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민족 트라우마 극복법
중국 역사를 통틀어 중국인에게 가장 치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사건이 있겠지만 중국인이라면 아마도 십중팔구 송나라 때 '정강의 변靖康之變'을 꼽을 것이다.
송宋나라(960~1279)는 전체적으로 보아 상업이 발전하고 도시문화가 번영해서 당시 세계적으로 상당히 부유한 나라였다. 문화와 예술은 더할 나위 없이 흥성했다. 딱 한 가지, 지나치게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억압하여 군사력이 약해서 늘 외침外侵에 시달려야 했다.
▶ 송나라의 경제력: 영국의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 Angus Maddison(1926~2010)에 의하면, 송나라 3대 황제 진종眞宗 당시의 GDP는 전 세계의 22.7%를 점했을 정도였다.
▶ 송나라의 군사력: 송나라는 당나라가 번진藩鎭(지방 군벌) 세력을 억제하지 못해 멸망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중앙 정부의 문관이 지방 군대의 수장으로 2, 3년 동안 파견 나가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천재적인 예술가 황제인 휘종徽宗 조길趙佶이 등장하면서 국정을 돌보지 않자 나라는 완전히 거덜 나고 만다. 신나게 즐기며 노시느라고 국력을 소진한 조길은 여진족이 세운 신흥 강국 금金나라가 침공하자... 아유 골치 아파 난 몰랑! 아들인 조환趙桓에게 양위하고 타조처럼 머리를 박고 뒤로 숨어버렸다.
지난번 <천년의 이별 노래>에서 주방언周邦彦의 39금 노래를 소개하겠노라 예고했던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바로 그 휘종 조길 되시겠다. 정말 39금으로 글을 올릴 것인가 19금 15금 정도로 낮출 것인가, 자체 심의에 걸려 차일피일 글을 올릴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차에 써글놈이 쿠데타를 터뜨리는 바람에 그만 날이 새고 말았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천상 그 이야기는 장기적으로 올릴 찬스를 엿보기로 하고 지금은 우선 현 시국과 관련된 그 훗날의 이야기를 먼저 다루어본다.
그러나 회피한다고 현실의 위기가 해소되겠는가? 정강靖康 원년(1126)에 금나라는 수도 변경汴京(오늘날의 개봉開封)을 함락하고 쑥대밭을 만든 다음, 두 명의 황제(휘종 조길과 흠종欽宗 조환)를 위시한 모든 황족 비빈들과 수많은 금은보화를 약탈하여 연경燕京(오늘날의 북경)으로 끌고 갔다.
(상) 휘종과 흠종, 두 황제와 황족 비빈들을 포로로 잡아 연경으로 끌고가는 금나라 군대의 행렬.
(하) 중인환시 리에 겁간을 당하는 송나라의 황녀와 비빈들.
이것이 바로 후세의 중국인들이 두고두고 치를 떠는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니, 이리하여 송나라는 9대 황제 흠종 조환에 이르러 멸망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때 천우신조로 강남에 있었던 조길의 아홉 번째 아들인 조구趙構가 화를 피해 건강建康(오늘날의 남경南京)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송나라의 명맥을 이으니, 후세 학자들은 북쪽 변경에 도읍을 두었던 예전의 송나라를 북송北宋, 남쪽 임안으로 도읍지를 옮긴 송나라를 南宋이라 하였다.
한편, 연경에 끌려간 조길과 조환은 궁궐 입구에서부터 무릎을 꿇고 기어 들어가 금나라 태종 오걸매吳乞買(우키마이)에게 백 번 절을 하며 잘못을 빌었다.
너희 같은 어리석은 것들이 어찌 감히 황제의 이름을 더럽혔단 말이냐! 여봐라, 이자들을 평민 신분으로 강등하고, 그 어리석음을 기념하여 조길은 혼덕공昏德公으로, 조환은 중혼후重昏侯로 부르게 하라!
그리고 혼덕공 조길은 다시 삐그덕거리는 수레에 실려 삼천 리나 떨어진 만주 오국성五國城으로 끌려갔다가 황량한 벌판의 낡은 초가집에서 한 많은 최후를 마쳤다. 그 아들 조환의 죽음은 더욱 비참했다. 역시 포로로 잡혀온 옛날 요나라 황제 야율연희耶律延禧와 강제로 마구馬毬 시합에 끌려나갔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말발굽에 차여 죽고 말았다. 허나 이것은 모두 훗날의 이야기다.
중국 절강성 항주 서호 호숫가에 가면 악왕묘 岳王廟라는 곳이 있다. '중국의 이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는 악비岳飛(1103~1142)의 사당(廟)이다. 무덤(墓)도 그 안에 있다.
악비는 남송마저 멸망시키겠다고 쳐내려 오던 금나라 군사들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저들의 전진을 멈춰 세운 후, 백전백승하여 도읍지인 변경(개봉)을 탈환하기 일보 직전 상황까지 몰고 갔던 청년 장군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그가 남긴 <만강홍ㆍ성난 머리카락 滿江紅(怒髮衝冠)> 감상을 통해 알아보자. 오늘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악비의 무덤 앞에는 아주 기이한 모습의 궤상跪像(무릎 꿇은 모습의 동상)이 있다. 누구일까?
