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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un 07. 2023

달마 얼굴에 수염 없는 까닭은

3. 文學으로 religion 톺아보기



"저기 저 달마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월드 스타 강수연이 열연한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 나오는 말이다. 주인공 순녀(강수연 분)는 기구한 삶의 인연을 뒤로하고 덕암사(실제로는 선암사)에서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는다. 달기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에게 노老 비구니가 묻는다. "저기 저 벽에 걸린 달마의 얼굴을 보아라. 저 달마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고개를 떨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순녀가 잠시 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엥? 저 남자한테 수염이 없다고? 왕방울 눈에 산도적처럼 생긴 험악한 얼굴. 삼국지의 연인燕人 장비張飛처럼 고슴도치 수염이 그 얼굴에 하나 가득이다. 그런데 왜 수염이 없냐니... 하지만 이제 막 계를 내려주신 스승에게 감히 따져 물을 용기가 없다. 그녀에게 노 비구니가 다시 말한다. "이것이 네가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이니라."


저 달마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저작권 문제로 직접 그려 보았다. 못 그려서 죄송 ㅠㅠ)


나도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학문'에 관한 수업을 시작할 때면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져놓고 말한다. "여러분은 평생 안 하셔도 됩니다. 이번 한 학기 동안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학기말에 제가 물어볼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 검색 금지! 정답을 풀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생각만 하세요. 일부러 생각하지는 말고 갑자기 생각날 때만 생각하세요. 버스 안에서, 길을 걷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떠오르면 그때 생각하세요. 왜 수염이 없지? 수염, 수염, 수염... 나중에 내가 물어보면 정답을 말하려 하지 말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는 그런 얘기를 해보세요. 아셨죠?" 


독자 여러분도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는 '이념 ideology'만큼 심각한 갈등과 분쟁의 요인이다. 한국 사회도 만만치 않다. 전철 타고 다니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들을 꼭 만나게 된다. 불교 사찰의 문화재가 누군가에게 훼손되었다는 뉴스도 종종 등장한다. 한국 사회의 종교 갈등은 주로 불교와 기독교, 다른 말로 한다면 일원론과 이원론의 대립인 것 같다. 


'종교'는 무슨 뜻일까? 한 마디로 '신神을 믿는 일'이다. 기독교로 친다면 '하나님을 믿는 일'이다. 이때의 '종교'는 ‘religion’을 번역한 단어다. 신과 우주/대자연/인간을 따로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는 서구 이원론의 산물이다. 그에 비해 동아시아의 인지 체계에서는 신과 우주/대자연/인간을 하나의 결합된 존재로 인식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東學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나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이 대표적이다. 동아시아의 '종교'는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이었다는 이야기.


‘religion’을 '종교'로 번역한 것은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1860년, 독일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독일어 '레리기온스위붕 Religionsubung'을 '종교宗敎'라고 번역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러다가 1881년에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등이 편찬한 『철학자휘(哲學字彙)』라는 책을 통해서 완전히 굳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종교'라는 이 단어는 '철학'처럼 일본인이 창조한 신조어가 아니다. 이 어휘를 최초로 만들어서 사용한 사람은 당나라 때 서역 우전국于闐國(오늘날의 호탄和田) 출신 승려인 시크샤난다 Siksānanda, 즉 실차난타實叉難陀(652-710)이다. 그가 중국어로 번역한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제4권의 한 대목을 소오생의 한글 버전으로 읽어보자. 



어느 날 대혜大惠가 세존에게 궁극적인 진리의 특징을 물으니, 세존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모든 성문과 연각 보살에게는 두 가지 근본 도리가 있다. ‘으뜸 되는 최고의 진리: siddhānta(宗趣)’와 그것을 ‘언어로 이야기한 것: deśanā(言說)’이다. ‘으뜸 되는 최고의 진리’는 '스스로 체득하는 것(自證)'이다. 그것은 문자와 언어와 분별을 떠나 더러움이 없는 경지로 들어가 깨달음을 스스로 찬란하게 드러낸다.  ‘언어로 이야기한 것(言說)'을 '가르치는 방법(敎法)'은 같음ㆍ다름ㆍ있음ㆍ없음 등의 모양을 떠나 훌륭한 방편으로 중생을 가르침 안으로 들어오게 할 뿐이다. 이에 세존은 거듭 게송으로 설하였다. “종취宗趣와 언설言說은 자증自證과 교법敎法이라. 그 이치를 잘 깨치면 다른 망상을 따르지 않느니!” 



