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중국 운남雲南 중디엔中甸. 행정구역은 운남성이지만 해발 4,000m가 넘는 티베트고원. 2001년 12월, 중국 정부가 외화 벌이를 위해 '샹그리라香格里拉Shangli-la'로 이름을 바꾼 이후로 전 세계의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곳이다. 그 전원도시의 외곽에 바로 이 사원이 있다. 라싸의 포탈라 궁전처럼 높이 솟아있다고 해서 '작은 포탈라 궁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캄康 Kham 지역 최대의 사원이다.
필자가 이 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판 National Geography에 해당하는 『중국국가지리』2004년 7월호에 실린 리쉬李旭의 매우 흥미로운 기사 「모든 신이 모여 사는 산골짜기 衆神聚會在山谷」를 읽고 난 후였다. 잠시 그 내용의 일부를 추려서 소개해보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 정확하게는 1851년 2월. 중국인 한족漢族 상인으로 가장한 한 서양인이 이 절을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르노 Renou 勒努. 프랑스 해외선교회 소속의 선교사였다. 그는 주지 스님에게 망원경을 선물하여 환심을 산 후에 이 절에 장기 투숙하며 티베트어를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문화와 지리, 생활 습관까지 함께 익힌다는 이야기. 그렇게 1년이 넘게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그는 거의 티베트 사람이 되어갔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사꾼이 장사할 생각은 안 하고 그저 티베트어 공부와 현지 사정 파악에만 애쓰는 그를 점차 수상하게 여겼단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절을 떠나 더욱 깊숙한 티베트 오지로 들어간다. 해발 6,000m의 설산을 넘고 난창강瀾滄江 즉 메콩강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갔다. 웨이씨維西 · 공산貢山을 거쳐서 마침내 짜위察隅 Zayü Zong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교회를 세웠다. 그것이 티베트 땅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출발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이 절의 스님들은 정말로 그를 의심했을까? 르노는 정말로 도망치듯 절을 떠났을까? 혹시 그건 이 기사를 쓴 리쉬라는 양반의 편견 아닐까? 리쉬는 같은 기사 속에서 그 무렵 르노가 자신의 선교 교단에 보냈다는 편지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이 정직한 양반들은 내가 그들의 무기로 그들의 교회를 공격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답니다."
이곳의 정직하고 순박한 스님들은 자기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기사의 앞뒤가 서로 말이 맞지 않는다. 티베트 사람들, 특히 라마승들은 사람을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더구나 르노는 1년이 넘게 열심히 자신들의 언어와 생활 습관을 배워서 친해진 사람 아닌가! 그들은 그런 사람을 의심할 정도로 염량세태炎涼世態에 찌든 속인들이 절대로 아니다. 필자가 경험한 티베트 사람들은 대부분 대단히 친절하다. 어느 서방 기자가 14세 달라이라마에게 티베트불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지 않는가. "친절 kindness입니다." 사실이 그렇다.
필자는 2007년 여름에 40여 명의 학생들을 인솔하고 이 절을 방문한 적이 있다. 사전에 연락하거나 사원 측에 안내 등을 요청한 바는 전혀 없었다. 그저 무수한 관광객의 한 명으로 입장하였을 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조를 짜주고 스님들과 인터뷰를 해오라는 미션을 주었다. 물론 사찰을 참관할 때의 기본 예의와 티베트불교에 대한 기본 소양은 당연히 사전에 교육하였다. 인터뷰할 때 가장 중요한 점: 상대방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 그리고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간절함. 그 마음가짐을 강조해 주었다. 한글이 쓰인 볼펜 등의 기념품도 준비해 주었다. 3시간 후, 학생들이 돌아왔다.
"어때, 말이나 통했니?"
"너어~무 친절하세요. 처음에는 괜히 무서울 것 같았는데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니까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 나이 드신 스님이 참선을 하시다가 멈추고 웃으시면서 쑤여오차(酥油茶, 야크 젖에 버터를 넣어 만든 차)를 직접 끓여서 대접해 주시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구요."
"전 신기하게 교회 다니는데도 거부감이 전혀 안 생기던데요? 내가 사이비라서 그런가? 크크크."
