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당晩唐 시인, 두목杜牧의 <산행山行> 감상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이 지났어도
아직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계절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굳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가을 풍광이 참 아름답습니다. 인근의 야산에도, 도심의 가로수와 작은 공원에도, 심지어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도 여기저기 농익은 늦가을의 정취가 하나 가득 펼쳐집니다.
원더풀~! 요즘은 어디를 가도 외국인 관광객들의 탄성 소리가 많이 들리더군요. 케데헌 때문에 찾아왔으려나,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데... 그 표정을 보아하니, 대자연의 캔버스에 황홀한 오색 물감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 대한민국 가을의 매력에 흠뻑 빠진 것 같더군요.
우리나라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에도 땅덩어리가 워낙 넓디넓다 보니, 단풍으로 이름난 명소들이 꽤 있답니다. 그중 몇 군데만 소개해드릴게요? ^^
(1) 북경 향산香山 : 북경 시내 서북쪽에 위치. 매년 '홍엽절紅葉節'이라는 단풍 축제가 열림.
(2) 하남성 숭산嵩山 : 중원 최고의 단풍. 소림사는 노오란 은행나무 풍광이 빼어나다.
(3) 강서성 여산廬山 : 중국 최대의 담수호수인 파양호 서쪽에 위치. 폭포로 유명하다.
(4) 안휘성 황산黃山 : 중국 산수화의 모델
(이상 11장의 사진 출처: 중국 포털 사이트 바이두)
당연히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가을 절경을 노래했겠죠? 그 수많은 시가 중에서 단연 첫 손을 꼽는 작품이 있습니다. 만당 시대의 시인, 두목杜牧(803~852)이 지은 <산행山行>이라는 7언 절구입니다. 함께 감상해 보실까요?
당나라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인 성당盛唐 시기의 대표 시인으로는 누구나 이두李杜, 즉 이백과 두보를 꼽습니다. 여러분도 다들 잘 아시죠? ^^* 그런데 당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인 만당 시기에도 이두李杜가 있답니다. 이상은李商隱과 두목입니다. 성당 시기의 이두와 구별하기 위해 '소이두小李杜'라고 호칭하죠.
이상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알아보기로 하고요, 우선 두목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의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세상 사람들은 그를 흔히 '두목지'라고 불렀답니다.
고향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서안). 스물여섯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시인은, 장안의 사교계에서 인기 절정의 아이돌 급 인물이었다네요? 시가와 산문에 능통하고 병법에도 뛰어났다지만... 무엇보다도 훤칠한 외모로 기방 여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했기 때문 아닐까 싶네여. 부러워라. 쩝. ^^;;
자연스럽게 기방 출입을 자주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염정시艶情詩도 많이 써서 '오입쟁이'니 '기생 오래비' 소리를 들으며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건 혹시 여성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못난 남정네들의 비뚤어진 심리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
시인은 522 수의 시를 남겼는데요,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답니다. 첫째는 직접적으로 시국을 비판하고 현실을 염려하는 우국충정의 시. 둘째는 역사적 사실을 빗대어 통치자의 황음무도함을 비판한 시. 일전에 <29.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과일>에서 소개했던 <화청궁을 찾아서 (過華淸宮)>도 그중의 하나죠.
셋째는 짧은 서정시. 주로 쉬운 언어로 7 언시를 많이 썼는데요, 단순한 정서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깊은 상징성과 예술성이 담겨 있어서 후인들의 높은 평가를 받는답니다.
오늘 소개하는 <산행>도 그중의 하나. 단순한 가을 산의 풍취를 즐긴 유람시가 아니라, 시인의 생활 속 정서를 담은 삶의 풍경화이자,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상징한 영사시詠史詩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단풍을 노래한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길이 칭송받는 거겠죠.
그렇다면 어떤 산을 올라가며 지은 작품일까요?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습니다만... 쉰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마흔두 살 때부터 약 4년 간 안휘성 지주池州 태수였다는 점과, 지주 근처에 천하제일의 절경이자 단풍 명소인 황산이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만년에 황산 부근의 산길을 가다가 쓴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이 정도로 하고...
그럼, 시를 직접 읽어보실까요?
遠上寒山石徑斜,
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楓林晚,
霜葉紅於二月花。
( 1 ) 기起 : 외로운 인생길
저멀리 차가운 산
비탈진 돌길을 올라간다
遠上寒山石徑斜
시인의 시는 문을 열자마자 풍경을... 아니, 고독을 펼칩니다.
