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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Sep 09. 2023

08. 예순 나이에는 소리를 들어라

[제1부. 공자의 리즈 시절]

노년이 되어서 찬란하게 빛나는 인생의 리즈 시절을 맞이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마지막 찬스는 예순 나이 때이다. 공자는 말한다.



[ 육십이이순 ]

六十而耳順 ]



첫 번째 독해법. 공자 왈:  나는 예순 나이가 되자 귀가 순해지더라.

두 번째 독해법. 공자 왈: 누구나 예순 나이가 되면 귀가 순해져야 한다. 


가운데 글자인 '이而'는 접속사다. 

앞뒤 문장에 따라 순접으로 해석해도 되고 역접으로 해석해도 된다. 

'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상황에 따라 모두 가능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여서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귀가 순해진다 耳順'? 이건 무슨 뜻일까? 

무슨 말을 들어도 허허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진다는 뜻이다.    

첫 번째 해석법에 의하면, 공자가 자기는 예순 나이가 되자 굉장히 너그러워졌노라는 자찬自讚의 말이 된다.


나는 후자의 방법으로 읽는다. 그럼 청유형 명령문이 된다. 두 가지 해석법이 있다.

(1) 예순 나이에는 노여움이 많은 시기이니, 그 점에 유념하여 귀가 순해지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

(2) 예순 나이쯤 되었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허허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뜻.    




예순 나이에는 노여움이 많은 것 같다. 아니, 내가 늙었다고 우습게 아는 거야? 별다른 이야기도 아니건만 귀에 들려오는 것마다 공연히 서글프고 야속하기만 하다. 그게 60대의 특성이니, 그 점에 유념하여 귀가 순해지도록 각별히 노력하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궁금하다. 공자는 대체 어떻게 인간의 이런 나이 별 특성을 간파할 수 있었을까? 예순 나이에 노여움을 더 잘 타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눈, 아상我相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높은 곳에 있으면 바라보는 하늘이 크고 넓다. 타인과 하늘을 공유할 수 있다. 반대로 우물 속에 있으면 눈에 보이는 하늘은 작고 좁을 수밖에 없다. 하늘을 우러러보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노라, 윤동주의 시구를 인용하며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분들이 은근히 많다. 그때마다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그 하늘은 우물 속에 들어간 당신 만의 하늘은 아니신지?


만약 60년 동안 점점 더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늘은 점점 더 좁아지고, 아집我執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자기가 바라보는 하늘과 타인의 하늘이 달라진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작고 좁은 하늘로 상대방의 하늘을 판단하게 되니, 당연히 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오해하는 만큼 노엽고 서글프고 야속해지기 쉬운 것이다. 


그렇다고 단정 짓지는 말자. 예순 나이의 어른이 노여워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 나이 때의 특성 때문이라고 몰아세우지는 말자. 공연히 노여워할 수도 있지만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60대가 안 된 사람들도 공연히 화를 내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나이가 근본 문제가 아니다. 깊은 우물 속에서 좁은 하늘을 바라보며 아집을 키우는 게 진짜 문제다. 노년이 되어서 빛나는 인생의 리즈 시절을 맞이하고 싶으면, 60대가 된 지금이라도 아집을 버리고 우물에서 나와 넓은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라는 공자의 마지막 권면이 아닐까.


그러므로 "육십이이순 六十而耳順"은 "예순 나이쯤 되었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허허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져야 한다"로 해석하는 게 가장 타당하다. 속으로는 화가 잔뜩 치미는데 겉으로만 가식적으로 껄껄 웃어넘기는 척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짜로 너그러워져야 한다. 그게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소리를 들어야 한다.



'현상의 소리'가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있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로 너그러워지고 귀가 순해진다. '내면의 소리'? 그건 또 무슨 말일까? 왜 하필 예순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권면한 것일까?

  



삼라만상,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내면의 소리'가 존재한다. 중국의 옛 지성인들은 사색과 명상을 통해 그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잠시 노장老莊의 기록을 살펴보자.



▶ 가장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大音希聲.   《노자老子 41》 

▶ 도는 소리 없는 소리다. 道無聲.  《장자莊子 · 지북유知北遊》  

▶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듣는다.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장자 · 인간세人間世》 


가장 큰 소리는 육체의 귀에 들려오는 '현상의 소리'가 아니라 마음의 귀로 듣는 '들리지 않는 소리 希聲'이고, '소리 없는 소리 無聲'야말로 진정한 소리란다. 심지어 그것이 바로 곧 '도道'라고 말한다.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 도가 사상의 핵심이라는 선언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장자는 또 이렇게 설명한다. 



아득한 것을 바라보고,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 

아득한 그 속에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소리 없는 소리를 통해서만 조화로움을 들을 수 있다. 

視乎冥冥, 聽乎無聲. 冥冥之中, 獨見曉焉; 無聲之中, 獨聞和焉.《장자 · 천지天地 》   



'아득한 것 冥冥'은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가 아닌 내면의 세계를 의미한다. '소리 없는 소리'도 마찬가지. 귀에 들려오는 액면 그대로의 소리가 아닌 내면의 소리를 뜻한다.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오는 현상의 것을 맹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상대방과 조화調和를 이룰 수도 없다. 깨달음과 조화를 얻으려면 내면의 세계를 바라보고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사랑하는 님이 화를 낸다고 치자. '현상의 소리'로 들으면 대부분 나도 덩달아 화가 난다. 화가 나면 싸우기 쉽다. 그러나 그 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게 되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아, 이 사람이 이만큼 힘들었구나. 또는... 이만큼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구나. 이해하게 되면서 상대방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지낼 수 있다는 뜻. 그래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리 없는 소리'는 무엇으로 들을까? 첫째는 삶의 직접 경험으로 듣는다. 


