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문학'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문학'이 아니다. 전자의 '문학'은 동아시아 전통 '학문'에서의 '문학 文學'이고, 후자는 일본 학자가 '서양 인문학'의 'literature'를 번역한 단어다.
③ 이 책은 동아시아 '문학 文學'의 입장에서 '문학 literature'과 '철학' · '종교'와 같은 서양 인문학 각 분야를 톺아보며, 그 문제점과 동과 서의 인식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다만 '역사'는 논외로 하였다. 그 인식의 차이가 다른 분야만큼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 1 ] '문학 文學'으로 '문학 literature' 톺아보기
'문학 文學'과 '문학 literature'은 동일한 것 같지만 사실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첫째, '서양학'은 분리 패러다임의 산물이다. 모든 것을 분리하고 영역 field을 나눈다. '인문학'은 서양학의 하위 영역이고, '문학 literature'은 다시 그 인문학의 하위 영역이다. 그 대상은 '문자 litterature'라는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학문'은 결합 패러다임의 산물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로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서양학이 영역론領域論이라면 '학문'은 일종의 방법론이다. 따라서 '문학 文學'은 영역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자 litterature' 뿐만 아니라 '소리'나 '동작' 같은 것도 모두 포함한다.
동아시아의 전통 예술론에 의하면 시詩 · 서書 · 화畵가 하나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말한다. (출전: 소동파,《東坡題跋 · 書摩詰藍田煙雨圖》) 또 다른 측면으로는 시詩 · 악樂 · 무舞도 하나다. 음악이나 경극京劇과 같은 종합 예술도 '문학 文學'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음악/소리'가 '문학'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혹시 어리둥절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동아시아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인정받는 《시경詩經》은 당시의 유행가 가사 모음집인 소리텍스트였다. 공자孔子는 《시경》을 문자텍스트로 편찬했지만 일반인들은 소리로 접했기 때문이다. 종이 발명(A.D. 105) 이전에는 문자텍스트의 제작이 매우 힘들었다. 사실 그 이후에도 16세기에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비슷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한자라는 난해한 문자는 일반인의 시각적 접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텍스트의 내용을 청각으로 전해 듣고 전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문학 文學'은 분명한 목적성을 지닌다. 동아시아 '문학 文學'의 출발은 공자孔子다. 그의 문학관은 분명했다. '대동사회大同社會', 즉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신문학'은 분명한 목적성을 가진 식민 문학이었다. 첫째는 삶의 가치와 의미가 엿보이지 않는 데카당스한 언어로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소극적이고 나약하게 만들자는 것. 둘째는 '대일본제국'의 전사戰士가 되어 '용맹하게' 참전하여 싸우자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서양 인문학의 '문학 literature'은 다분히 관념적이다.
셋째, '문학 文學'은 '영역론'이 아니라 일종의 '방법론'이다. '온유돈후溫柔敦厚'의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한다. '온유'는 형식의 부드러움, '돈후'는 내용의 깊이를 말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면 먼저 달콤한 초콜릿처럼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감동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영역은 상관없다. 정치 · 경제 · 수학 · 물리... 어떤 영역이든지 상관없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성과 감동적인 내용으로 쉽고 재미있게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문학 文學'이라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문학이 딱딱하고 재미없다고 싫어한다. 그 문학은 문자텍스트만 보면서 이론과 분석을 위주로 하는 서양학의 '문학 literature'이다. 그에 반해, 동아시아의 '문학 文學'은 음악이나 미술도 포함되는 종합 예술 성격이다. 그림텍스트가 포함된 문자텍스트를 보면서 직접 낭송도 해본다. 멀티텍스트로 감상을 위주로 한다. 이런 '문학 文學'은 접하면 접할수록 '나'의 정신세계가 싱그럽게 업데이트된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면 우선 '나' 자신의 삶부터 아름다워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 2 ] '문학 文學'으로 '철학' 톺아보기