시인의 시는 늘 멀리서 시작합니다. 저 멀리 차갑고 비탈진 돌길.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상처받은 한 젊은 지식인이,
홀로 차가운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이미지가 겹쳐 보입니다.
(이상 2장 : AI 생성 이미지)
( 2 ) 승承 : 그곳에도 따스함이
흰 구름 피어나는 그곳에
자리 잡은 민가 하나
白雲生處有人家
먼 곳의 차갑고 비탈진 산길을 오르던 시인은, 문득 구름 사이에 숨어 있는 '인간의 기척'을 발견합니다. 외롭고 쓸쓸한 인생길에서 발견해 낸 한 점의 따스함이랄까요? 부패한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시인의 마음이 담긴 장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3 ) 전轉 : 멍 때리기? 사랑 나누기?
수레를 멈추고 앉아서
만추의 단풍을 즐겨본다
停車坐愛楓林晚
풍림정거楓林停車, 가을 단풍 앞에서 수레를 멈춘다는 유명한 말이 여기서 나왔다죠? 정치적 좌절, 외로운 지방관 생활... 울긋불긋 물감 뿌린 대자연의 수채화 앞에서 그 모든 고민과 번뇌를 멈추고 내려놓는 순간입니다. 평범한 언어인데도 참 기막히게 멋지죠? 풍림정거는 그래서 수많은 후세 가을 산수화의 화제畵題, 그림 제목이 되었답니다.
좌애坐愛라는 표현도 기가 막히네요. 직역하자면 "앉아서 즐긴다"라는 뜻. 의역하면 "앉아 있으니 좋더라", 나아가 "앉아서 멍을 때린다"라는 말도 되지요.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는 망아忘我, 심지어 아예 없어져버리는 무아無我의 심오한 철학적 경지를, 이렇듯 평이하고 친근한 일상 용어로 표현한 것이 참 절묘하지 않나요? 가히 신운神韻이라 할 만합니다.
우스개 소리 하나. 이 구절은 현대에 이르러 특히 유명해졌는데요, 이유는 이 '좌애坐愛[ zuò ài, 쭈오(↘) 아이(↘) ]'라는 단어가 영어의 make love를 의역해서 만든 '做愛'라는 단어의 발음과 완전히 똑같기 때문! 그래서 중국 젊은이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치환해서 음미한다네요. ^^;;
자동차를 멈추고
만추의 단풍 속에 사랑을 나누노라
停車做愛楓林晚
가을 드라이브, 카섹스의 그 경지를 인생 로망으로 여긴다나 어쩐다나.
에구에구 이게 무슨 흰 소리람... ^^;;; 얼른 통과~!
가만있자...
기왕지사 헛소리를 꺼냈으니 특별 뽀너스, 하나 더 쌍으로 흰소리를 해드릴까여? ^^;;
옛날옛적 호랑이가 곰방대 물고 담배를 피던 시절에... 선배가 재직하던 어느 학교에 놀러 갔는데요, 수업을 마치고 나온 선배가 계속 히죽히죽 웃지 뭡니까. 사연을 캐물으니 한참 만에 웃음을 참으면서 실토를 하는데... 중국어 회화 수업 시간에 한 여학생이 선배더러 이랬다네요.
(ㄹ)라오쓰, 워 쭈오(↘) 아이(↘) 니.
老师, 我做爱你。
허걱! 어쩜 좋아! 어디서 그런 요쌍한 말을 배워왔는지... 가만, 설마 하니 그 친구가 알고서 일부러 한 말은 아니었겠져?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제발. 아무튼 그 선배가 미친 듯이 비실비실 웃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군여, 쩝. ^^;;
근데... 그 여학생한테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고쳐주지 않았다네요? 아니, 선생이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여? 다른 곳에서 또 그런 식으로 말하다가 개망신당할 수도 있는데, 올바로 가르쳐주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여? 글벗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급 궁금해집니다. ^^;;;;
참, 사족이지만... '做爱'라는 단어는 '你'라는 목적어를 가질 수 없는 자동사自動辭랍니다. 그러므로 "我做爱你。"는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
이럴 때는 "跟你(너와 함께)"라는 전치사 구句를 사용해서... "我跟你做爱。"라고 해야 합니다. 여기에 화자의 의지가 담긴 조동사 "要(~을 하겠다)'나 희망을 담은 조동사 "想(~을 하고 싶다)"를 넣어서...