절에 가면 법당에 매달려 있는 맑은 풍경風磬 소리가 들려온다. 땡그랑... 땡그랑... 현상의 소리다.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며 삼천 배를 드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귀로 '소리 없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수백 년 세월에 파묻힌 가여운 중생들의 번뇌하는 한숨 소리, 스님들의 낭랑한 목탁 소리 염불 소리가 시공을 초월하여 꿈인 듯 생시인 듯 아련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싸구려 달력 속에 붉게 물든 고궁의 단풍 사진 한 장... 언젠가 사랑하는 님과 낙엽을 함께 밟으며 가을 정취를 느껴본 경험이 있다면, 낡게 바랜 그 사진 속에서 그리운 님의 그 목소리를 재현하여 들을 수 있다. 책상 위에 동그마니 놓여 있는 소라 껍데기...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유구한 세월의 파도 소리와 온갖 사연 가득 싣고 떠나가는 뱃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추억이 없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한다. 


'소리 없는 소리'는 무엇으로 들을까? 둘째는 삶의 간접 경험으로 듣는다. 설령 절에 가서 풍경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설령 가을 고궁의 낙엽을 밟아 본 경험도 없고, 바닷가에서 소라 껍데기를 주어본 추억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같은 삶의 간접 경험을 통해 그 이면에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고층 건물 옥상에 매달린 대형 전자판 광고를 본다고 치자. 전자판에서 소리가 나올 리 없건만 우리의 귓가에는 환청처럼 소리가 들려온다. 콜라 병을 따는 광고가 나오면 "뽁!" 소리가, 자동차가 달리는 장면이 나오면 "부웅~" 소리가 들려온다. 왜 그럴까? 이미 수많은 TV 광고를 통해서 그 장면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 나오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장면을 대하면 뇌리에서 그 소리가 자동으로 복구되는 것이다. 


한漢나라 때의 학자 정현鄭玄은 말한다. 예순 나이가 되어서 귀가 순해질 수 있는 이유는, 그 나이가 되면 "상대방 말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 聞其言而知其微旨也"이라고 설명한다.《사서독본 四書讀本》참조. 예순 번 정도의 성상星霜을 겪어보면 삼라만상에 숨어있는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소리 없는 소리'는 직/간접 경험, 즉 삶의 연륜으로 듣는 것이다. 



[ 육십이이순 ]

六十而耳順 ]



우리도 이 구절에서 공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예순 나이면 삶의 경험이 꽤 되지 않느냐. 그러니 상대방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더라도, 액면 그대로의 소리로 듣지 말고 그 이면에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려무나. 너도 경험해 보았으니 상대방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을지, 왜 그런 말을 했을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니? 부드러운 공자의 목소리가 음성 지원으로 들리는 것 같지 않으신가? 그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귀가 순해지게 될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지성인들은 삼라만상의 그 무엇을 대하더라도 그 이면에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그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곧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학문學問'의 내용이자 방법이었다. '학문'이란 독서와 사색과 명상을 통한 삶의 직/간접 경험 쌓기인 동시에, 삼라만상의 '소리 없는 소리 듣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자 역시 그 소리 없는 소리에 늘 귀를 기울였다. 그가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격의 포용성이 확장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마음껏 행동해도 전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흔 살 리즈 시절을 맞이하게 된 것도, 예순 나이 이전부터 늘 마음속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덕분이 아닐까.




불교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존재가 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중생들이 외치는 고통과 질곡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들의 가엾은 영혼을 구제해 준다는 존재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청세음보살'이 아니고 '관세음보살'이라는 점이다. ‘소리’를 ‘듣는다聽’고 하지 않고 ‘본다觀’고 표현한 것이다. 보는 것도 그냥 단순하게 보는 게 아니다. ‘볼 간看’이나, ‘보일 견見’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해서 관조해 본다는 '관觀’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관세음보살이 듣는 것은 ‘현상의 소리’가 아니라, 고통에 빠진 중생들의 마음속에 흐르는 ‘내면의 소리’라는 뜻이다. 


‘불교佛敎’의 ‘불佛’이란 우주와 삶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란 뜻이다. 어떻게 하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불경은 현상에 미혹되지 말고 그 내면의 본질을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그 말은 바로 곧 현상세계의 이면에 숨어있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는 이야기다. 나 자신의 내면세계에 들어가 나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는 이야기다. ‘나’라는 존재가 인간인 이상,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게 되면 그 어떤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이 우주와 대자연의 한 구성요소인 이상, 인간 존재의 보편적 진실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주와 대자연의 내재원리를 깨치게 된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예순 나이에는 우리도 그 소리를 들어보자. 

명상과 사색에 잠겨 삼라만상에 내재된 그 모든 소리를 들어보자. 


밤바다의 잔잔한 파도 소리, 대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

찬란하게 빛나는 석양을 보면 노을이 물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향연을 보게 되면 별들이 쏟아져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자.

티베트 공가산(貢嘎山; Gonggashan. 해발 7,556m. 세계 제15위 고봉)에서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듣다. 2007.8.2.


벽에 걸린 산수화를 쳐다볼 때는 심산유곡에 흐르는 물소리와 산새소리를 듣고,

문학작품을 읽을 때면 등장인물의 목소리와 공간배경에서 들려 나오는 그 모든 소리를 들어보자.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호흡하며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참 나'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그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온몸으로 느끼며, 현상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삶을 관조해 보자. 

공자처럼, 노자와 장자처럼, 석가모니처럼, 영혼의 눈과 마음의 귀가 열리게 되기를 소망해 보자.

저물면서 빛나는 일흔 나이의 싱그러운 리즈 시절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 표지 사진 ]

◎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법당 처마에 매달린 풍경. 눈을 감고 오래오래 소리를 들어보다. 201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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