학생들은 침을 튀겨 가며흥미진진, 무용담(?)을 자랑한다. 찍어온 사진도 보여준다. 위의 사진은 그 일부다. 학생들과 잠시 잠깐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이렇게 친절한데, 1년이 넘게 온 마음을 다해 자신들의 언어와 생활의 모든 것을 배우면서 친해진 르노를 의심했다고? 부처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부처님으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먹을 것으로만 보인다고, 티베트불교를 전혀 모르는 속인의 편견임에 틀림없다. 나는 감히 단정할 수 있다. 선교사 르노는 의심을 받아서 할 수 없이 도망치듯 이 절을 떠난 것이 아니다. 티베트어를 마스터하고 현지 실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자 본격적인 선교의 길을 나선 것이다.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 나는 학창 시절 중국어를 배우면서 한참 미칠 때는 매일 밤 중국어로 꿈을 꾸었다. 이데올로기 문제로 멀어진 한중 양국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연설하는 주중駐中 대한민국 대사가 되기도 했고, 저우룬파周潤發 주윤발이 되어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홍콩의 갱단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절반은 쭝국 쌀람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언어는 영혼을 전달하는 도구라고 하지 않는가. 르노도 그러지 않았을까? 더구나 그는 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현지인들과 밤낮으로 함께 지내면서 언어와 생활 습관을 배웠다지 않는가? 그러고서도 티베트 사랑의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선교사는커녕 위선자에 불과하다. 르노는 필경 선교 목적과는 별개로 티베트를 정말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선교는 현지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성공할 수가 없다. 그럼 무엇으로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걸까? 권력? 돈? 무력? 그럴 리가 없다. 티베트불교는 한 마디로 '친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친절한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들보다 더욱 친절해야 하지 않을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친절함이 아니라, 간절한 정성과 자기희생과 봉사가 동반된 '찐 친절'만이 친절한 삶을 사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닐까?
필자는 앞선 글에서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서안西安 성곽과 명상의 temple city 바이위에서 울부짖는 '통성 기도'로 현지인에게 저주를 퍼붓던 한국인 '단기 선교단' 목격 사례를 이야기한 바 있다. 르노의 선교 방식은 그런 '선교(?)'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고, 현지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기껏해야 열흘 남짓한 '단기 선교'가 아니라 자신의 일생을 모두 투자한 '초超 장기 선교'였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나는 왠지 르노가 거덴·쑹짼린 사원에서 많은 현지인 친구들을 사귀었을 것 같다. 더 깊은 티베트 오지에서 교회를 세운 후에도 현지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았을 것 같다.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어느새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했을 것 같다. 그게 그의 티베트 선교 성공의 비결이었을 것 같았다. 나의 그러한 심증은 또 다른 선교 현장을 찾아다니며 점점 굳어져갔다.
#6. 운남 웨이씨維西 근교의 츠중茨中 마을.
여기는 르노가 있던 간덴·쑹짼린 사원에서 자동차로 대략 5, 6시간 거리에 위치한 천주교회당이다. 1867년 프랑스 선교회가 세운 교회란다. 르노가 이곳을 경유하여 티베트 짜위로 간 지 15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에 그의 소속 교단이 세운 교회이니까, 어떤 형태로든 그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원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고 1921년에 중국식 서구식 혼합 형태로 다시 지은 지방 문화재 건축물이다.
2006년 여름, 나는 혼자서 이곳을 찾았다. 주변이 온통 티베트불교를 믿는데 어떻게 이런 땅에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이 생기게 된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교회에 들어서니 평일이라서 그런지 별로 인기척이 없다. 한참만에 할아버지 한 분을 뵙게 되었다. 교회에서 일하신다니 집사님 쯤 되는 모양이다.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글쎄? 몰라. 아주 많아. 허허허."
"어르신, 여기 주변 사람들은 다 티베트불교 믿는데 어르신은 왜 그리스도교를 믿으세요?"
"글쎄? 몰라. 울 아부지가 믿으니까 나두 믿는 거지 뭐. 허허허."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대답 속에 진리가 숨어있었다. 그렇다. 나는 숫자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반드시 태어난 순서대로 이승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나이에 집착하며 그깟 숫자에 일희일비했던 걸까. 인류학 책을 보면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시간을 숫자로 기억하지 않고 그 무렵 벌어졌던 사건과 연관시켜 기억한다는데 그런 삶의 방식이 옳을 것 같았다. 믿음의 이유 또한 충격적이다. 교리가 좋아서 믿는 게 아니라, '인연因緣'의 신비한 힘에 의해서 저절로 믿게 되었단다. 하지만 단지 아버지가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믿었을까? 혹시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저 친절한 티베트불교 라마승보다 더 친절한 삶으로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닐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보내는 할아버지의 눈부시게 해맑은 웃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6. 운남 웨이씨維西 근교 야산의 공동묘지
『중국국가지리』2004년 7월호 리쉬의 기사에는 또 다른 선교사도 소개하고 있었다. 그중 1913년 웨이씨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벌였다는 프레이저 James. O. Fraser(중국명 祿尔榮) 목사 일가가 선교에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간단하게 실려 있었다. 2006년 여름, 웨이씨를 찾아갔다. 언젠가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의 정겹고 아담한 도시였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수소문 끝에 현지의 교회를 찾아갔다. 따로 교회 건물 없이 일반 민가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옆 공터에 교회 신축 공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프레이저 목사에 대해 물어보니, 뒷산 공동묘지 어딘 가에 가족묘가 있단다. 대충 방향을 물어보고 무작정 산을 올라갔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던가. 한 시간이 넘게 헤맨 끝에 결국 그 가족묘를 찾아냈다. 따스한 햇살을 받고 군데군데 피어난 장미꽃 때문일까, 황량한 곳이었지만 정원 같기도 했다. 무덤은 모두 3개. 프레이저 목사와 두 딸의 무덤이었다. 목사의 무덤은 상단 사진의 맨 우측이었다. 그 묘비명을 읽어보던 내 가슴에 뜨거운 응어리가 솟구쳐 올라왔다.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프레이저 목사님은 1894년에 태어나 192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겨우 31세였다."
