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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Oct 21. 2023

11. 휴전선 1977

[ 제2부. 소오생의 志於學 ]

내 삶을 돌아본다.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공자는 놀기 좋아하는 열다섯 나이에는 '학문에 뜻을 두자志於學'라는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여기서 '학문에 뜻을 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겸손하게, 간절하게, 꾸준하게, 온 마음을 다하여 가르침을 청하고 정성을 다하여 배우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열다섯 나이에 그럴 수 있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에는 20대 초반도 열다섯 나이와 비슷한 것 같다. MZ 세대 대학생들 중에서 겸손한 학생을 만나기란 아주 힘든 일이다. 간절한 학생도 만나기 힘들고, 꾸준한 학생을 만나기란 더욱 어렵다. 나는 그 시절 어떠했을까? 옛날 학생들은 그 시절 대부분 가정환경이 어려웠으므로 오늘날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지만, 공자의 시각으로 본다면 오십보 백보,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20대 초반, 나는 군대에 입대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최전선인 비무장지대 안에서 생활하였다. 그 시절,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냈을까? 옛날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그 시절에 긁적였던 이른바 '추억록'이란 걸 발견했다. 군대 시절의 추억록은 대부분 남들이 써주는 것이었지만, 내 추억록은 2평 짜리 지하 벙커에서 희미한 등잔불 아래 나 혼자 낙서한 것이었다. 별로 시간이 없어 그나마 몇 편 써보지도 못했지만... 



 

非武裝地帶( De Militarized Zone )!

     

이따금씩 들려오는 먼 곳의 砲聲을 除外하곤 이곳은 그대로 靜寂 속의 太古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짧다고 말하면 짧을 수 있는 四季節의 輪迴 있기가 세 번...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짧은 것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푸른 制服을 淸算하는 마지막 季節에 서서 지나간 날들의 片鱗을 모아봅니다.

最前方 속의 三年...

너무나 制限된 極小 範圍 속의 삶이었기에 想念은 더욱 흐트러진 채로 쏟아졌던 모양입니다.  

   

이 작은 몇 다발의 가난한 言語의 나열과 졸렬한 그림들이, 누구에게 보일 만큼 才氣 번득이는 藝術性이 있는 것이라곤 敢히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다. 단지 너무나 切實했고, 고통스러웠고, 아팠기에 버리지 못하고 여기 모아본 것뿐입니다. 이것은 나의 작은 삶이었고, 生活의 全部였습니다.     


무오년 동짓달에




나의 임무


나는 현 전선을 절대 고수하며 대적방송을 효과적으로 실시하여 심리전 목표를 최대한 달성한다. 


※ 나는 1977년 1월에 입대, 육군 본부 소속 확성기부대 방송요원으로 비무장지대 GP에 파견되어 군 복무를 했다. 당시에는 남북 간에 상호 확성기 방송을 하지 않았으나,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여 하루에 두 번 발전기를 돌려서 육군본부에서 발신하는 음악방송을 수신하여 방송 설비를 점검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발전기를 돌려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시절, 우리 비무장지대 일대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사용했던 쌍팔년도 고물딱지인 발전기는 여간해서는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전기가 없는 생활은 상상을 불허한다. 문명과 비문명의 차이다. 전기가 없으니 당연히 TV도 없었다. 지상의 공막사空幕舍에 다이얼이 KBS에 고정된, 건전지를 집어넣는 라디오가 한 대 있었을 뿐이었다. 수돗물도 없었다. 까마득하게 먼 계곡 가의 우물에 내려가 지게로 길어올려야 했다. 모든 생활은 지하 벙커에서 해야 하므로, 등유를 사용하는 등잔을 닦고 기름칠 하는 일도 중요한 일과였다. 


난방은 더 큰 문제였다. 대형 화로가 하나 있는 내무반 벙커 외의 다른 벙커에는 난방 시설이 전혀 없었다. 내가 생활하는 2평 남짓의 방송실 벙커는 겨울이 되면 수통의 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곳에서 모포 다섯 장을 겹쳐서 온몸을 김밥 말듯 돌돌 말아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공막사에 가서 거울을 보면 코가 새빨갰다. 동상이 걸린 것처럼 근질근질했다. 숨을 쉬느라 코와 입은 모포로 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8년 10월 1일이었다. 0시를 기하여 155마일 철책선 전역에 일제히 불이 켜졌을 때, 눈물이 핑 돌던 그때 그 순간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아마도 그때가 남한의 경제력이 비로소 북한을 따라잡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전깃불이 들어와 있던 북한의 철책선을 보며, 그들의 문명 생활에 늘 배가 아팠던 시절이었다.




統一!


너와 나의 오직 하나의 꿈...

民族의 大念願

永遠한 所望.     


젊음아 젊음아!!

南과 北의 아픔 지닌 祖國을 爲해

이 江山 밝히는 등불을 켜자.     


기다랗게 펼쳐지는 155마일의 戰線에서

오늘도 너와 나는 올빼미로 긴긴밤을 지새운다.     


내 그리운 父母兄弟여!

내 보고픈 親友들이여!

내 사랑하는 愛人이여!

이 밤도 안녕이라오...     


고요하게 타오르는 적막한 戰線의 밤.

달이 뜨면 순이 생각, 별이 뜨면 故鄕 생각.

내 마음은 달빛 사라진 서쪽 하늘의 별 하나.

그러나 그 별빛은 오늘도 내일도 祖國을 위해 

삼천만의 불침번 되어 戰線의 밤을 비추리...


