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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Nov 06. 2023

12. 최전방 1978

[ 제2부. 소오생의 志於學 ]

공자가 말한 '지어학志於學' 시기는 열다섯 나이였다. 요즈음은 이십 대 초반까지 해당한다. 그 당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군에 입대하여 최전선인 비무장지대에서 청춘을 보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시절에 긁적였던 '추억록'을 발견했다. 그야말로 낙서 수준의 부끄러운 기록이지만 당시로서는 너무 절실했기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여기 보관해 둔다.




‘濟州島’에서     


나는 노루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꿩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유심히도 많은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빙글빙글 돌아봅니다.

하룻밤을 지새우며 이중의 철책선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봅니다.     


슬픈 땅

북녘 기슭의 불빛도 보곤 하고

얼어붙어

이윽고 갈라져 버리는 冬天의 별의 祝祭

구경해 봅니다.    

 

새벽녘

노오란 고리로 달을 에워싼 달무리도

산기슭

안개의 출렁임도 나는 보았답니다.     


모두가

나의 작은 생활이요, 생명의 전부입니다.     


이곳에 오던 날

기러기는 날개를 번쩍이며 날아갔습니다.     

날아올 날은,

다시 날아올 그날은

언제쯤일까요... 

   

- 77. 12. 145GP에서

※ 나는 확성기부대 방송요원으로 혼자서 GP에 파견 근무를 나갔다. 경계 근무는 원래 방송병 임무가 아니라서 옆 사단인 28사단에서는 경계 근무를 서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파견 나간 20사단에서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방송병도 야간에 경계를 섰다. 주간에는 방송 업무, 야간에는 경계 근무로 격무를 한 셈이다.


야간 경계 근무는 저녁 근무(19:00~01:00)와 새벽 근무(01:00~07:00)로 나뉜다. 저녁 근무 시간은 어차피 저녁 식사도 하고, 점호도 하고, 등잔불도 준비하느라 시간이 어영부영 금방 지나간다. 이에 비해 새벽 근무는 취침 시간이 아주 짧다. 빨라야 밤 9시나 10시에 잠들고 오전 0시 30분에 깨운다. 당연히 누구나 저녁 근무를 좋아하고 새벽 근무를 싫어하기 때문에 일주일 단위로 교대를 했다. 그러나 미운 오리 새끼였던 나만은 언제나 새벽 근무 조에 배당되었다. 


게다가 나만의 생활 공간인 방송 벙커는 난방 시설이 없어서 추위에 좀처럼 잠이 들 수 없었다. '어서 잠을 자야 할 텐데...' 몇 겹씩 모포를 겹쳐서 끌어안고 벌벌 떨면서 간신히 잠이 들만 하면, 지상으로 연결된 작은 굴뚝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방송, 기상! 방송, 기상!"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에게는 악몽의 세월이었다.


GP에는 초소가 3군데 있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30분마다 다른 초소로 이동한다. 1시간 반 동안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난로가 있는 공막사에 가서 30분 휴식을 취하는 시스템이다. 3개 초소×2명, 휴식조 2명, 순찰은 선임하사와 고참병, 모두 10명이 경계에 투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 번도 순찰을 도는 걸 보지 못했고 2인 1조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늘 혼자 보초를 섰기 때문이다.


내가 맨 먼저 투입되는 곳은 언제나 대공對空 초소였다. GP에서 제일 높은 곳, 허공에 그대로 노출된 곳, 칼바람을 피하는 게 전혀 불가능한 곳, 겨울밤이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곳, 옷을 열 겹 스무 겹으로 껴입어도 5분만 서 있으면 발가벗은 것 같은 곳, 다시 5분만 더 서 있으면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찔끔찔끔 이상한 물(?)이 지려지게 만드는 곳... 그곳이 대공 초소였다.


나는 그곳에 언제나 새벽 1시 정각에 2인 1조로 투입되었다. 그리고 아침 7시까지 단 1분 1초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혼자서 대공 초소를 지켰다. 같이 투입된 초병은 어디 갔느냐고? 언제나 새벽 1시 5분이 되면 누군가 찾아와서 고참이 부른다며 호출해 갔다. 그리고는 밤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으니 당연히 다른 초소로 이동하지 못했고, 공막사에서 불을 쬐지도 못했다.