오른쪽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진회秦檜(1090~1155) 되시겠다. 왼쪽은 그의 아내 왕씨王氏다.
뒤의 벽에는 "문명인답게 관람하시오. 가래침을 뱉지 마시오 文明游覽, 請勿吐痰"라고 쓰여있다. 예전에는 무수하게 많은 관람객들이 엄청나게 가래침을 뱉은 모양이다. 요새도 오히려 쓰인 그 말에 더욱 충동을 느낀 사람들이 몰래 가래침을 뱉고 간다. 키가 큰 관객들은 사정없이 따귀를 때리기도 한다. 따귀는 때려도 된다.
진회는 또 누구인가? 왜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따귀와 가래침을 얻어맞고 있을까?
진회는 휘종 당시에 금나라와 일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던 주전파主戰派로 원래는 상당히 유능했던 신하였다. 그래서 금나라 태자 올술은 주화파主和派였던 장방창張邦昌을 괴뢰 황제로 옹립하고, 진회는 두 황제와 함께 북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문제는 그가 끌려간 지 4년 후, 그러니까 1130년에 돌연 남쪽 송나라 왕조에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진회는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면서 무용담을 늘어놓더니만, 과거의 입장과는 달리 금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다. 그의 등장으로 조정은 다시 주전파와 주화파로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그 무렵의 전황을 살펴보자. 금나라 태자 올술은 새로 송나라 황제에 오른 고종高宗 조구趙構를 잡기 위해서 남정南征에 나섰다. 대경실색한 조구는 남으로 남으로 하염없이 도망쳤다.
그러나 올술은 계속 추격할 수가 없었다. 새로이 등장한 송나라의 청년 장군 악비의 군사가 연전연승하여 올술의 후방 보급로가 크게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후퇴하던 올술은 양자강 금산金山 부근의 작은 포구 황천탕黃天蕩에서 송나라 한세충韓世忠의 수군에게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건강建康(남경)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건강에 주둔해 있던 10만 군사와 함께 퇴각하다가 이번에는 매복해 있던 악비 장군의 3천 군사에게 몰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올술은 구사일생으로 북으로 탈출하고 말았다.
남송의 새로운 도읍지가 된 건강을 수복한 악비는 곧이어 옛 도읍지인 변경(개봉)을 향하여 북진하였다. 변경이 코앞인 주선진朱仙鎭에 이르렀을 때였다. 악비는 갑작스레 날라든 황제의 명을 받고 대경실색, 장탄식을 금치 못했다. 고종 조구의 북진 금지령이었다.
고종 조구는 대체 왜 연전연승하던 악비의 군대를 멈춰 세운 것일까? 후세 학자들은 그가 진회의 꼬임에 넘어간 것으로 짐작한다.
폐하, 지금 악비는 기세등등하여 북으로 진군하면서 공공연하게 뭐라고 떠드는지 아십니까? 만주까지 쳐들어가서 두 분 황제 폐하를 모셔오겠다고 하옵니다. 폐하, 만약 그 두 분 황제 폐하께서 돌아와서 복위하신다면 폐하께서는 어찌 되시겠나이까? 잘해야 폐위고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목숨마저 위태롭지 않겠나이까?
자기 멋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고종 조구는 대경실색, 진회의 말에 간담이 서늘해져 악비에게 북진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조구는 건강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한참 남쪽에 위치한 임안臨安(오늘날의 항주)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고 눌러앉는다.(1138)
그리고 마침내 소흥紹興에서 금나라와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게 된다.(1141) 빼앗긴 땅을 포기하고 금나라를 형님 나라로 모시면서 매년 엄청난 조공을 바치겠노라는 맹세였다. 진회는 재상의 자리에 올라 금나라와의 화친을 적극 주도했다.
1142년 1월, 고종은 진회 장준張俊 만사설万俟卨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악비의 병권을 회수하고 그를 임안부(항주)로 불러들인다. 악비는 아들 악운岳雲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감옥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후세의 모든 중국인들이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있는 악비의 의문사, 그 범인은 누구일까? 증거는 없어도 사람들은 한결 같이 진회가 주범이요, 그의 아내 왕씨와 장준, 만사설을 공범으로 단정하고 있다.
악비를 모해한 또 다른 공범, 장준과 만사설의 궤상. 역시 항주 악왕묘 악비의 무덤 앞에 있다.
악비는 고종 조구의 아들 효종 조신趙昚 때 복권되었다. 무목武穆 충무忠武로 추존되고 그 시신을 수습하여 오늘날 악왕묘 자리에 무덤을 만든 후, 악왕鄂王에 봉해졌다. 역적 진회 부부와 장준 만사설의 궤상은 바로 그때 만든 것이다.