※ 그래도 분단의 현장에서 나라를 지킨다는 자부심만큼은 대단했던 것 같다. 훗날 파견 나갔던 현지의 부대원들과 싸우다가 갈비뼈가 부러져 후송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복귀하지 않고 후방의 병원 부대에서 보안대 요원으로 근무하다가 제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편법을 저지르기가 싫었다.(무서웠을지도... ^^) 결국 다시 원대 복귀했을 정도로 비무장지대에 애착이 갔다.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언제나 가슴이 뭉클했던 시기였다




戰線夜抄     


밤(夜)

戰線

非武裝地帶

정적과 어둠

그리고, 한 哨兵.     


동쪽 그곳엔 머얼리 아이스크림 高地

또 奇巖怪石의 절경이언만

이름조차 분한 ‘金日成 高地’.

그리고 曉星山의 雄姿...

저들도 分明 우리의 땅 아니던가!     


북쪽 슬픈 하늘 아래 山이 울고 서 있다.

이름하여 431高地, 505高地...

오직 싸움 만을 위하여 생긴 슬픈 이름들이 울고 서 있다.     

산마루 언덕마다 어쩔 수 없이 생긴 戰痕 부둥킨 채 마냥 울고 서 있다.     


서쪽 황막한 벌판 사이 숨어있는 石橋里의

꺼질듯한 불빛이 오직 볼 수 있는 유일한 반짝임.     

밤이슬 머금은 갈대 스치는 바람 소리.

중계리 벌판 건너 저기 외로운 白馬高地...     


人跡은 있을 수 없고

오직 自然만이 숨 쉬는 이곳에

한 옥타브 높인 어느 가련한 어릿광대들의 高音이 애처로우면서도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오늘 밤

달도 별도 이스러진 채

哨兵의 마음은 오두마니 서 있다. 


― 1977. 11. 30. 145GP에서




Guard Post 


G.P.

그것은 오리들의 놀이터.

때론 퍼덕대다가 

제풀 겨워 지쳐버리는 재미없는 놀이터.


G.P.

그것은 神의 失敗作.

눈뜨고 잠자는 絶妙한 우스꽝거리.

닭의 鷄肋이라고나 할까.


G.P.

그것은 未知의 바다 어느 곳에 숨어 

이따금 나타나는 怪奇 속의 幽靈島.

아름다운 노래 부르며

뱃사람 유혹하는 싸이렌의 魔島.


무인도에서 꾸는 꿈은 

역시 사람 냄새 잊어버린 퀴퀴한 꿈.

달아나야 빠질 곳은 毒氣 서린 深淵.


- 77. 11. 30. 145 GP에서 




미운 오리 새끼


풋풋한 솔향내 피우는 

옛 記憶의 구비구비 속에

나는 잠이 든다.


이것은 꿈일까?


오래 전 무심코 읽혀진 

안데르센의 童話 속에 나타난 스스로의 모습.

童話의 脫皮를 벗어버린 미운 오리새끼는 

갇힌 철장 안에서 오늘도 뭇 오리들의 조롱에 呻吟한다.


이것은 꿈일까?


머어신 陣을 짜고 

훠어 훠어~얼

남쪽 향하는 白鳥 떼의 列을 보곤 시름에 잠기는데

이윽고 날개 돋혀 날아볼 창공은 아직도 아득하기만 한


이것은 혹시 꿈이 아닐까???


- 1977. 11. 145GP에서 



附記


최전방 GP로 파견 나간 나는 그곳 수색대원들과 좀처럼 융화될 수 없었다. 항상 푸대접이요, 따돌림 받기 일쑤였다. 어떨 때는 그 악랄무쌍하던 소대나 중대본부 고참들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전화 상으로 같은 우리 방송요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콧날이 찡할 정도로 반가왔다. 머나먼 異域에서 太極旗를 볼 때의 感激이 그러할런지 모르겠다. 아뭏든 나는 철저히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었다. 




방송


이따위 題目의 落書가 다 있나 싶다.


"방송~~!"

"어이, 방송~~!!"

"방송요~~!"


문득 알파와 오메가를 연상시키게끔 

未明의 時間 속에서부터 하루의 警戒 勤務가 끝나는 瞬間,

아아니,

疲困에 쌓인 눈꺼풀들이 만날 때까지 귀청에 울리는 나의 호칭은,

"방송!"

그것이란다.


어쩌면 나의 號가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나의 새로운 이름이 될지도 모르는 

정겹고도(?) 구슬픈

"방송!"

그 한 마디에 3년의 軍 생활은 흐른다.


30개월을 넘겼다는 金兵長도 

"방송~"

180일 남았다고 악쓰는 朴上兵도 

"어이, 방송~~!"

비슷비슷하게 어울리는 또래의 李上兵도

"방송~~~"

이제 1년도 채 못 채운 沈一兵조차

"방송요~~~~"


억양은 千差萬別이나 모두 모두 "방송", "방송~", "방송~~"이란다.

나의 이름은 金放送이고, 별명은 열외되지 않는 "열외병"이란다.


아, 이따위 낙서가 생길 법도 싶다.



附記


최전방 중의 최전방 DMZ 속의 GP에 홀로 파견 나갔던 최초의 전방 생활은 흡사 人民軍 포로가 된 느낌이 들 정도로 따돌림과 얼토당토 않은 비난과 대우를 받았다. 그 모든 수준 이하의 행동은 GP長의 선악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는데, 불행히도 최초로 만난 GP長은 完全 수준 이하였다. 또 어디를 가나 누구든지 나를 '방송'이라고 불렀다. 때로 옳은 것을 인정하는 정의파 GP長을 만날 때면 잠시 나의 호칭은 '김상병', 후에는 '김병장'으로 바뀌기도 했다. 호칭이 바뀌면 모든 대우가 달라지게 마련인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 1977.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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