여기서 석가모니가 말하는 ‘으뜸 되는 최고의 진리’, 즉 ‘싯단타 siddhānta’란 무엇일까? 그것은 현상세계의 일반적인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아뇩다라삼막삼보리 무상정등각覺, 즉 '종취宗趣'의 세계다. 그 경지는 뼈저린 삶의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이른바 자증의 방법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이 경전에서 또 하나의 비법을 알려준다. '데샤나 deśanā' 즉 '특별한 언어言說'를 통해 깨닫게 하는 교육 방법이다. 그것을 '가르침의 방법 敎法'으로 삼으라 한다. 


'종취趣'는 '언설言說'을 '교법法'으로 삼아라! 여기서 '종교宗敎'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으뜸 되는 진리의 세계는 특별한 언어로 가르쳐라!' 그게 '종교'의 원래 의미였던 것이다. 


이쯤에서 생각해 보자. ‘으뜸 되는 최고의 진리’는 일반적인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니까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특별한 언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문학'이다. literature를 번역한 서구의 문학이 아니라, 공자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문학'이다. 으뜸 되는 진리의 세계는 '문학'으로 가르치고 전도하라! 그게 '종교'의 뜻이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종교'가 바로 곧 '문학'이요, '문학'이 바로 곧 '종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종교’라는 문학적 성격의 어휘는 '신'과 같은 절대자의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게, 불교 안에서 가장 유용한 교육과 전도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어 오던 단어였다.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개념으로 바뀐 것은 19세기의 생각 없는 일본 철학자들의 오역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전통적으로 불교의 범주 안에서 사용되던 '종교'라는 용어가, 주객이 전도되어 '종교'의 범주 속에 불교가 포함되는 웃지 못할 난센스가 벌어진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religion’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던 유교와 불교를 굳이 ‘religion’의 개념 안으로 끌어들인 후, 기독교와 정면 대립시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종교'를 일원론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우리나라는 오늘날에도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중이다.




학기말이 되었다. 그동안 학생들에게는 이따금 무심한 척 한 마디씩 툭, 툭 던지곤 했다. "여러분. 달마 얼굴의 수염, 열심히 생각하고 계시죠? 검색하지 마세요? 정답을 말하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 그걸 말해주셔야 합니다. 아셨죠?" 나중에 알고 보니 학생들은 검색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더 검색했다고 한다. 더 궁금해져서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라나. 핑계가 좋군. 쩝. 근데 검색해 봤자 수염은 있는데 답은 없더라, 그래서 더 답답해졌노라, 어서 그 사연을 가르쳐달라고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군. 학기말이 되었으니 이제는 달마 수염을 깎아주든지 뽑아주든지 뭔가 마무리를 해주지 않을 수 없겠군. 


동아시아의 공부하는 학인들에게는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었다. 유교를 추종하는 유학자이든, 불교를 믿는 불자이든,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도사이든 간에 모두들 '무념 · 무상 · 무아의 경지'를 가장 좋은 공부 방법으로 여긴다. '나'의 존재마저도 잊어버린 채 아무 생각이 없는 그 맑은 경지에 들어서야만 불현듯 커다란 깨달음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도 하고 참선도 하는 거란다. 


문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으려면 오히려 백팔번뇌, 온갖 잡생각들이 일시에 다 쳐들어오기 마련이라는 사실! 무념 · 무상 · 무아는커녕 자칫 절세의 무공을 연마하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무술 고수처럼 크나큰 부작용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인들이 사용한 비법이 있었으니, 바로 '수일守一'이었다. '수일'은 '한 가지만 지킨다'라는 뜻이니, 곧 '한 가지만 골똘히 생각한다'라는 뜻. 즉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니까, 그 이전 단계로 먼저 한 가지 생각에 정신을 집중한다는 이야기다. 옛말에도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 정신을 하나로 집중시키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저기 저 달마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그 질문에 몰두해도 마찬가지다. 달마 얼굴 수염, 얼굴 수염, 수염, 수염, 수염...... 계속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수염마저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 때리게 된다는 이야기. 그 순간이 바로 곧 무념무상의 시간이라는 뜻. 그 순간이 피곤에 지친 우리의 대뇌가 잠시 활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달마의 수염'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 주인공 순녀가 속세에 대한 잡념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노 비구니가 던져준 한 가지의 생각거리, 즉 '화두話頭'였다. 바로 '특별한 언어, 데샤나'의 좋은 사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티베트인들은 단정해서 말한다. 아무 생각도 안 한다고.


