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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un 14. 2023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 文學으로 religion 톺아보기

(앞에서 이어집니다)



#1. 서안西安 성곽


중국 서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과 양귀비가 놀던 화청궁華淸宮 등 수많은 문화재로 매년 수백만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국제적인 관광 도시다. 이 도시의 한 복판에 명나라 때 축조한 엄청난 규모의 성城이 자리 잡고 있다. 비록 당나라 때의 1/7 규모라지만 4차선 도로보다도 더 넓어 보이는 압도적인 넓이와 도시 한 복판을 에워싸는 13.75km의 길이로, 현존 세계 최대 규모의 위용을 자랑한다.


2006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중국 연수를 온 우리 학생들을 인솔하고 이곳 서안 성곽에 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명의 남녀가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상단 왼쪽 사진 한가운데 위치였다.) 30명 정도나 될까? 중년 남녀들이 두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상반신을 흔들면서 눈을 감고 미친 듯이 울부짖는데, 헉, 한국말이네?


"주여~! 주여~! 주님을 모르는 이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불기둥으로 씸판하여 주씨~옵쏘사!!!"


아니, 웬 저주? 대한민국 서울의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던 그분들이 서안으로 원정을 나오신 것일까. 서방 세계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사진을 찍어댄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좌우로 고개를 두리번댄다. 나는 그들이 혹시라도 한국말을 알아들을까 싶어 너무 걱정이 되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도망치듯 얼른 자리를 피하였다.  

 


#2. 티베트의 사원寺院 도시


여기는 중국 사천성四川省 바이위白玉. '바이위'는 티베트어로 '호법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 티베트불교 닝마파의 본거지다. 사천성의 수도인 성도成都 Chéngdū에서 자동차로 가자면 꼬박 사흘 동안 해발 고도 4~5천 미터의 험산준령과 깊은 협곡을 몇 번이나 넘어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다. 행정구역은 사천이지만 실제로는 티베트고원 한 복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티베트고원의 그 어떤 지역보다도 외부에서 접근하기가 어려운 덕분에 그 문화의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막감에 휩싸인 이 조용한 도시의 인구는 5만. 절반 이상이 라마 승려이고, 나머지도 그들의 의식주를 담당한 사람들이니까 도시 전체가 사실상 사찰인 셈이다. 사색과 명상의 호법신이 머무는, 그야말로 완벽한 Temple city다.


2007년 어느 여름날. 나는 한국연구재단의 기금을 받아 연구 목적으로 이곳에 도착했다. 동반자는 대학생 제자인 조趙 군과 홈페이지 제작 및 동영상 촬영을 맡은 이李 실장이었고, 연구 테마는 '중국 소수민족의 주검의 처리 방법', 즉 이 사람들이 망자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이들의 생사관生死觀을 알아보는 연구였다. 찾아다니는 곳은 주로 묘지와 화장터. 숱한 시신과 해골을 보면서 운남과 사천의 티베트 지역을 한 달 넘게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가장 교통의 오지인 이곳 바이위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사원 순례에 나섰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이곳 사원의 도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본당本堂. 어마어마하게 넓고 어마어마하게 휘황찬란한 불당이었다. 노 스님에게 경건히 합장 인사를 드리니 표준중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시는지라 궁금한 점을 여쭤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기 가운데가 석가모니, 왼쪽이 빠드마삼바바 연화생蓮花生대사, 오른쪽이 관세음보살인가요?"

"옳지, 옳지. 뭐 쫌 아는구먼?"


한참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쪽 불당 구석에서 둘러보던 수행원 조 군이 다가와서 일러준다.


"선생님, 이분들 한국에서 오셨대요."


쳐다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중년 남성 한 명과 중년 여성 6명이 쭈빗쭈빗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만 휙 나가버린다. 단기 선교를 나왔다는데 나를 보더니 뭐가 켕기는지 도망가 버린 것이다.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국어를 전혀 못한단다. 그런데 이 오지까지 어떻게 왔는지, 선교는 또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아무튼 그분들은 그날 반나절 동안 멀리서 우리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더니, 내가 공동묘지 쪽으로 방향을 틀자 그제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날 밤. 한낮의 고단한 일정으로 나는 정신없이 뻗어 자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방문을 쿵쿵 두드린다. 간신히 눈을 떠보니 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다. 문을 열어보니 호텔 매니저다. 제발 좀 도와달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뭔 소리? 그때였다. 갑자기 호텔 위쪽에서 엄청나게 힘찬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오 마이 갓! 낮에 만났던 그분들도 여기에 묵은 것이었다. 하긴, 도시 전체에 호텔이라곤 여기 한 군데밖에 없다 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어서 미친 듯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른바 통성 기도다. 쿵, 쿵! 호텔 건물이 통째로 울렸다. 아니, 적막에 쌓인 도시 전체가 흔들~ 흔들~ 지진이 난 것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제발 도와주세요. 사람들이 다들 난리예요. 근데 저는 말이 안 통하잖아요."