그래도 기적처럼 시간은 흘렀고 태양은 또다시 떠올랐다. 겨울 새벽의 비무장지대는 짙은 안개 바다가 된다. 다도해의 섬처럼 남과 북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안개 바다에 둥둥 떠있다가, 먼동이 터오면 안개가 걷히면서 조금씩 육지로 이어지는 모습이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아,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났구나...' 대공초소 높은 곳에서 그 장관을 지켜보며 하루의 경계 근무를 끝내면 저절로 눈물이 흐르곤 했다.

  



‘평양’에서     


소녀의 정갈한 마음처럼

九月의 하늘은 가을로 시작되다.

    

이제 곧 갈대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황무지 틈으로

흐르고 흐르는 逆谷川의 물결은,

古人詩魂속에 살아있는 大同江도 분명 아니고

슬픈 땅의 이름 모를 고지 위에 부벽루, 선죽교가 있을 리 없건만

非情의 고유명사는 개성’, ‘평양’...

가서 파묻힌 원한을 캐내어 새로이 號哭하고픈

그 이름이란다.     


四半世紀 ,

激戰의 회오리 속에 파묻혔다가

끓어오르는 忿怒 이겨내지 못해 되살아난 그 都市亡靈들이 울부짖다 지쳐

영원한 靈界에의 安住마저 포기한 채

이윽고

생소한 벌판 펼쳐놓은 외딴 고지 위에서

그곳 바라보다가 미처 떠나지 못하고 여기에 덮여 씌워진 것일까?     


때는 九月.

여기는 평양’!     

아름다운 기녀들의 로맨스,

詩人墨客들의 風趣 넘친 吟詠,

불붙는 대동강가의 丹楓...     


이는 비록 지금 없으나

기어이 다시 찾겠다는 의지가 덩그마니 펼쳐진

斷腸의 아픔 겪은 대지 위에 넘치고 있는 여기는,     

九月321GP ‘평양이란다.     


※ 그래도 분단의 현장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언제나 가슴이 먹먹했다.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너무나 힘겨웠지만 동시에 참으로 감개무량한 세월이기도 했다.




石橋里의 신화     


돌다리 마을! 아쭈, 그러고 보니 무슨 갯마을...!!’ 하는 식의 영화 제목 같기도 한데요, 하지만 실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DMZ의 바로 북쪽, 그러니까 저쪽으로 치면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의 이름이란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죠. 한데, 이 돌다리 마을에는 기가 막히게 예쁜 여인이 살고 있다는 傳說(?)이 있으니... 이름하여 석교리 이장 셋째 딸이라.   

   

언제부터인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독도’, ‘강원도’, ‘울릉도’, ‘제주도’, ‘금강산’, ‘유달산등의 GP에서, 가장 석교리와 가까운 개성’, ‘평양에 이르기까지, GP장 이하 모든 GP요원들에게 그녀는 공동의 선망 대상이었는데, 한 가지 고이한 일은 저마다 그녀와 동침 경력이 있으니 분명 자기 소유라는 것!      


, 이런 경우에는 先 旣得權으로 따져 5사단이 전방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우리 방송요원 차지가 아닐까 하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니까, 5사단 아이들 왈, 자기는 어젯밤 침투해서 동침했는데, 쪽바가지도 새것이 좋다고 그녀가 말했다나요? 이것 참 나 원. 어럽쇼? 고 옆에 있던 놈이 톡 나서더니, 자기는 어젯밤이 다 끝나갈 새벽에 하고 왔다나? 아니, 그럼 한강의 나룻배엔 손님이 합승이었던 모양이죠? 삭막한 De Militarized Zone 만이 지닐 수 있는 석교리의 신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 돌아가신 아버님의 고향은 강원도 이천 탑리다. 이천이라고 하면 경기도에 있는 걸로만 생각하지만 북한의 강원도에도 이천이 있다.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와 연접한 곳으로 금강산이 있는 통천의 서쪽, 백마고지가 있는 철원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데올로기 문제로 전쟁까지 치렀던 첨예한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러하듯이, 아버지께서도 좀처럼 옛날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석교리 - 돌다리마을'이라는 지명만큼은 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선명하다. 서울에서 고향에 가실 때 '석교리'에 도착하면 "아, 이제 집에 거의 다 왔구나" 하셨다는 것이다. 휴가 나왔을 때 석교리가 보이는 곳에서 근무한다고 말씀드리니 많이 반가워하셨다. 그곳을 내려다보며 근무하니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기다림     


어쩌다 고개 들면 그 마알간 하늘 속에

목말라 고개 떨구면 잔잔한 샘물의 수면 위에     

머얼리 거친 바람 지나는 외로운 산꼭대기에

무성한 갈대 춤추고 있는 황무지 사이에     


사라졌다 나타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보고 싶은 이여!     


