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서를 남기면서
"예, 안녕하세요? 근데... 절 아시나요?"
"아 그럼요. 알다마다요. 오늘 아침에도 교수님 강의를 듣고 나오는 길인데요."
알고 보니 내 홈페이지에서 동영상과 글로 중국어를 배우시는 분이었다. 고향은 심양. 우리나라 청주의 모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하셨단다. 퇴직 후 고향인 심양에 와서 사시는데, 중국어를 배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던 차에 내 사이트를 알고 재미있게 배우는 중이라고 말씀하신다.
북경北京 Běijīng에서 상해上海 Shànghǎi에서 중국 각지에서 메일이 왔다. 심지어 페루에서도 왔다. 모두 덕분에 중국어를 재미있게 배우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현지 교포들의 인사였다. 뿌듯했다. 나도 모르게 팬클럽이란 것도 생겼다. 파주에 사시는 '가을 호수님'이 '회장'이시란다. 큰 병으로 수술을 하셨으니 한번 문병 올 수 없겠느냐는 '총무님'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 뵙기도 했다. 이듬해 '가을 호수님'이 고급 스웨터 두 벌을 사가지고 학교에 오셨다. 덕분에 쾌차했노라고 인사를 하신다. 영화 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나다니.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다.
슬슬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신다는 분이 감사 메일을 보내왔다. 읽어보니 기분이 영 별로다. 내 홈페이지의 동영상에 버퍼링 현상이 심해서, 자기가 내 모든 강의를 힘들게 CD로 구워서 단골손님들에게 선물로 배포하고 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한다. 뭐지, 이건? 좀 영업적인 것 아닌가? 이런 걸 사전에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사후 통보만 하면 되는 건가? 하지만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한 어느 대형 중국어학원에서 내 동영상강의를 열심히 듣는 수상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모교의 대학에 근무하는 후배 교수는 내 동영상으로 인터넷강의를 하겠단다. 온갖 스팸이 각종 게시판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우고 막아도 끝이 없다. 급기야 고소하겠다는 전화까지 받았다. 글을 올릴 때 무심코 아주 작은 '게螃蟹 crab' 사진 한 장을 사용했는데 그게 저작권 침해라는 것이었다. 거금이 날아갔다. 학교에서도 연락이 왔다. 이제 인터넷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으니 인터넷강의를 하고 싶으면 그 안에 들어와서 새로 촬영해야 한단다. 내 개인 홈페이지는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문을 닫게 되었다. 공들여 쌓아 놓은 내 유서도 허공 속에 사라져 갔다.
다시 많은 세월이 흘렀다. 퇴직을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그렇게 홀가분하고 좋을 수가 없다. 재산이라고는 집 한 채도 없지만 감사하게도 연금이 나오니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 이제야말로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본격적으로 유서를 쓸 때가 된 것이다.
'유서'란 무엇일까? 지원금이나 연구비를 타내기 위해서 쓰는 논문 따위의 글도 아니고, 출판사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쓰는 글도 아니고, 그 어느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쓰는 글도 아니다. 사전에 보면 '유언을 적은 글'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남길 유遺, 글 서書', 글을 남기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간 흔적을 글로 남기는 것을 말한다.
튀르키예의 유명한 당구 선수 세미 사이그너 Semih Saygıner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프로당구대회에 데뷔하여 우승했다. 환갑 나이에 굳이 먼 곳에 와서 프로 선수로 데뷔한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단다. 레거시 legacy,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내가 유서를 남기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남이 전기傳記로 써줄 만한 삶을 살지도 못했으려니와, 써준다 해도 내가 직접 쓰는 것만 하겠는가.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왜 책 한 권도 쓰지 못하느냐고. 솔직히 대답했다. 머릿속에 든 게 없는 걸 억지로 쥐어짜봤자 뭐 하겠느냐고. 지금은 아니다. 유서를 쓸 분량을 생각해 보니 족히 책 20권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마음이 바빠진다. 이걸 언제 다 쓰나. 20년은 더 살아야 되겠네. 점점 아픈 데도 많아지고, 허리 디스크로 앉아있기도 힘들어지고, 글 쓰는 속도도 떨어져 가니 20년은커녕 30년도 더 걸릴 것 같다. 오백 명 고등학교 동기 중에 1/4은 세상을 달리 했으니 이제부터는 정말 굳은 각오로 정진해야 하는데, 누가 독촉을 안 하니까 자꾸만 게을러진다.
그러다가 세 달쯤 전, <브런치 스토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글도 올리고 사진도 올리고 짧은 분량의 동영상도 올릴 수 있다. 내 개인 홈페이지와는 달리 돈이 들어갈 이유도 없다. 오히려 잘 쓰면 지원도 해준단다. 이상한 스팸이 쳐들어와 더럽힐 걱정도 없다. 무엇보다 옛날 내 홈페이지처럼 어느 순간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 나의 유서를 남기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다.
한 달 정도 기웃기웃 눈치 보며 남몰래 마실을 다녔다. 라이킷? 이게 뭐지? 아하, 이게 <좋아요>라는 거구나. 딩동!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아하, 누군가의 글을 <구독> 신청을 하면 그 사람이 글을 올리면 연락이 오는 거구나. 신기하다. 일주일쯤 전에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란 글을 올렸다. 그런데 글을 올리자마자 1분도 안 되어 딩동 딩동 계속 소리가 난다. 어라? 누가 벌써 그 사이에 내 글을 다 읽고 <좋아요>를 눌러주었네? 히야! 누가 눌렀는지 확인까지 가능하다. 엇? 오레오, 뮹지, 구름, 시아쭌? 지난 학기 사이버강의로 내 수업을 들었던, 얼굴도 모르는 나의 귀여운 학생들이네? 하하, 입꼬리가 저절로 귀에 걸린다. 언젠가 얼굴을 대면하고 초콜릿을 건네줄 인연의 시간으로 이어졌으면 참 좋겠다.
두 달쯤 전부터 용기를 내어 일주일에 한 꼭지 정도 글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도 서먹서먹, 좋은 시스템을 제대로 활용할 줄도 모르고 어수룩하기 짝이 없다. 그 와중에 현재까지 스물다섯 꼭지의 글을 올렸다. 앞으로 내가 사용하게 될 인문학 어휘의 개념을 정리해 본, 이를 테면 '일러두기' 성격의 글이었다. 그중 열네 꼭지를 묶어서 브런치북으로 발간해 보았다. 제목은 《우리는 동양인이 아니다》. 촌스러운 제목이지만 평생 SNS 근처에도 못 가 본 처지에 혼자 힘으로 해낸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하다.
오늘부터는 <매거진>에 도전해 본다. 바라건대 우리들의 <브런치 스토리>가 영원히 썩지 않는 '불후不朽'의 글쓰기 공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내 삶의 아카이빙이 되어 줄 나의 유서가 기왕이면 내 자식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읽어볼 수 있는 유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 학생뿐만 아니라 삶이라는 무더운 여행길에 지친 모든 나그네들이 쉴 수 있는 시원한 나무 그늘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때쯤 어디선가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와 응원해주지 않을까?
蓋文章, 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 - 조비曹丕, 《전론典論 · 논문論文》에서
◎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파미르 고원으로 향하는 길. 잉지사英吉沙 부근 오아시스에서. 유서에는 주로 방랑의 기록이 많이 등장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