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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un 30. 2023

01.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쓰는 이유

- 유서를 남기면서

<브런치 스토리>에 올라온 다양한 글을 읽어본다.

참 신기하다. 어쩌면 다들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지.

특히 제목을 붙여놓은 걸 보면 그야말로 재기가 넘쳐흐른다. 참 부럽다.


글을 읽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다. 이 많은 분들은 왜, 무슨 이유로 여기에 글을 올리고 있는 걸까? 외롭고 힘들어서 누군가와 소통하며 응원을 받고 싶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세상과 공유하고 싶어서? 책으로 출간하여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서? 아니면 그냥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좋아서? 여러 가지 이유를 짐작해 본다.


나의 경우는... '유서遺書'를 남기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놀라실 필요는 없다. 행여 착각하고 신고를 하지는 말아 주시길. '유서를 쓴다'라고 하면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행동을 하겠다는 건 전혀 아니니까.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6학년 때다. 학교에서 아빠들을 소집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놀게 하고, 아빠들은 교실에 모이란다. 그런데 갑자기 백지를 나눠준다. 뭔가 싶었더니, 한 시간 후에 죽는다고 가정하고 유서를 쓰란다. 뭐라고? 내가 한 시간 후에 죽는다고? 아들놈에게 유서를 쓰라고? 갑자기 무슨 말을 어떻게 하란 말인지... 땀만 삐질삐질 흘리면서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은 모두 정신없이 잘만 쓰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 금방 자신의 삶을 잘 정리할 수 있는 걸까. 멍하고 있는 사이에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결국 나는 단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아이들이 모였다. 어느 여선생님이 아빠들이 쓴 유서를 나눠주었다. 잠시 아이들이 읽어보는 시간이 흐르더니, 교실 안은 삽시 간에 눈물바다로 변했다. "아빠, 사랑해요!" 여기저기서 부자/부녀가 껴안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내 아들 녀석도 눈물을 터뜨렸다. 물론 이유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겠지만. 아빠의 사랑이 넘치는 그 감동적인 유서를 자기 혼자만 받아 보지 못하다니. 아빠가 얼마나 미웠을까...


나도 미웠다. 처음에는 학교 당국이 미웠다. 그런 극단적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난다고? 한 시간 후의 죽음을 미리 알고 유서를 쓰게 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물론 유서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 쓰는 거겠지만, 그게 한 시간은 아닐 거다. 유서를 한 시간 안에 다 쓸 수 있는 성격의 글이라고 생각한다면, 삶과 죽음을 그리고 글 쓰는 일을 너무 쉽게 여기는 것이다. 난 아주 짧은 글 한 편을 써도 최소한 하루 이틀은 걸리는데, 굳이 이런 억지 상황을 만들어서 부자간의 간극을 만들다니, 아들 녀석이 아빠에게 오죽이나 섭섭했겠는가! 강력하게 따지고 싶었다. 나중에는 나 자신이 미웠다. 그냥 남들 다하듯이 얘야 사랑한다 어쩌고 저쩌고 대충 이야기했으면 되었을 것을. 만약 그런 표현에 뭔가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느낀다면, 남다르게 하고픈 말이 있었다면, 혹은 할 말이 그렇게 많다면 왜 미리미리 준비해두지 않았던가. 죽음이란 게 언제 어떻게 갑자기 다가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유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장 쓰기 시작한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그림을 그려보는 수준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보통 작업이 아니었다. 아들 녀석뿐만 아니라 딸내미도 있고 아이들 엄마한테도 뭔가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와 인연을 맺은 무수한 학생들한테는 할 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늘 나를 슬프게 하는 대한민국 현실 사회에도 하고픈 말이 많았다. 그 모든 것이 뒤죽박죽 머릿속에 헝클어져 있었다.


뭐야, 이거. 유서를 쓰겠다는 거야, 뭘 하겠다는 거야? 차라리 그냥 책을 쓰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다르다. 책을 쓰려면 출판사의 요구가 까다롭다. 책 몇 권을 출판해 봤지만 한 번도 순탄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정작 내가 말하고 싶은 걸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난 무애無碍의 세계에서 보다 자유롭게 말해보고 싶었다. 




20여 년 전, 개인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기계치인 내가 그런 첨단 기술을 알 리가 만무했다. 수천만 원이 들었다. 거금이 들어간 이유는 글과 동영상을 많이 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교육부에서 인터넷 교육 지원금으로 6억 원을 받은 학교 당국은 1원도 지원하지 않았다. 결과보고서를 작성할 때는 제일 먼저 내 이름을 넣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아무튼 최초로 인터넷 강의를 구현한 교수라는 타이틀은 얻었다.