'으뜸 되는 진리의 세계는 특별한 언어로 가르쳐라!' 《능가경楞伽經》의 이 가르침에서 참선을 가장 큰 공부로 삼는 종파인 선종禪宗이 시작되었다. 선승들의 언어는 매우 특별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니, 뭐꼬? 이런 선승들의 언어는 현상의 언어가 아니다. 현상 세계와 인간 심리를 끝없이 파헤치는 서구 litreature의 언어로는 당최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런 언어는 우리 동아시아 '문학'의 언어다. 공자의 문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 석가모니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같음ㆍ다름ㆍ있음ㆍ없음 등의 모양을 떠난다." 언어나 문학은 방편에 불과할 뿐, 목적을 달성하느냐, 그 여부가 중요하다. "훌륭한 방편으로 중생을 가르침 안으로 들어오게 할 뿐"이란 말은 바로 그 뜻이다. '달마의 수염'은 비구니가 된 순녀를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와~! 선생님, 저 맞췄어요! 수염이 있고 없고, 그게 중요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걸랑요!" 설명을 듣고 어떤 학생들은 신이 나서 기고만장이다. 하하, 귀여워라. 하지만 그것도 틀렸다. "어허, 답을 맞히고 못 맞히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깐? 학문에서 중요한 건 '실천'이다.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그 세계를 엿보면서 철저히 깨닫는 '자기 증명, 자증'이다. 얼마나 하나에 몰두하여 생각하고 얼마나 멍을 때려서 얼마나 평화로운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누리게 되었는지 그게 중요한 거다. 우리의 '문학'도 마찬가지. 현란한 언어의 재주 넘기나 미사여구로 글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건 조충소기雕蟲小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모순 투성이의 현실 비극 속에서도 아름답고 싱그럽고 강건한 영혼의 세계를 지켜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우리의 '문학'이 바로 곧 '종교'이고, '종교'가 바로 곧 '문학'이라는 말은 바로 그 뜻이다. 알았지용?"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지혜의 가르침을 담은 귀중한 경전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맨 마지막 구절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에서 따온 산스크리트어다. "가자, 가자! 저 높은 곳, 아주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올라가자! 참으로 기쁘구나!"라는 뜻. 그 깨달음의 세계가 바로 ‘싯단타 siddhānta’이고, 그곳으로 가는 '아제'의 방편이 '데샤나 deśanā'이며 '우리의 문학'이자 '일원론의 종교'인 것이다. 




'이원론의 종교'인 기독교에서는 '문학'으로 종교를 믿을 수 없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 일이다. 우연히 학교 식당에서 신학과의 K목사님과 만나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종교 문제로 집안에 갈등이 잦았던 터라,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답답하고 궁금했던 것들을 여쭈어보았다. 평소 존경하던 원로 목사님이어서 마음을 편히 가졌던지 내 태도는 사뭇 공격적이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목사님은 필자의 그 무례한 생각을 선선히 다 인정하고 공감까지 해주시는 게 아닌가!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이 힘들어했던가. 근데 왜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지 않으시는지,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따지듯 여쭸더니 껄껄 웃으며 말씀하신다.


"하하하, 저 같은 목사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큰일 납니다. 신도들한테 맞아 죽어요. 교수님처럼 문학을 하시는 분이 문학으로 이야기해 주세요. 그래야 합니다."


문학으로 기독교를 이야기해 달라? 무슨 말씀이실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또 하나의 화두가 생겼다. 그리고 십여 년 뒤, 나는 배낭 하나 둘러메고 티베트고원에 숨어있는 교회들을 찾아갔다. 티베트는 삶의 모든 것이 불교다. 모든 티베트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불교다. 그런데 그 속에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있다고? 어떻게 찾아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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