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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Oct 13. 2023

09. 싱그러운 삶의 나무

[ 제1부. 공자의 리즈 시절 ]

※ 나이가 드니 몸뚱이에 고장 난 곳이 많네요. 딸내미 성화에 못 이겨 종합 검진을 받아보니 몇 군데 이상이 발견되어 거의 매일 여기저기 병원에 다녔습니다. 수술도 한 번 받았구요. 이제 대충 몸을 추슬렀으니 슬슬 다시 글을 써보려 합니다. 이상은 그동안 글쓰기에 게을렀던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었습니다. ^^;;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공자는 《논어論語 · 위정爲政》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말한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

서른 살에는 삶의 가치관을 정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

쉰 살이 되자 천명天命을 알게 되었다.

예순 살이 되자 귀가 순하게 되었고,

일흔 살이 되자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일흔한 살. 그러니까 위에서 공자가 한 말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돌이켜 본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의 삶에 대한 단순한 회고가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통해 보편적 인간의 연령별 특성을 파악하고 갈림길에 서 있는 이 세상 모든 나그네들에게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필자의 이 해석 방법에 대해 몇몇 지인知人들이 귀한 의견을 보내주셨다.

깊이 감사드리며 제 생각을 보충하여 말씀드린다.


첫째, 공자가 제시한 나이는 오늘날의 현실에 맞춰서 다소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컨대 필자는 불혹不惑인 마흔 나이가 되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흔들린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 중의 하나로 '빈 둥지 증후군 empty nest syndrome'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나이 마흔 무렵이 되면 자식이나 배우자가 둥지를 떠나버린다는 이론. 언제까지나 품 안에 있는 줄 알았던 자식은 매사에 반항하기 일쑤요, 늘 다정하게 품어줄 줄 알았던 남편은 소가 닭 보듯 시큰둥, 밖으로만 나돈다. 그래서 이 시기가 되면 정신적으로 공허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 글을 본 마흔 나이의 어느 여직원 선생님이 이의를 제기했다.


"교수님, 요샌 좀 다른 것 같아요. 전 아직 시집도 안 갔는걸요? 주위에 저 같은 친구도 꽤 되는데요? 결혼한 친구들도 대부분 아이들이 열 살 미만예요. 엄마 품 안에서 떠나려면 적어도 열 살은 넘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 그 말이 옳다. 요샌 여성의 결혼 평균 연령대가 30대 중반 즈음이라니, '빈 둥지 증후군' 현상이 나타나려면 40대가 아니라 50대 초반까지로 연장해야 타당할 것 같다. 평균 수명이 연장되면서 100세 시대가 되다 보니, 사회가 그만큼 급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갈림길에서 공자가 안내해 주었던 그 내용을 새로운 연령으로 적용하여 다시 정리해 보자.


둘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절대로 숫자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어느 벗님이 필자가 쓴 글을 읽고 말했다. "에혀... 난 인생 헛살았구나, 헛살았어!" 그런 줄도 모르고 연령별 삶의 목표도 없이, 이미 그 나이를 그대로 지나쳐버렸노라는 자조의 한탄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 한탄은 서구의 패러다임인 이원론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이원론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본질은 아니다. 예컨대 문법은 인간의 언어 현상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주지만, 그것이 언어의 본질은 아니다. 문법의 함정에 빠지면 언어 학습을 그르치게 된다. 마찬가지다. 공자가 제시한 연령별 삶의 특성도 일정한 가이드라인일 뿐, 반드시 순서대로 나이와 숫자라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는 연역법 명제가 결코 아니다. 마땅히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인 일원론으로 받아들여야 옳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십 노인이더라도 그 내면에는 열다섯 소년 시절이 존재하고 있다. 서른과 마흔 나이의 청년기와 50~60의 장년기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숫자는 인간이 편의상 임의로 만들어놓은 것일 뿐, 절대적인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증명하는 과학적 팩트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칠십 아니라 팔십 구십 노인이라도 전혀 늦지 않았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새롭게 배움에 뜻을 둘 수 있다. 


지금이라도 더욱 큰 시야로 더 멀리 바라보며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해 보자. 남아있는 삶의 여행길의 진정한 캡틴이 되어보자. 내 삶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게 되고, 하루하루 매 순간을 덤으로 사는 감사한 시간이 될 수 있고, 언제나 우주와 대자연과 타인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의 의지와 이 사회의 도덕률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리즈 시절을 맞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벗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응원과 격려의 말이다.




[ 표지 사진 ]

◎ 담양에 가면 메타세콰이어 길이 있다. 언젠가 학생들과 함께 그 길을 산책한 적이 있다. 상쾌하고 편안하고 즐거웠다. 나무 덕택이었다. 나무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삶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건지, 그런 추상적 명제는 필요 없어 보였다. 그저 더위에 지친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쉼터가 되어주는 자신의 삶에 빙긋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공자의 삶은 그 메타세콰이어 나무 같지 않았을까.


◎ 나는 어떨까? 소풍을 끝내고 돌아가는 그 순간, 이만하면 보람차게 지냈노라 웃으면서 만족하며 떠나갈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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