사람을 고용하여 내 모든 강의를 강의실 현장에서 촬영해서 올렸다. 중국어와 중국문학, 중국 역사 지리와 문화를 동영상으로 올리고 온라인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했다. 유료로 하라는 말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그것이 인터넷 정신이라고 믿었다. 인터넷 광역망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때라, 사람이 조금만 몰려도 버퍼링 현상이 심해서 골머리를 앓았다. 돈이 자꾸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뿌듯할 때가 훨씬 더 많았다. 로버트 풀검 Robert Fulghum은 《제 장례식에 놀러 오실래요?》에서 말한다. 인생은 조금만 뒤집어 생각하면 즐거운 정답이 보인다고. 나중에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놀러 와서 내 동영상을 틀어놓고 즐겁게 웃으며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싶었다. 내가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내 동영상을 보면서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줄 알 것 아닌가! 내 아들과 딸도, 내 학생들과 나의 모든 지인들도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싶었다. 그 홈페이지가 나의 유서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중국 심양瀋陽 Shěnyáng에 갔을 때였다. 공항에서 웬 생면부지의 어르신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신다. 한국 분이셨다.


"아이고, 교수님.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근데... 절 아시나요?"

"아 그럼요. 알다마다요. 오늘 아침에도 교수님 강의를 듣고 나오는 길인데요."


알고 보니 내 홈페이지에서 동영상과 글로 중국어를 배우시는 분이었다. 고향은 심양. 우리나라 청주의 모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하셨단다. 퇴직 후 고향인 심양에 와서 사시는데, 중국어를 배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던 차에 내 사이트를 알고 재미있게 배우는 중이라고 말씀하신다. 


북경北京 Běijīng에서 상해上海 Shànghǎi에서 중국 각지에서 메일이 왔다. 심지어 페루에서도 왔다. 모두 덕분에 중국어를 재미있게 배우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현지 교포들의 인사였다. 뿌듯했다. 나도 모르게 팬클럽이란 것도 생겼다. 파주에 사시는 '가을 호수님'이 '회장'이시란다. 큰 병으로 수술을 하셨으니 한번 문병 올 수 없겠느냐는 '총무님'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 뵙기도 했다. 이듬해 '가을 호수님'이 고급 스웨터 두 벌을 사가지고 학교에 오셨다. 덕분에 쾌차했노라고 인사를 하신다. 영화 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나다니.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다. 


슬슬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신다는 분이 감사 메일을 보내왔다. 읽어보니 기분이 영 별로다. 내 홈페이지의 동영상에 버퍼링 현상이 심해서, 자기가 내 모든 강의를 힘들게 CD로 구워서 단골손님들에게 선물로 배포하고 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한다. 뭐지, 이건? 좀 영업적인 것 아닌가? 이런 걸 사전에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사후 통보만 하면 되는 건가? 하지만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한 어느 대형 중국어학원에서 내 동영상강의를 열심히 듣는 수상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모교의 대학에 근무하는 후배 교수는 내 동영상으로 인터넷강의를 하겠단다. 온갖 스팸이 각종 게시판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우고 막아도 끝이 없다. 급기야 고소하겠다는 전화까지 받았다. 글을 올릴 때 무심코 아주 작은 '게螃蟹 crab' 사진 한 장을 사용했는데 그게 저작권 침해라는 것이었다. 거금이 날아갔다. 학교에서도 연락이 왔다. 이제 인터넷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으니 인터넷강의를 하고 싶으면 그 안에 들어와서 새로 촬영해야 한단다. 내 개인 홈페이지는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문을 닫게 되었다. 공들여 쌓아 놓은 내 유서도 허공 속에 사라져 갔다. 




방랑벽이 도졌다. 방학 때마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나 홀로 구름과 달을 벗 삼아 드넓은 중국 대륙 동서남북을 방황했다. 특히 인적 드문 서부의 오지가 좋았다. 천산산맥 보고다博格達(5,445m) 봉우리 아래 신화처럼 숨어있는 천지天池의 어느 그믐날 밤,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빽빽한 별들의 향연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손오공이 되어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화염산의 뜨겁게 불타는 봉우리에도 올라가 보았다. 현장법사나 혜초처럼 진리를 구하는 스님의 마음으로 돈황燉煌 Dùnhuáng 막고굴 천불동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여 동서방 세계를 잇는 파미르고원도 넘어가 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학교에서 보직을 맡으란다. 눈부신 티베트고원 설산의 허허로운 바람 위에 마음을 내려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유서에 쓸 말은 점점 더 늘어가는데, 언제 다 작성한다지... 


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다. 퇴직을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그렇게 홀가분하고 좋을 수가 없다. 재산이라고는 집 한 채도 없지만 감사하게도 연금이 나오니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 이제야말로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본격적으로 유서를 쓸 때가 된 것이다. 