이민족에게 국토의 핵심 지역을 빼앗긴 후, 이를 수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마저 날려버리고 스스로 굴욕의 길을 선택한 이 사건은, 후세 중국 민족의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트라우마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 궤상이었다. 이곳 항주 악왕묘에 민족을 배반한 매국노 역적들의 궤상이 세워지자, 전국적으로 수만 개의 그들 역적 궤상이 만들어졌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궤상은 모두 7군데라고 한다.
(상) 주선진의 악비 사당에 있는 매국노 역적들의 궤상. (하) 하남성 안양安陽 악비 사당에 있는 역적들의 궤상. 옆에 채찍이 있다. 관람객들은 분이 풀릴 때까지 그들을 채찍질할 수 있다. 대신 가래침은 뱉지 못한다.
항주 악왕묘의 역적 궤상은 역사적으로 모두 10번이나 다시 만들어졌다. 분노에 찬 관람객들이 하도 세게 두들겨 패서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신종神宗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절강성을 순무 하던 어사 왕여훈王汝訓이라는 자가 이곳에 와서 궤상을 살펴보니 진회의 처 왕씨가 자신과 동성동본 아닌가. 왕여훈은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기고 야밤에 몰래 왕씨의 궤상을 서호에 던져버렸다.
날이 밝자 난리가 났다. 분노에 찬 민중들의 요구로 관아에서는 즉각 수사에 착수하였다. 대경실색한 왕여훈은 엄마야 날 살려라 꽁무니를 뺐고, 지방 유지 한 명이 즉시 거금을 내놓아 왕씨의 새로운 궤상을 만들어놓자 분노한 민중들이 몰려와 그날로 다시 궤상을 작살내어 버렸다. 중국인의 트라우마는 그 정도로 컸다.
그런 식으로 궤상을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들고 또 부수면서 중국인들은 민족의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북송의 휘종 황제부터 남송의 악비에 이르는 이 '치욕과 혼란의 시대'는 후세 중국 문학에서 가장 많이 콘텐츠 소재로 다룬 시기이기도 하다. 《수호지》와 《금병매》가 그 좋은 사례다.
간신히 통과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소오생은 윤석열이 쿠데타를 일으킨 12월 3일부터 감기 몸살에 걸렸다. 12월 6일은 예정했던 건강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위내시경 검사도 받았는데 뜻밖에 위궤양 판정을 받았다. 사진을 보니 날카로운 물질에 찔린 것처럼 보이는 상처가 나 있었다. 최근에 생긴 거란다. 열흘 정도 약을 먹으면 괜찮을 거란다.
위장은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었다. 술담배도 안 하고 이상한 음식을 먹은 적도 전혀 없다. 요새 사람들이 말하는 '내란성內亂性 위궤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이 노래했던 '애가 끊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친한 시인 한 분이 물어보셨다.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었으니 몸 컨디션도 조금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신다. 체질이 원래 반응이 느린 형광등 스타일이어서인지 유감스럽게도 위궤양 증세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느낌이다. 아프지는 않지만 영 더부룩하다. 마치 시국의 상황처럼.
탄핵 소추안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제 겨우 시작인 느낌.
우선 가결표가 겨우 204표에 불과하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 투표에 참여한다길래 최소 240표는 나오리라 생각했던 것이 너무나 순진했다. 박근혜 탄핵 때도 가결표가 234표였는데, 내란을 일으킨 최악의 범죄를 옹호하는 자들이 '집권당' 이라니 정말 경악스럽다.
미국 측에서 흘러나오는 정보에 의하면, 자칫 광주 5.18보다 훨씬 더 심한 극악무도한 유혈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겠다는 심증이 굳어진다. 정보사 출신인 소오생은 HID가 서울 모처에서 대기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 북한 후방에서 소요 작전을 벌여야 할 특수 요원들이 왜 서울에서 대기했다는 말인가. 전두환보다도 히틀러보다도 더 잔인무도한 민족의 반역자다.
그런데...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저 미치광이 부부와 재빨리 손절했어야 타당한데, '국민의 힘'은 왜 그들을 필사적으로 옹호하고 있을까? 내란 수사권도 없는 검찰은 또 왜 저렇게 필사적으로 덤벼들고 있을까?
저자들은 감히 공공연하게 탄핵의 트라우마를 말하고 있다. 정권을 내놓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혹시 그들 범죄 혐의자 집단들이 공모하여 목하 더욱 커다란 제2의 내란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속이 타들어간다.
우리 국민들이 겪었던 그 잔인한 10.26, 5.18, 12.12 계엄의 트라우마는 한 번도 제대로 치유된 적이 없다. 이 위기를 극복하면 반드시 저런 궤상을 만들어야 한다. 유구한 역사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국민들의 준엄한 채찍을 맞아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바로 설 수 있다.
그런데,
아... 대체 몇 개나 만들어야 한단 말일까!
소오생 살아생전에 그런 날이 올 수는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 후세 예술인들이 소재로 가장 많이 다룰 시대는 필경 지금 이 시대일 것이다.
마침 <퍼스트레이디>라는 다큐가 개봉했다고 한다. 성지 순례의 마음으로 관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