我要跟你做爱。 당신이랑 사랑을 나누고야 말겠어! (의지)
我想跟你做爱。 당신이랑 사랑을 나눴으면 좋겠어! (희망)
...라고 해야 올바른 문장이 완성된다는 사실.
이야기 끝! ^^;;;;;
땅, 땅, 땅!
얼른 통과!
( 4 ) 결結 :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한시漢詩는 대체 몇 수나 될까요? 그중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名句는 또 몇 구절이나 될까요? 아무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명한 시구詩句 중에서도 지금 소개하는 이 구절이 단연 엄지 척! 가히 첫 손을 꼽을 수 있다 하니, 소리 높여 천만 번 암송하며 필사하고 또 필사해 보시길.
서리 맞은 단풍잎
이월 달의 봄꽃보다 붉구나
霜葉紅於二月花
상엽/홍어/이월화!
첫째, 문법 공부부터.
여기서 '於'는 비교급 전치사. "A가 B보다 더 ~하다"는 뜻.
A는 霜葉, 서리 맞은 단풍잎.
B는 二月花, 이월에 피는 꽃.
무엇을 비교하고 있죠? '홍紅', '붉음'입니다. 상엽霜葉이 이월화二月花보다 더 붉다!
둘째, 이월화二月花는 어떤 꽃일까요?
이월에 피는 꽃이라면 얼핏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를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2월은 음력이니 양력으로는 3월 말 정도일 터. 그러니 매화는 아닐 것 같습니다.
3월 하순에 피는 붉은색 계열의 봄꽃이라면... 대충 복숭아꽃 살구꽃 정도가 떠오릅니다.
복숭화꽃 살구꽃과 서리 맞은 단풍잎의 '붉은' 분위기를 참고 이미지로 한 번 비교해 볼까요?
(좌상) 제백석, <행화>. (우상) AI로 그린 도화桃花. (하) 서리 맞은 단풍잎. (사진: @Bono 작가님)
어떠셔요? 복숭아꽃 살구꽃은 화사하기 이를 데 없죠? 그에 비해 서리 맞은 단풍잎은 훨씬 더 선명하고 찬란하다 못해 심지어... 처연합니다. 그쵸?
'봄'이란 계절은 흔히 '청춘'을 상징합니다.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참 좋은 때입니다. 그래서 중국문학에서는 그 시절을 떠나보낸 아쉬움을 노래한 작품을 따로 '상춘傷春 문학'이라고 하죠.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서리 맞은 단풍잎이 더욱 붉은 법이라고... 좌절과 방황과 쓸쓸함이라는 차가운 삶의 서리를 맞고 스산한 가을바람과 더불어 어디론가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지만, 그 붉은색은 오히려 봄꽃보다 더욱 깊고 더욱 강렬하고 더욱 찬란한 법이라고.
다시 옛날이야기 하나. 예전에 학생들과 사은회를 끝내고 2차로 맥주 한 잔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술집에서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한 남학생이 묻더군요. 쌤 나이 때도 저런 감정을 느끼시나여? 그래서 그랬죠. 아가야, 서리 맞은 단풍잎이 이월 달의 봄꽃보다 더 붉은 법이란다. 그리고 다시 20년 세월이 흘렀네요...
그와 동시대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노을을 바라보며 이렇게 노래했죠.
석양이여, 한없이 좋구나! 夕陽無限好!
단지 어둠이 가까워졌을 뿐. 只是近黃昏.
모두 만당晩唐이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은연중에 반영하는 유명한 시구이죠.
그렇다면 이 구절은 긍정을 노래한 것일까요? (야이, 야이, 야이야~ 내 나이가 어때서~~♬~♩~♪) 아니면 부정을 노래한 것일까요? (그래봤자 떨어진 낙엽이지... 어둠이 가까워졌잖아... ㅠㅜ)
동아시아의 일원론 패러다임은 삶과 죽음을 하나의 순환 구조로 인식합니다. 그러니 긍정과 부정 따위의 이분법 경계를 굳이 따로 구분할 까닭도 없겠지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이 찬란한 계절의 아름다움을 앉아서 멍 때리며 즐길 따름입니다.
(이하 : 물향기 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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