( 1 ) '학문'에는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文 · 사史 · 철哲은 하나"라는 말이 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의 경계는 엄격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이겠다. 이 말은 일견 동아시아의 일원론 패러다임에서 나온 듯이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이 말에는 일제 군국주의의 패러다임이 숨어있다. 모든 것에 영역의 경계가 불분명한 동아시아의 일원론 패러다임에서는 '문학 文學'과 '역사'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다. 맡은 역할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철학'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학문에는 아예 '철학'이라는 단어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학'이라는 말은 니시 아마네西周라는 일본학자가 서양학의 'philosophy'를 번역할 때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낸 말이다. 단어의 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 보자면 '밝을 철哲, 배울 학學', '밝고 현명한 학문'이라는 뜻. 그렇다면 다른 학문은 어둡고 아둔하다는 뜻이 아닌가. 무엇을 깔보고 비하한 것일까? 자신들이 늘 열등감을 느껴왔던 동아시아 전통의 '학문'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동시에 '서양학'이라는 신학문을 우월한 위치로 자리매김하여 차제에 동아시아 학술계의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욕마저 엿보인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공부하는 것일까? 다른 분야와는 달리, '철학'은 그 이름 만으로는 무엇을 공부하겠다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철학자들이 정의를 내리는 '철학'의 개념은 들을수록 골치 아프다. 쉽게 말해보자. '철학'은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논리와 분석으로 모든 것을 끝없이 따지고 파헤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철학'을 전공한다는 말은 '생각하는 것'을 전공한다는 뜻이 된다. 아니, 그렇다면 다른 학문 분야는 '생각하는 과정'이 없단 말인가? 모든 것을 하나로 연계하여 생각하는 동아시아의 결합 패러다임으로서는 인간에게서 '생각'을 따로 분리해 낸다는 그 발상 자체가 너무 신기하다. ‘philosophy'는 서구의 분리 패러다임 중에서도 가장 분리적이며, 동아시아의 결합 패러다임과는 가장 상반된 개념의 단어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학문에는 아예 '철학'이라는 단어나 그와 유사한 개념이 없었다. 동아시아의 '학문'은 '생각'을 따로 분리해서 '논리와 분석'의 방법으로 따지며 시작하는 공부 방식이 아닌 것이다.
( 2 ) '철학' 대신 '문학'의 방법으로 공부하기
‘philosophy'와 '문학 文學'은 각각 '서양학'과 '동아시아 전통 학문'의 기본이자 기초다. 하지만 그 방법론은 완전히 다르다. 분리의 패러다임인 ‘철학 philosophy'은 딱딱하고 어렵다. 논리와 분석을 강요하는 이성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좌뇌를 풀가동해야 한다. 수학 공부처럼 개념 정의부터 먼저 내리고 나머지는 그 틀에 끼워 맞추는 연역법의 공부 방식이자 감성적인 우뇌 활동을 억누르는 삭막한 교육 방법이다.
반대로 결합의 패러다임인 '문학 文學'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온유돈후'의 귀납 방법론, 즉 감상을 위주로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접하면 접할수록 스트레스가 풀리고 정서가 안정된다. 활발한 우뇌 활동을 통해 학습자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준 상태에서 조금씩 그 분야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논리와 분석의 힘은 그 결과물이 되어 저절로 따라온다. 어떤 교육 방법이 더 바람직할까?
학문은 우리 삶에 그대로 연계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철학으로 인문학 공부하기'가 우리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우뇌형 기능을 강조하는 감성 교육으로 사회 구조를 바꿔보는 건 어떨까.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싱그럽고 풍요로운 감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우뇌형 교육으로 사회 구조를 바꿔보자.
[ 3 ] '문학 文學'으로 '종교' 톺아보기
( 1 ) '종교宗敎'와 'religion'의 차이
'종교'는 '이념 ideology'만큼 심각한 갈등과 분쟁의 요인이다. 한국 사회의 종교 갈등은 주로 불교와 기독교, 다른 말로 한다면 일원론과 이원론의 대립인 것 같다. '종교'는 한 마디로 '신神을 믿는 일'이다. 기독교로 친다면 '하나님을 믿는 일'이다. 이때의 '종교'는 'religion'을 번역한 단어다. 신과 우주/대자연/인간을 따로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는 서구 이원론의 산물이다.
그에 비해 동아시아 인지 체계에서는 신과 우주/대자연/인간을 하나의 결합된 존재로 인식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東學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나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이 대표적이다. 동아시아의 '종교'는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이었다는 이야기.
서구의 'religion'은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등의 일본인에 의해서 동아시아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그러나 '종교'는 일본인이 창조한 신조어가 아니라 당나라 때부터 존재했던 단어다. 서역의 승려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어휘다.
그는 이 경전에 등장하는 '으뜸 되는 최고의 진리'라는 뜻의 '싯단타 siddhānta'라는 어휘를 '종취宗趣'로 번역하였다. 현상세계의 일반적인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이 세계를 깨달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증自證'이다. 뼈저린 삶의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또 하나는 '데샤나 deśanā', 즉 '특별한 언어言說'를 통해 깨닫게 하는 교육 방법이다. 그것을 '가르침의 방법 敎法'으로 삼으라 한다.