"아이고, 이런 이런... 근데 어쩌죠? 저하고는 말이 더 안 통할 것 같은데요?"


다음 날 아침. 인근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는데 TV에서 한국 관련 뉴스가 나온다. 뭐지? 귀를 쫑긋 해보니 한국의 모 교회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선교를 나갔다가 탈레반에게 납치되어 두 명이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걸까. 여기가 아프가니스탄이 아니라 티베트고원이라는 사실이...



#3. 성경


그 뒤에 예수께서는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다가, 열 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그리고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나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이 말씀을 듣고, 열 두 제자는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다. 마가복음 6장 6~13절공동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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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기독교의 에반젤리즘 evangelism(복음운동, 선교)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한 것이다. 서안 성곽과 조용한 사원의 도시 바이위에서 우리나라의 어떤 기독교인들이 벌였던 단기 선교 활동도 아마 이 가르침을 근거로 한 것이리라. 여기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① 예수가 전도를 위해 파견한 제자의 숫자는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씩이다. ② 예수는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와 같은 다분히 감성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방법으로 전도하라고 가르친다. ③ 예수는 만약 전도의 대상자들이 끝내 환영하지 않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나면서 발에 있는 먼지를 털어 버리면서 경고하라고 가르친다.


정말일까? 예수님이 정말로 이런 가르침을 주셨을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환대하지 않는다고 발에 있는 먼지를 털면서 경고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에잇! 이 사악한 놈들, 퉤, 퉤, 퉤! 네놈들 어디 두고 보자! 그러라는 말인가? 그렇게 치졸한 방법으로 사랑을 전도하라고 가르치셨을까? 그럴 리가 없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44절) 간곡히 당부하신 그 사랑의 예수님이 이런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고?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이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의 일생을 소개하고 있는 4대 복음서는 예수가 쓴 것이 아니다. 수백 개의 복음서 중에서 오늘날의 4 복음서 체제가 성경으로 고착된 것은 A.D. 4세기 경의 일이다. (김용옥,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3)』528쪽) 예수의 가르침을 믿음의 집단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진리의 말씀인 소리를 성경이라는 문자로 담아내는 그 과정에서, 후세 신도들의 자의적인 첨삭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공자님 말씀을 그대로 녹취했다는 『논어』에도 그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에반젤리즘은 ‘절대 신神’의 존재, 즉 하나님의 복음을 알리는 일이다. 절대 신의 존재를 믿느냐 안 믿느냐, 내 편이냐 아니냐, 적이냐 아군이냐, 그야말로 All or Nothing이다. 자연히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에 치우쳐 타인을 다분히 강제적으로 설득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쉽다. 그런 분위기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그게 예수님의 새로운 약속, 신약新約 아닌가.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기독교를 어찌 기독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가복음에 나오는 에반젤리즘이란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하기 어렵다. '예수'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예수'로 상징된 당시 지중해 서부 연안에 산재되어 있던 유대인 콤뮤니티의 종교적 성향, 즉 분리 패러다임의 산물로 보아야 타당하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의 전도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명상하듯 헤아려본다.



#4. 불경


그대들도… 일체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여러 사람의 이익을 위해, 여러 사람의 안락을 위해, 세상 사람들과의 공감을 위해, 그리고 (천계의)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가라.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처음에도 중간에도 마지막에도 이로理路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 홀로 안전하고 순결하며 청정한 행을 보이도록 하라. 비구들아,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아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진리를 설하여라.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1, 계제係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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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는 바라나시에서 야샤스를 비롯한 청년 61명을 가르쳤다. 그들이 마침내 깨달음을 얻자 이제 세상에 나가 배운 대로 가르치며 실천하라고 권하는 석가모니의 말이다. 이를 테면 졸업식에서 교장 선생님이 훈화를 하신 거다. 그런데 나는 이 훈화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다. 그만큼 따스한 사랑이 넘쳐흐른다. 아무튼 여기서 말하는 전도의 방법은 기독교의 에반젤리즘과 정확하게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 같아서 매우 흥미롭다. 일원론과 이원론의 차이라고나 할까?