짧은 한 문장. '겨우'라는 한 글자. 현지 신도들의 애통함이 전해진다. 정성껏 꾸며진 이 묘지, 그들이 이 젊은 목사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프레이저 목사가 이곳에 온 것은 1913년, 그때 그는 만 19세의 청년이었다. 그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을 때는 31살이니까 이곳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뒹굴며 생활한 세월은 12년이라는 이야기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죽은 해인 1925년에 신도의 숫자가 600명으로 대폭 늘어났단다. 그의 헌신적인 삶과 죽음이 그만큼 현지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이야기 아닐까.
나머지 두 개의 무덤. 맨 왼쪽. 프레이저 목사의 딸이다. 읽어보니 가슴이 더욱 아프다. 생후 6개월에 사망했단다. 그렇다면 젖도 못 뗀 아기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다. 아내에 대한 기록은 없었으나, 나이 스물도 안 된 젊은 부부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왜 이 머나먼 땅에 와서 생때같은 자식을 떠나보내게 했는지, 왜 스스로가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떠나보낸 자식에게 대한 미안한 마음은 또 오죽했겠는가. 프레이저 목사는 10년 후 자기 자신도 같은 풍토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 미안함과 원망의 마음을 승화시켜 현지 주민들에게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헌신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이 아름다운 가족 묘원 아니겠는가.
가운데는 프레이저의 또 다른 딸의 무덤이었다. 그녀는 24살에 세상을 떴다는 기록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이곳에 남아 봉사의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온 가족이 모두의 목숨을 바쳐 봉사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명실상부한 '헌신' 아닌가.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삶이 진짜 선교 진짜 전도 아닐까. 희한한 인연으로 어느 날 갑자기 이곳을 찾아온 한 이방인조차 이렇게 감동하는데,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는 순박한 이곳 현지인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오늘날 이 지역 일대에는 무려 2만 명의 개신교 신도가 있다고 한다.
#7. 성경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룻기 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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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언젠가 베들레헴 땅에 모진 흉년이 들었단다. 가난한 유태인 여인 나오미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모압은 단순한 이방이 아니라 원수의 나라여서 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남편이 죽게 된다. 나오미는 느닷없이 과부가 되었다. 남편을 잃은 괴로움을 달래 보고자 두 아들을 서둘러 장가보낸다. 오르바와 룻이라는 두 이방인 며느리가 생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설상가상, 손자도 보지 못한 채 두 아들조차 잃고 말았다.
자, 나오미는 어땠을까? 어떤 기분이었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니, 우리 자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남편 잡아먹은 것들이라며 며느리를 욕하지는 않을까? 하나님과 이 세상을 원망하며 극단적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그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비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기막힌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그런 반응이 일반적일 테니까. 나오미도 당연히 말로 다할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또 다른 행동을 선택한다. 그녀는 자신보다 며느리들의 아픔을 더욱 가엾게 생각했다. 며느리들을 극진히 아끼고 돌봐주고 고난을 나누며 모든 어려움을 꿋꿋하게 극복해 나갔다.