숨어서 날 괴롭히느니 차라리 날더러 忘却케 해주오.

아니걸랑

가녀린 소식이나마 바람 위에 띄워주오.     



附記    


목마르게 다시 자유롭게 만날 그날을 기다려주는 사람이라곤 나에게는 없다. 또한 미치도록 그리운 사람도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모두 보고 싶다. 어느 특정한 대상은 없지만 어딘가 존재할 누군지 모르는 미지의 女人像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환경이었다.   



          

佳節     


每逢佳節倍思親.  옛날 唐 詩人은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그립고 보고픈 친지들 생각이 두 배로 난다고 하였다. 일반 사회와는 달리 생활이 制約된 군대에서, 그것도 최전방인 DMZ 안에서 명절을 맞이해 보았던 나는 그 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명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비무장지대 속의 GP에서는. 잘 나가다가도 쓸데없는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큰 명절이라면 아마 누구나 X-Mas, 설날, 그리고 秋夕 정도를 꼽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날 아침이면 GP의 식탁은 하얀 쌀밥에 닭고깃국이나 소고깃국, 계란, 사과, 떡 등 호화롭고 다채로운 메뉴로 가득해진다. PX마저 없는 GP에 게다가 갑자기 위문품으로 도착한 과자나 사탕 또는 음료수들이 식탁에 곁들여지면, 모두 모여 앉아 잠시 할 말을 잃고 먹을 것 구경을 한다. 마치 입으로 식사하는 것이 아닌 눈으로의 식사인 듯. 


후방에서 멀리 온 물건 탓인지 자꾸만 두고 온 짝순이, 고향 집, 흘러간 추억 등이 走馬燈처럼 뇌리를 스치며 머리를 어지럽힌다. 상념을 떨치고자 고래고래 노래도 불러보고 춤도 추어 보지만, 여기는 최전선! 경계에 휴일은 없다. 야간 근무를 수행하여야 후방의 친지들이 이 명절을 재미있고 즐겁게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편지 보내기     


망망대해에 있는 孤島에 표류한 사람이 인간을 그리워하듯, 이곳 GP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 특히 민간인, 아니 솔직히 젊은 여인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리라.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장 보고 이야기하고 만지고 껴안고 좋아할 수 없는 처지일진대, 그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무엇일지.    

  

이런 등등의 필요충분조건에 의해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군대생활 중 이것이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요, 사르마다 없는 고무줄이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 便紙란 것이 아니시겠어? 다행히도 사회 있을 때부터 끼가 다분하야 숱한 ♥♥ 따위를 보유하신 유비무환을 좌우명으로 삼는 분들은 또 모르거니와, 나처럼 순진무구하거나(?) 능력 부족이었던 녀석들은 편지를 쓰고 싶어도 쓸 사람이 있어야지.


하지만 삭막한 군 생활 중에서도 고독하기 짝이 없는 GP생활을 어찌 편지 없이 보낼 수 있으랴. 이리하여 편지 보내기 운동에 필수적인 수단으로 동원된 것이 라디오와 잡지란 것인데, 잡지 속의 주소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라디오야 어디 그런가? 마냥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아나운서의 그 빠른 말이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는 그 님의 주소! 그러기에 잡지 주소는 많은 경쟁자가 있지만, 라디오 주소는 경쟁자가 별로 없으니 답장 올 확률이 높다 이거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GP의 위생병인 엄형식 선수는 740분부터 시작된 <박상규, 송도순과 함께> 프로에 나오는 주소를 열심히 받아쓰고 있는데, 암만 그래야 내게는 흥미가 안 일어나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마음이 늙은 걸까, 자만심이 많아서일까...




                

約束     


오늘보다

더 일찍이었던

그 어느 날, 약속된 날이 있었습니다.


약속된 오늘이기에

나는 여기에 왔습니다.


바로 오늘

또 다른 약속할 날이 있습니다.


약속이 무엇인지

이번엔 아직 모릅니다만

후일 속에 약속은 끝날 것입니다.


또 하나의 후일 속에 약속된 그날

햇빛도 춤을 출 것입니다.     



附記     


往十里驛을 출발하여 論山 땅으로 달려가던 그때 그 호송열차 안에서 나는 눈을 감고 이것이 꿈이 아닌가, 내가 가위에 눌려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줄곧 약속된 그날을 향해 걸어왔다. 오늘 드디어 약속된 그날에 나는 서 있다. 이제 또 어떤 약속된 날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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