첫째, 전도를 위해 파견한 제자의 숫자다. 에반젤리즘은 두 사람씩 전도의 길을 떠나보냈고(이원론), 석가모니는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길을 떠나라고 하였다(일원론). 둘째, 전도 방법의 차이다. 에반젤리즘은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와 같은 감성적이며 신비주의적 방법을, 석가모니는 '이로理路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지성적이며 문학적인 방법을 권하였다. 셋째, 석가모니가 전도를 권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세상 사람들과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전도의 대상자들이 전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겸허하고 온화한 자세를 잃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에반젤리즘과 불교 전도의 차이는 길을 떠나는 전도자의 숫자의 차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둘'이라는 숫자는 은연중에 '집단'을 상징하고, '하나'는 '개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전도하면 힘들 때 서로 의지와 격려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자 위주의 전도다. 둘 이상의 여러 사람이 전도에 나서면 전도자는 편할지 몰라도 피전도자는 마음이 불편해지기 쉽다.


종교란 원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결단으로 선택하는 것. 피전도자 입장에서 보자면 결단을 내려야 할 사람은 결국 자기 혼자다. 피전도자는 혼자인데 전도자는 여러 명이라면, 아무리 좋은 진리라 하더라도 필경 공격적이고 고압적이며 강제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설령 감성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들뜬 분위기 속에서 전도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이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신앙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시냇물과도 같다. 결코 참다운 전도의 성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전도는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강요는 더더욱 아니다. 전도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에게 좋다고 해서 타인에게도 좋을 수는 없는 법.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란 결국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된 자각으로 터득하는 것 아니겠는가. 전도는 타인에게 선택과 자각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타당하다. 계기를 제공한다는 말은 여운을 남겨야 한다는 뜻. 그러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둘 이상의 여러 사람이 몰려와서 충동적인 언어의 나열과 수식으로 선동하는 것보다는, 전도자 혼자서 묵묵히 진실하고 간절하고 처절하게 수행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을까. 그 힘든 과정 속에서도 언제나 평화로운 미소, 행복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진한 감동을 던져주지 않을까.


그러므로 전도란 그 자체가 치열하게 정진하는 생활이요, 처절하고 간절한 기도의 행위가 된다. 기도는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의지할 것은 오직 자기 혼자뿐, 그것은 필경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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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숲 속에서 매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을 것을 찾아서 가고자 하는 대로 가는 것처럼, 지혜 있는 사람은 독립과 자주를 목표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료 속에 있으면, 쉬어도 서도 걸어가도 여행을 해도 항상 사람들이 부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독립과 자주를 목표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따니빠따 Sutta Nipat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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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의 소설 제목으로 더 유명해진 이 구절은, 그 덕택에 한동안 홀로 서지 못해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빗대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종교'의 방법론이다. 앞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서구 religion이 아니라 '으뜸 가는 가르침 宗敎'의 방법론이다. '으뜸 가는 가르침'은 바로 곧 '문학'! 그 '문학'은 역시 앞 글에서 말한 것처럼 literature가 아니라 공자의 '초콜릿 문학'을 말한다. 그 '문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타인에게 진한 감동을 던져주는 초콜릿 같은 것. 그런 온유돈후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전달하려면, 먼저 나 자신의 내면세계가 싱그러운 영혼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때문에 '문학'의 생활은 그 자체가 정진이요 기도의 삶이다.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종교란, 문학이란, 이로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방법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religion의 종교, 이원론의 종교는 집단성을 지닌다.

동아시아의 일원론 종교는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집단성을 떠나 '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 될 수 없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에반젤리즘에 해당하는 말일뿐. 홀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했던 예수는 일원론 종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티베트고원 언저리에 자리 잡은 몇몇 그리스도 교회를 찾아가면, 그 예수를 본받고자 했던 어느 그리스도 인들의 감동적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 이야기의 현장으로 함께 찾아가 보자.


                                                                                         < 계속 >


[ 표지 사진 ]

◎ 바이위 시내의 마니퇴 앞에서 합장 인사하며. 마니퇴는 "옴마니밤메훔"이라는 6자 진언이 쓰인 돌무더기.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말했다. 하찮은 돌무더기 앞에서도 작아질 줄 아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고. 합장合掌은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는 인사인 동시에,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겸손함이다. 그 어떤 존재 앞에서도 작아지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예禮'이자 '학문學問'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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