'종취宗趣'는 '언설言說'을 '교법敎法'으로 삼아라! 여기서 '종교宗敎'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으뜸 되는 진리의 세계는 특별한 언어로 가르쳐라!' 그게 '종교'의 원래 의미였던 것이다.
( 2 ) '문학 文學'으로 '종교' 믿기
여기서 '특별한 언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문학'이다. '문학 literature'이 아니라, '문학 文學'이다. 으뜸 되는 진리의 세계는 '문학 文學'으로 가르치고 전도하라! 그게 '종교'의 뜻이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종교'가 바로 곧 '문학 文學'이요, '문학 文學'이 바로 곧 '종교'였다. '종교'는 '절대자'의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게, 불교 안에서 가장 유용한 교육과 전도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어 오던 단어였던 것이다.
그 후 전통적으로 불교의 범주 안에서 사용되던 '종교'라는 용어는, 일제의 잘못된 번역으로 말미암아 '종교'의 범주 속에 불교가 포함되고 말았다. 주객이 전도된 웃지 못할 난센스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religion'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던 유교와 불교를 굳이 'religion'의 개념 안으로 끌어들인 후, 기독교와 정면 대립시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종교'를 일원론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우리나라는 오늘날에도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종교'의 자리를 원 위치로 돌려주어야 한다. '신神을 믿는 일'로 인식하게 된 그 개념을 돌려놓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으뜸 되는 진리의 세계를 '문학 文學'으로 가르치고 전도하자는 이야기다. '문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타인에게 진한 감동을 던져주는 초콜릿 같은 것. 그런 온유돈후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전달하려면, 먼저 나 자신의 내면세계가 싱그러운 영혼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때문에 '문학'의 생활은 그 자체가 정진이요 기도의 삶이다.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종교란, 문학이란, 이로理路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방법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종교'란 머리로 교리를 믿는 '인지 체계'가 아니라, 행동으로 타인에게 감동을 선물하는 '실천 체계'가 되어야 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현란한 글재주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독자에게 '감동'이라는 '초콜릿'을 선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콜릿 문학이 바로 곧 종교이며, 종교가 바로 곧 문학의 초콜릿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오늘날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실체는 '학문'이 아니다. 일제는 강점기 당시 '서양학'을 '신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들여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신학문'이라는 이름에서 슬그머니 '신' 자를 빼고 그냥 '학문'이라고 불렀다. 전통 '학문'을 제도권에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3년간의 미국 신탁통치 기간을 거치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조건적인 숭미崇美 사대주의 풍조 속에 ‘신학문’ 일변도의 교육을 시행해 왔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분리의 패러다임이 만연해있다. 좌익 우익의 이분법 논리 속에 남과 북이 대치해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동서 간의 망국적 지역감정과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다. 시대정신은 사라지고 끝없는 물질에 대한 욕망과 극단적인 이기주의만이 우리 사회에 가득 차 있다.
교육의 현실을 보자. 메이지유신 당시의 전근대적인 낡은 식민지 학문에서 탈피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오히려 그 폐단이 심화하고 있다. 중고등학교는 입시 준비를 위한 주입식 교육마저 사설 교육에 떠넘긴 채 거의 교육을 포기해 버린 상황이고, 대학교는 취업을 준비하는 학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대한민국의 헬리콥터 맘들은 '아이들의 출세를 위해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의 자녀만은 속칭 SKY 대학에 진학시켜야만 한다. 아이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권력과 재력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고픈 욕망의 발현이다. 유치원 초등학교부터 심지어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식들을 달달 볶고 지도 교사들에게 갑질을 일삼는다. '경쟁'이라는 이름의 슬픈 교육 현장이다.
교수들은 좁디좁은 전공 영역의 울타리 속에 꼭꼭 숨어, 삶의 질質의 향상을 위한 연구보다는 연구 기금의 확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학술지에 발표되는 상당수의 논문은 학술성이라는 미명하에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로 포장하여, 목적성을 상실한 전공 지식만을 기계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우리나라 학문과 학계의 현실이다. 어찌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정작 서구에서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은 아이로니컬 하게도 가장 첨단을 달려가는 물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 AlbertEinstein(1879~ 1955), 그리고 양자역학과 상보성相補性의 원리를 발표한 보어 Niels Bohr(1885~1962)가 대표적 인물이다.
절대 공간/절대 시간/최소입자와 같이 뉴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모든 주요 개념들이 상대성이론과 양자론量子論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서구인들은 양자와 같은 미시의 세계와 은하계 밖의 거시 세계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하고, 뉴턴의 고전 역학力學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확실히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science - 서양학'이 본질적 한계에 부딪쳤다는 뜻이다.