그러다가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다.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물러나고 살기 좋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는 귀향길에서 문득 새파랗게 젊은 두 며느리의 장래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래서 젊은 며느리들에게 간곡한 말로 권면한다. 자신들의 고향인 모압 땅에 남아서 재가를 하여 새 인생을 살아나가라고. 큰며느리인 오르바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권면하는 시어머니의 말대로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둘째 며느리인 룻의 선택은 달랐다.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한사코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말한다. "어머님, 당신의 하나님이 바로 곧 제 하나님이에요." 놀라운 신앙 고백이었다. 자기가 믿는 신은 이제 어렸을 때부터 모압 민족의 전통을 통해 믿어왔던 그모스 신이 아니라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룻이 이렇게 개종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시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없던 자신을 며느리로 맞자마자 아들을 잃는 엄청난 슬픔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며느리의 아픔을 더욱 아파해주고 위로해 주며 온 정성을 다해 돌보아준 시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어머니 홀로 먼 길을 떠나보내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 시어머니 홀로 쓸쓸하게 죽어가도록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학교 교목실장이셨던 K목사님은 말씀하신다. "룻의 이러한 신앙적 각성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종류의 관념적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 위대한 혁명적 깨달음이었다."
#8. 운남 노강怒江 상류. 찰라촌(査臘村)
2008년 2월, 설날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니 눈앞에 엄청난 설산이 보인다. 해발 6,740m의 메이리설산梅里雪山 뒷면이다. 여기는 티베트고원과 이어진 노강 상류의 어느 노족怒族 마을. 르노 선교사의 최종 종착지였던 짜위에서 멀지 않은 오지다. 허린何林은 여기서 1년째 현지조사 field work를 하고 있는 운남대학 인류학과의 젊은 교수다. 지난밤, 어둠 속에서 그와 극적으로 상봉하여 함께 산길을 올라온 것이 꿈만 같다.
이 지역을 찾은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중국국가지리』리쉬李旭의 기사에서, 이 일대는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지만 분쟁이나 갈등이 전혀 없다는 내용을 본 것이다. 예컨대 시아버지는 천주교, 시어머니는 기독교, 아들 내외는 티베트불교를 믿어도 서로 아무런 갈등 없이 같은 집에서 평화롭게 잘 지낸단다. 천주교나 불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니, 기독교가 어떻게 그런 포용성을 보일 수 있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하하, 여기는 티베트불교 믿었다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또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불교로 개종하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무지 많아요." 허린 교수의 설명에 어안이 벙벙하다. 이들 종교 간의 차이는 딱 하나, 술 담배란다. 티베트불교는 마음대로 술 담배를 해도 상관없고, 천주교는 다소 융통성을 보이며, 기독교는 철저히 금지란다. 그래서 돈이 없거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되었다가, 어쩌다 좀 하게 되면 천주교회를 나가고, 더 많이 하게 되면 법당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진짜 종교는 아닌 셈이죠. 교리는 거의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다른 곳은 더 하지 않을까. 모든 종교의 교리는 '사랑'으로 만난다.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 가르침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 공자孔子가 말한 '일시동인一視同仁'이란 온 세상 사람을 똑같이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이고, 부처님의 '자비慈悲'란 슬퍼하는 사람들의 손을 사랑으로 붙잡아준다는 뜻.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든 종교의 가장 대표적인 교리는 결국 '사랑'인 것이다. 사랑을 말하지 않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탈을 쓴 샤머니즘에 불과하다. 하지만 종교인이라면서도 이 기본 교리를 위배하고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며 자기 편한 대로 믿는 자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이곳 종교가 가짜라면, 대한민국은 짝퉁 종교의 천국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찰라촌에서 머무는 열흘 동안 개신교회도 가보고 천주교회와 법당도 가보았다. 아이들은 예배나 법회를 보는 중에도 실내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놀았고, 어른들은 근엄한 목소리로 야단치는 대신에 소박한 웃음으로 지켜보며 예배를 드린다. 이런 종교가 가짜라면 무엇이 진짜일까. 이곳 사람들이 하루 두 끼니 먹는 식사는 꿀꿀이죽보다 못하다. 그런데도 손님이 오면 가지고 있는 모든 먹거리를 다 꺼내놓는다. 그들 노족의 언어는 아주 단순하다. 단어가 몇 개 되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단어도 없다. 그러나 전 중국에서 행복지수가 최고다.
나는 티베트 땅에서 종교란 인지認知 체계가 아니라 실천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리가 아니라 실천임을 배웠다. '종교'란 타인에게 감동을 선물하는 실천의 삶을 말하는 것이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현란한 글재주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 그 목표를 위해 문학 역시 독자에게 끊임없이 '감동'이라는 '초콜릿'을 선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콜릿 문학이 바로 곧 종교이며, 종교가 바로 곧 문학의 초콜릿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 나와 인연이 닿는 사람이 헌신과 희생, 감동과 사랑의 삶을 지속적으로 표현해 보일 때 우리는 말하게 되리라. 당신의 하나님이 바로 곧 나의 하나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