어 억압적인 뉘앙스인지, 새롭게 와닿지 않으신가.
둘째, '철학'은 분리적이다.
'철학'이 뭐 하는 거예요? 어린이들이 흔히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아하, 그렇구나!" 어린이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대답해 줄 수 있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철학 교수님이 친절하게 답변해 줘도 어린이들이 듣다가 하품하며 뺑소니칠 확률이 99%다.
출처: 이수석, 김민송 공저『재미있는 철학 이야기』, 가나출판사
왜 답변하기 어려울까? 우선 이름 만으로는 무엇을 공부하겠다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정치학 · 경제학 · 물리학 · 지리학... 다른 건 이름만 들어도 대충은 다 알 수 있다. '철학'은 아니다. 그 이름은 그저 "난 잘났거든!" 으스대기만 할 뿐, 그래서 뭘 하겠다는 것인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니시 아마네는 왜 그랬을까? 간단하다. 그저 대륙 침략의 이론 근거를 세우기에 급급했을 뿐, 자기 자신도 ‘philosophy'가 뭔지 잘 몰랐을 테니까. 이름부터 이러니까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기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어휴, 답답해. '철학'이 도대체 뭐지?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보면 요 따위로 적혀있다.
◎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간의 본질,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위키백과』
◎ "개별 학문이 추구하는 현실의 한 영역이나 단면이 아니라 항상 전체성과 근원성을 문제로 삼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거 참 말 어렵게 하네. 좀 쉽게 말하자. 한 마디로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말 아닌가. 여기에 대해서는 2000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오싱젠高行健(1940~)이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서 강연한 말이 훨씬 더 유용하다.
서양 철학의 전통인 사변思辨, 즉 이른바 형이상학은 서양 언어에서 발원한 것이다. 이런 언어는 분석적 성격의 언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 심리 분석과 어의語義 분석에 치중하는 당대 서구 문학의 주요한 두 흐름은 서구 언어의 이러한 특징에서 비롯되었다. 서구 문학은 인간의 심리적 현상을 한없이 파헤치고 또 파헤치며, 단어의 개념을 끝없이 탐구하고 추적한다. 현상학과 분석 철학의 기초 위에 세워진 무수한 서구의 문학 이론은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가오싱젠, 「문학과 현학, 『영혼의 산』에 대하여」에서. 1991. 5.)
철학의 전통은 '사변思辨'이란다. 근데 '사변'이란 게 무슨 뜻인가? 두 가지 단계의 의미가 있다. [제1단계]는 '생각한다'는 뜻. [제2단계] 근데 그냥 생각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끝없이 따지고 파헤치며 고민하며 생각한다. 그게 '철학'이 하는 일이다. 폼나게 얘기하자면 '논리와 분석으로 사유思維하는 학문 분야'라는 이야기다.
아니 근데, 희한하지 않은가? 곰곰 생각해 보시라. '생각하는 것'이 독립 학문이라니? 인간에게서 '생각'을 따로 분리해 낸다는 그 발상 자체가 너무 신기하다. 그러니까 '철학'을 전공한다는 말은 '생각하는 것'을 전공한다는 뜻인데, 그럼 다른 학문 분야는 '생각하는 과정'이 없단 말씀? 아니면 다른 전공 학자들은 모두 생각이 없는 사람이란 뜻인가? 그건 아니라고? '철학'을 전공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논리와 분석으로 모든 것을 끝없이 따지고 파헤치는 것'을 전공하는 거라고? 아이고, 말만 들어도 골치 아프다. 그러니 위에서 인용한 만화 속 아이들이 다 도망가지. 쩝.
생각해 보시라. 만약 내가 사귀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내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꼬치꼬치 따진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정말 짜증 날 것 같지 않은가? 싸가지 운운 투덜대며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남편이란 작자가 아내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일일이 꼬투리 잡고 심리 분석을 시도한다면? 아내는 아마 정신병에 걸리거나 이혼 소송을 벌일 거다. 혹시 그런 것과 철학 공부를 똑같이 취급하면 어떡하냐고 따지고 싶으신가? 공부는 공부고, 이런 얘기는 전혀 다르지 않냐고 따지고 싶으신가? 그게 바로 분리의 패러다임이다. 아니, 만약 현실과 괴리된 공부라면, 그런 비실용적인 공부를 대체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
동아시아의 '학문'에는 '철학'이라는 과정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즉 '생각'을 따로 분리해서 '논리와 분석'의 방법으로 따지며 시작하는 공부 방식이 아니라는 이야기. '학문'의 공부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단계가 있다. 『논어論語』첫 장에서 공자가 거론한 공부의 방법 ― '학學'과 '습習'이 바로 그거다.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단어 아닌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늘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 제1단계, 배울 학學: 먼저 그 어떤 것의 이치를 깨우친 타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 행위다. 이를 테면 선생님께 수업을 받는 것과 같은 두뇌 활동을 말한다. 즉 배우는 단계다. 이때 재미있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 제2단계, 익힐 습習: 공부는 수업을 듣는 두뇌 활동으로 끝나면 별 소용이 없다. 진짜 중요한 건 몸으로 익히는 단계다. 내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 '늘, 시시때때로' 익혀야 한다. '때 시時'는 '지속적으로'라는 뜻.
즉 선생님은 문학적으로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고, 학생은 간절한 정성으로 꾸준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 그러다 보면 논리와 분석의 힘은 나중에 저절로 키워진다는 이야기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처럼. 어린아이가 논리와 분석으로 문법을 따지면서 말을 배우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냥 배우고 익힌다. 엄마 아빠가 재미있게 말을 가르치고 익히게 해 주면 더욱 효과적이다. 이런 게 결합 패러다임의 공부 방식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논리와 분석으로 따지고 파헤치면서 배우려는 사람의 기만 죽이는 '철학'이라는 과정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전혀 없다.