'유서'란 무엇일까? 지원금이나 연구비를 타내기 위해서 쓰는 논문 따위의 글도 아니고, 출판사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쓰는 글도 아니고, 그 어느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쓰는 글도 아니다. 사전에 보면 '유언을 적은 글'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남길 유遺, 글 서書', 글을 남기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간 흔적을 글로 남기는 것을 말한다. 


튀르키예의 유명한 당구 선수 세미 사이그너 Semih Saygıner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프로당구대회에 데뷔하여 우승했다. 환갑 나이에 굳이 먼 곳에 와서 프로 선수로 데뷔한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단다. 레거시 legacy,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내가 유서를 남기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남이 전기傳記로 써줄 만한 삶을 살지도 못했으려니와, 써준다 해도 내가 직접 쓰는 것만 하겠는가.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왜 책 한 권도 쓰지 못하느냐고. 솔직히 대답했다. 머릿속에 든 게 없는 걸 억지로 쥐어짜봤자 뭐 하겠느냐고. 지금은 아니다. 유서를 쓸 분량을 생각해 보니 족히 책 20권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마음이 바빠진다. 이걸 언제 다 쓰나. 20년은 더 살아야 되겠네. 점점 아픈 데도 많아지고, 허리 디스크로 앉아있기도 힘들어지고, 글 쓰는 속도도 떨어져 가니 20년은커녕 30년도 더 걸릴 것 같다. 오백 명 고등학교 동기 중에 1/4은 세상을 달리 했으니 이제부터는 정말 굳은 각오로 정진해야 하는데, 누가 독촉을 안 하니까 자꾸만 게을러진다. 




그러다가 세 달쯤 전, <브런치 스토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글도 올리고 사진도 올리고 짧은 분량의 동영상도 올릴 수 있다. 내 개인 홈페이지와는 달리 돈이 들어갈 이유도 없다. 오히려 잘 쓰면 지원도 해준단다. 이상한 스팸이 쳐들어와 더럽힐 걱정도 없다. 무엇보다 옛날 내 홈페이지처럼 어느 순간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 나의 유서를 남기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다. 


한 달 정도 기웃기웃 눈치 보며 남몰래 마실을 다녔다. 라이킷? 이게 뭐지? 아하, 이게 <좋아요>라는 거구나. 딩동!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아하, 누군가의 글을 <구독> 신청을 하면 그 사람이 글을 올리면 연락이 오는 거구나. 신기하다. 일주일쯤 전에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란 글을 올렸다. 그런데 글을 올리자마자 1분도 안 되어 딩동 딩동 계속 소리가 난다. 어라? 누가 벌써 그 사이에 내 글을 다 읽고 <좋아요>를 눌러주었네? 히야! 누가 눌렀는지 확인까지 가능하다. 엇? 오레오, 뮹지, 구름, 시아쭌? 지난 학기 사이버강의로 내 수업을 들었던, 얼굴도 모르는 나의 귀여운 학생들이네? 하하, 입꼬리가 저절로 귀에 걸린다. 언젠가 얼굴을 대면하고 초콜릿을 건네줄 인연의 시간으로 이어졌으면 참 좋겠다. 


두 달쯤 전부터 용기를 내어 일주일에 한 꼭지 정도 글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도 서먹서먹, 좋은 시스템을 제대로 활용할 줄도 모르고 어수룩하기 짝이 없다. 그 와중에 현재까지 스물다섯 꼭지의 글을 올렸다. 앞으로 내가 사용하게 될 인문학 어휘의 개념을 정리해 본, 이를 테면 '일러두기' 성격의 글이었다. 그중 열네 꼭지를 묶어서 브런치북으로 발간해 보았다. 제목은 《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다》. 촌스러운 제목이지만 평생 SNS 근처에도 못 가 본 처지에 혼자 힘으로 해낸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하다. 


오늘부터는 <매거진>에 도전해 본다. 바라건대 우리들의 <브런치 스토리>가 영원히 썩지 않는 '불후不朽'의 글쓰기 공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내 삶의 아카이빙이 되어 줄 나의 유서가 기왕이면 내 자식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읽어볼 수 있는 유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 학생뿐만 아니라 삶이라는 무더운 여행길에 지친  모든 나그네들이 쉴 수 있는 시원한 나무 그늘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때쯤 어디선가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와 응원해주지 않을까? 



"글이란 나라를 경영하는 대업大業이요, 불후의 성대한 작업이다."  

    蓋文章, 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      - 조비曹丕, 《전론典論 · 논문論文》에서



건강해야겠다. 

                                                    



[ 표지 사진 ]

◎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파미르 고원으로 향하는 길. 잉지사英吉沙 부근 오아시스에서. 유서에는 주로 방랑의 기록이 많이 등장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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