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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Aug 04. 2023

우리 것으로 학문하기 (1)

4.《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다》갈무리

이 브런치북《문학으로 인문학 톺아보기》는 《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다》 의 속편이다. 브런치북이 권장하는 분량에 맞추어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상 하나로 이어져 있는 내용이다. 이 두 권의 전체적인 내용의 핵심을 간략하게 돌이켜보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자. 먼저 《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다》 의 내용을 갈무리해 본다. 




우리는 흔히 '동양인'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툭하면 '동양 최대'니 '동양 최고' 운운한다. 아주 심각하게 잘못된 일제 강점기 언어의 잔재다. 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다. '우리가 동양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본인'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동양東洋'은 '동아시아'가 아니라 '일본'을 지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는 해양문화지만 동아시아는 농경문화다. 그러므로 '바다 양洋'이라는 글자는 동東과 서西의 공통분모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동과 서의 세계를 'East & West'로 부른다. 중국을 위시한 한자 문화권에서는 '방향 방方' 자를 사용해서 '동방'과 '서방'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동아시아'를 '동양'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오로지 한국과 일본뿐이다. 


'동양'은 16세기 명나라 때 중국인이 만든 한자 단어다. 서쪽의 아주아주 먼바다를 넘어서 찾아온 선교사들 때문에 '서양'이라는 단어가 생기면서 덩달아 만들어진 단어다. 동쪽의 아주아주 먼바다, 또는 그곳에서 사는 변방의 미개인이라는 뉘앙스가 숨어있다. 지금도 중국어로 '東洋'은 '일본'을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동쪽 먼바다에 위치한 문화의 변방 국가로 지내오며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에 서구의 신학문을 들여올 때, 'East'라는 단어를 '동방'이 아니라 '동양'으로 번역했다. 앞으로는 일제 군국주의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재편성하겠다는 침략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그 첫 번째 목표는 '조선 침략'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알다시피 그들은 그 목표를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팩트다. '동양'이라는 말에는 그런 함정이 숨어있다. 


언어는 무의식 중에 인간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동양인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할수록,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 군국주의의 패러다임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제는 이 함정에서 탈출해야 한다. '동양'이 아니라 '동방'이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습관이 안 되어 조금 어색하더라도 '동방' · '동방 세계' · '동아시아'와 같은 단어로 대체해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탈출해야 하는 또 다른 언어의 함정이 있다. '인문학'과 '동양학'의 함정이다. 


'인문학'의 함정이란 무엇일까?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은 '신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서양학'을 들여왔다. 서양학은 자연과학 · 사회과학 · 인문학으로 구분된다. 이때 일제가 번역 소개한 서양식 생활 용어나 자연과학 · 사회과학 관련 학술 용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문학' 관련 용어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들이 번역한 문학 · 철학 · 종교 등 인문 분야 대부분 어휘에는 모두 교묘한 함정이 숨어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의 패러다임'이다. 누구의 생각일까? 서양인의 생각이다. '인문학'은 우리 것이 아니라, 일제가 들여온 '서양학'이기 때문이다. '동양학'은 누구의 생각일까? 동아시아인의 생각일까? 아니다. '동양'이라는 말이 일제의 야욕이 숨겨진 단어이니만큼 당연히 일본인의 생각이다. 서양인의 생각인 '인문학'을 바탕으로 그 위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생각을 덧씌운 것이다. 


'동양학'이란 동아시아 정복을 위해 동아시아의 문학 · 역사 · 철학 등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뜯어고친 것이다. 그 첫 번째 목표는 '조선'이었다. '동양학'이란 단어에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소멸시키고 그 대신 일제 군국주의의 사고방식을 주입하기 위한 교묘한 함정이 숨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제는 우리 전통의 '학문'을 제도권 교육에서 완전히 말살해 버리고 그 위치에 '동양학'을 밀어 넣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식민지 학문의 여파는 8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인문학'이나 '동양학'은 '학문'이 아니다. 그 성격과 방법론이 '학문'과는 크게 다르다.

'인문학'은 '서양학'에 속한다. '서구의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이다. 

'동양학'은 '서구의 인문학' 위에 일본 군국주의 패러다임을 덧붙인 것이다. 

'학문'은 우리의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통 패러다임'에 기반하여 발전한 것이다. 



동과 서의 패러다임은 거의 정 반대에 가깝다. 그 패러다임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당시의 자연환경이 거의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동과 서의 패러다임의 특성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각각 '중국 대륙'과 '지중해'라는 상반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탄생한 '일원론'과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이원론'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전한 분리의 패러다임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둘' 이상으로 분리하여 따로따로 생각한다. '서양학'은 '이원론'에 기반하여 신과 우주와 대자연과 인간 세상을 분리하여 바라본다. 그리고 '신 God'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모종의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로 인식한다. '서양학'을 영어로 'science'라고 하는 이유다. 서양인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끝없이 분류하고 분석하여 정복하려 한다. 그 결과로 얻어낸 지식과 정보를 중시하는 것이 바로 '서양학'과 '인문학'이다. 


동아시아의 '학문'은 모든 것을 '하나'로 결합하여 전체를 바라보고자 하는 일원론, 즉 결합의 패러다임에 근거한 공부다. 사람들은 흔히 '학문'의 한자를 '學文'으로 착각한다. 즉 '머리로 글을 배우는 단순 두뇌 활동'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은 '學問'이다. '늘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구하는 마음가짐'이라는 뜻이다. 지혜와 정성을 배우고, 배운 것을 온몸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학문'이다. 지식을 얻는 것은 그 과정에서 얻는 부수적인 효과다. '학문'과 '서양학/인문학'은 이렇게 다르다.


AI의 시대가 도래했다. 궁금한 지식과 정보는 '네이버'에 물어보면 바로바로 답해준다. 사법고시 따위를 본답시고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죽자 사자 머리로 암기하는 그런 공부의 시대는 지나갔다. 어차피 이 시대에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1분 1초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운용'이다. 쏟아져 나오는 그 지식과 정보를 올바로 운용할 줄 아는 마음가짐과 지혜, 그리고 제대로 사용하는 실천력이 중요한 시대다. 대한민국 사회의 '공부'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 표지 사진 ]

◎ 제주 조촌 동복 분교 학생들의 북춤 공연. 2014년 11월 22일.


2014년 늦은 가을. 한국 국립국제교육원 주최로 세계 각국의 유학 관계자들이 한국으로 연수를 왔다. 필자는 당시 연수 프로그램 전체를 기획하고 주관하였는데, 제주산업대 심규호 교수의 도움으로 제주 조촌 동복 분교에서의 공연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드넓은 잔디밭에서 전교생 12명 전원이 참가하여 북춤을 추자, 유학 관계자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이게 바로 우리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한국의 교육! 정말 원더풀입니다." 우리의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가장 우리의 것, 우리의 학문으로 교육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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