19세기말의 비슷한 시기에 번역한 또 다른 인문학 용어들, 예컨대 '동양東洋', '문학文學', '종교宗敎'와 같은 용어들은 신조어가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동아시아 사회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단어를 활용하여 의역한 것이다. 그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단어들은 비록 커다란 갭은 있을지언정 최소한 동아시아에도 어느 정도 비교할 수 있는 언어와 실체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philosophy'는 달랐다. 이 말에 해당하는 언어가 아예 없었다. 그런 언어가 없다는 것은 그런 실체가 애당초 없다는 뜻. 왜 없을까? 서구의 분리 패러다임 중에서도 ‘philosophy'라는 말이 가장 분리적이고, 결합 패러다임과 가장 상반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시 아마네가 뭐라고 번역해야 좋을지 몰라서, 아예 '철학'이라는 엉뚱한 말을 새롭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번역하는 게 그나마 조금 더 타당할까? 번역의 적절성을 떠나서 '철학'이라는 말은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미 너무나 광범위하게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제 와서 그 말을 어떻게 없애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술적으로 특수한 경우는 다르다. 상황에 따라 ‘philosophy'와 나름대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 대체 가능하다. 바로 '문학'이다. 서양학에서의 ‘philosophy'와 동아시아 '학문' 속의 '문학'은 약방의 감초처럼 학문의 모든 분야에 다 관여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점이 더욱 크다는 것을 사전에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philosophy'는 '서양학'에서 모든 학문의 출발 지점이다. 마치 외국어 공부를 문법으로 시작하는 방식과 같다. 그에 비해 '문학'은 모든 학문 분야의 방법론이다. 쉽고 재미있고 명쾌하게! 그게 '문학'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다른 학문 분야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다. 그게 양자兩者의 차이점이다. 그것만 이해한다면 때에 따라 '문학'이 ‘philosophy'에 더 어울리는 번역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만대학 박사 학위 영어 명칭의 경우처럼.
'서양학'의 '철학'과 '학문'의 '문학'은 약방의 감초처럼 모든 분야에 다 참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내 문학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증공산문연구曾鞏散文硏究』다. 증공이라는 중국 송나라 때 문인의 산문에 내재된 청각 효과를 연구한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그런 것뿐만 아니라 사상적 시대적 배경도 함께 검토한다. 가정환경과 일생도 당연히 살펴본다. 특히 세계관 가치관 문학관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히 살펴본다. 덕분에 내 학위 논문은 깨알 같은 글씨로 260쪽이 넘는 부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 '학문'에서 말하는 '문학'은 이렇게 광범위하다. 언어와 역사와 사상과 문화와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문학으로 학문하기'라는 말이 정말 실감 난다. 그런 점에서 ‘philosophy'가 인간 세상 모든 것에 다 관여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대만대학 박사 학위 증명서가 '문학 박사'를 'Doctor of philosophy'로 표기한 이유도 아마 그런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philosophy'와 '문학'은 각각 '서양학'과 '동아시아 전통 학문'의 기본이자 기초다. 모든 학문 분야에 끼어든다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방법론은 완전히 다르다. 분리의 패러다임인 ‘philosophy'는 딱딱하고 어렵다. 논리와 분석을 강요하는 고도의 이성 reason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좌뇌를 풀가동해야 한다. 당연히 쉽게 피곤하고 지칠 수밖에 없다. 수학 공부처럼 개념 정의부터 먼저 내리고 나머지는 그 틀에 끼워맞추는 연역법의 공부 방식이자 감성적인 우뇌 활동을 억누르는 삭막한 교육 방법이다.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요,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 중의 하나다.
반대로 결합의 패러다임인 '문학文學'은 초콜릿처럼 보드랍고 따스한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온유돈후溫柔敦厚'의 귀납법의 방법론을 사용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접하면 접할수록 스트레스가 풀리고 정서가 안정된다. 활발한 우뇌 활동을 통해 학습자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준 상태에서 조금씩 그 분야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논리와 분석의 힘은 그 결과물이 되어 저절로 따라온다. 어떤 교육 방법이 더 바람직할까?
요새는 학령인구 감소의 영향을 받아 대학 교과 과정도 많이 변화하고 있지만, '철학'은 해방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우리나라 대학의 교양 필수과목이었다. 그런데도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줄곧 OECD 1위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자살공화국이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이야기 아닐까. 우리 사회의 '철학'과 '인문학' 교육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또 하나의 반증 아닐까.
학문은 우리 삶에 그대로 연계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철학으로 인문학 시작하기'가 우리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우뇌형 기능을 강조하는 감성 교육으로 사회 구조를 바꿔보는 건 어떨까.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싱그럽고 풍요로운 감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우뇌형 교육으로 사회 구조를 바꿔보자.
철학 엑소더스!
차갑고 삭막한 '서양학'의 '인문학'과 '철학'에서 벗어나자.
동아시아 '학문'의 감성적인 '문학으로 학문하기'로 교육 시스템을 대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 표제 사진 ]
◎ 소크라테스(좌)와 플라톤(우). 소크라테스의 흉상은 1세기 경의 로마 예술품이다. B.C 4세기의 그리스 조각가 리시포스 Lysippos가 만든 흉상의 모사품으로 추정된다. 플라톤의 흉상은 B.C 4세기의 그리스 조각가 실라니온 Silanion이 만든 흉상의 모사품.
< 제5장 - 철학의 함정,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