서구의 물리학자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철학의 부재였다. 고심하던 그들은 음양의 조화에 입각한 고대 동방 세계의 우주관에서 계시를 얻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보어의 양자역학의 원리는 사실상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예컨대 영국의 과학자 니덤 Joseph Needham(1900~1995)은 도가道家 사상과 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의 유사성을 극력 주장하였고(니덤,《중국의 과학과 서양》 38쪽), 현대의 가장 저명한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은 양자역학이 지금까지 해놓은 것은 동아시아 사상의 음양 · 태극 ·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실토한 바 있다.(이성환 · 김기현, 《주역의 과학과 도》27~ 54쪽)
보어(좌측 첫 번째)와 아인슈타인. 우측은 보어 연구소의 문장. 태극도가 동아시아 패러다임에서 계시를 얻었음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서구의 물리학자들은 동아시아의 전통 패러다임에서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카오스 이론, 불확정성의 원리, 프랙털 fractal 원리와 디지털 이론 등이 속속 제시되었다. 물리학자들은 뉴턴의 고전 역학을 근거로 정립한 모든 학술 분야의 이론을 양자역학적 관점으로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기초과학인 물리 화학 생물은 물론이요, 응용과학인 공학과 의학에서도 양자역학적인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의 '학문'에 근거한 '새로운 science'가 탄생한 것이다.
과학자들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서구의 지성인들이 동아시아의 불교에 심취하고 있다. 불교를 삶과 죽음, 미시와 거시의 세계에 대해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결합적 학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서구 대학의 인식도 달라졌다. 학문의 유기적 연구와 결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공 학과 간의 통폐합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 축적 위주의 서구 교육은 어느새 판단력 · 통찰력 · 비판적 사고 · 창의력 등의 '지혜'를 배양하는 교육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서양 인문학의 '문학 literature'도 동아시아 '문학 文學'처럼 영역을 없애기 시작했다. 2016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누구인지 아시는가? 밥 딜런 Bob Dylan이라는 미국의 대중가수다. 우리나라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정태춘이라는 음유시인이 있다. BTS의 노래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노래 가사에 담긴 문학성이 주는 감동 때문이다. 모두 '문학 literature'과 음악의 경계가 사라진 대표적 사례다.
이런 현상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서양학'이 기존의 분리 패러다임에서 결합 패러다임으로 전환했다는 의미다. 서구인들이 현상 세계의 절대성을 고집하던 'science'에서 탈피하여, 상대성과 상보성을 인정하며 모든 것을 유기적 전체적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동아시아의 '학문'적 경향을 추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학계도 전근대적인 'science'에서 탈피하여 '학문學問'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지식과 정보가 중요한 시대는 지났다. 사법고시나 공무원시험 따위에서 물어보는 지식은 더 이상 암기할 필요가 없다. 궁금하면 검색하면 되는 시대다. 중요한 것은 '학문'이 강조하는 지혜와 정성과 실천이다.
어언 해방 80년이 되어간다. 이제라도 '인문학'과 '동양학'의 함정에서 벗어나서 현대 한국 사회에 어울리는 연구와 교육 방법을 새롭게 모색해야 할 때다. 우리 것으로 학문을 해야 한다. 전통 학문의 싱그러운 지혜의 세계를 복원하여, 민족의 얼과 정신을 온전하게 회복해야 한다.
< 끝 >
[ 표지 사진 ]
◎ <제주두루나눔(지도교수: 심규호)>의 제주 입춘굿 탈놀이. 제주 조촌 동복 분교. 2014년 11월 22일.
2014년 늦은 가을. 한국 국립국제교육원 주최로 세계 각국의 유학 관계자들이 한국으로 연수를 왔다. 필자는 당시 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주관하였는데, 당시 제주산업대 심규호 교수의 도움으로 제주 조촌 동복 분교를 방문 참관하였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드넓은 잔디밭에서 전교생 12명 전원이 참가하여 북춤을 추고 난 후, <제주두루나눔>의 입춘굿 탈놀이가 이어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유학 관계자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이게 바로 우리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한국의 문화! 정말 원더풀입니다." 제주에서 70년을 살았다는 토박이 버스 기사님도 말한다. "평생 이런 감동은 처음입니다. 우리 제주에 이런 멋진 문화, 멋진 공연이 있다니. 다음 주에 외국 관광단을 받는데 이거 구경시켜 줄 수는 없나요?"
우리의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문화도 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것으로 학문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