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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Nov 09. 2023

13. 마지막 report를 읽으며

[ 제3부. 소오생의 而立 ]

※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는 말이 있다.《논어論語 · 위정爲政》에서 공자가 삶의 연령 대별 특성을 간파하며 언급한 말이다. 짧은 네 글자지만 검토할 점이 제법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1부. 공자의 리즈 시절] 〈05. 서른 살에는 캡틴이 되어라〉에서 다룬 적이 있다. 요점을 정리해 본다.


( 1 ) '립立'은 두 가지 차원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① 경제적인 '자립自立' ② 가치관의 '정립鼎立'.

필자는 '삼십이립三十而立'을 '서른 살에는 캡틴이 되어라'라고 의역했다. 서른 살 정도가 되면 자기 인생 항로의 선장이 되어야 한다는 뜻. 여기서 '서른 살'은 대충 '30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2 ) 우리말에서도 '불혹不惑'은 40, '지천명知天命'은 50, '이순耳順'은 60을 지칭한다. 모두 《논어 · 위정》에서 공자가 했던 말이다. 그러나 일흔 살은 너무 길어서인지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欲不踰矩'라고 하지 않고 두보杜甫의 시구詩句에서 비롯된 '고희古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열다섯 살이나 서른 살을 '지어학志於學', '립立'이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전고典故를 이용하여 서른 살을 한자로 비유하고 싶다면 '립立'이 아니라 '이립而立'이라고 해야 한다. 문법적으로는 '립立'이 맞지만, 단음절로 말하면 못 알아듣거나 발음상 어색하기 때문에 아무 뜻이 없는 허사虛詞 '이而'를 덧붙여서 쌍음절 단어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중국어의 관례이기 때문이다. 《논어》의 첫 번째 챕터인〈학이學而〉도 비슷한 사례다. 이 두 글자만으로는 문법적으로 성립하지 않지만, 뜻과 상관없이 편의상 해당 챕터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두 글자를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 나의 30대는 어떠했을까? 찾아보니 30대에 쓴 글은 거의 없다.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만 35세에 전임강사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는 꽤 일찍 교수가 된 셈이지만 그 당시 중문학계의 상황으로서는 상당히 늦게 교수 임용이 된 것이었다.) 교수 임용 이전에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발버둥 쳤고, 임용 이후에는 학생들과 부딪치며 교수로서의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정신없이 지내느라 차분하게 글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경제적 형편은 교수가 되고 난 후에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졌다. 교수가 되기 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강사를 할 때는 한 달 수입이 약 65만 원 정도였는데 전임강사가 된 첫 월급은 60만 원으로 수입이 줄어들었고, 교수가 되니 이런저런 사회 활동으로 여기저기 돈 낼 일만 대폭 늘어났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 당시 전셋값이 폭등했는데, 1,000만 원이던 보증금을 일 년 사이에 집주인이 2,500만 원으로 늘려달라고 요구했을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다른 교수들은 잘만 사는 것 같은데...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한 교수 중의 한 명이 아닐까 싶었던 시절이었다.


이래저래 나는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만큼은 정말 즐겁고 재미있고 보람찼다. 전심전력으로, 최선을 다해, 가르치는 일에 매달렸다. 그 시절에 쓴 두 편의 글이 학교 신문에 실려있기에 이곳으로 옮겨 보관한다.




마지막 report를 읽으며     


나는 시험을 보지 않는다. 철저한 반복 훈련이 요구되는 언어 관련 과목이라면 또 모를까, 정서의 함양을 목표로 하는 문학 과목을 주로 맡은 지라, report라는 다소 귀찮은 평가 방법을 주로 선택하고 있다.


출석도 거의 부르지 않는다.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의 매주에 걸쳐 학생들이 제출해야 하는 report를 읽고 곧바로 체크하여 돌려주다 보면 누가 결석했는지 저절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 후유증은 자못 심각하다. 시험이 없다는 말만 듣고 처음에는 신이 나서 수강 신청한 학생들도 까다로운 내 요구에 차츰 나를 미워하게 된다. 주제가 있는 글을 써라, 원고지 표기법에 맞춰 써라, 현란한 외적 치장보다는 느낌이 살아있는 따뜻한 글을 써라…


급기야 매주 제출하라는 요구에 이르면 학생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른다. “어휴, 귀신은 대체 뭘 하나? 저걸 안 잡아가구.” 물론 직접 대놓고야 차마 그런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안 봐도 뻔하다. 늘 귀이개를 지니고 다녀야 할 정도로 귀가 자주 간지러운 걸 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 report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지난 학기 말, 학생들이 제출한 마지막 report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전전긍긍하던 그 무렵, 나는 몹시 우울해 있었다. 몇 가지 충격적인 일들을 접하고, 기존의 유별난 교육 방법과 평가 방법에 대한 깊은 회의와 갈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게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은 교양과목인 <중국문화와 역사 기행> 수강생들의 report였다. 수강생 300명을 분반하여 강의했던 그 강좌는, 중국 황하와 장강 일대로 함께 가상 여행을 떠난 시간이었다.


강의의 성격이 그러하니만큼, 나는 딱딱한 강단 위의 교수 신분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함께 여행을 떠난 우리 젊은 학생들의 충실한 guider가 되고자 애썼다. 그리고 나의 그러한 시도는 일정 정도 효과를 본 듯도 싶었다.


문제는 매주마다 제출하기를 요구했던 report였다. 교양 강좌인데 얼마나 부담감이 클까? 어쩔 수 없이 report를 써내기야 하겠지만, 그들이 내심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무척 염려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약 절반 가량의 학생들이 마지막 report를 다 쓰고 난 뒤에 격려의 편지를 보내준 것이다.


장문의 글도 꽤 많았고, 형형색색의 어여쁜 편지지에 따로 쓴 것도 상당히 많았다. 감동의 물결이 가슴 가득히 밀려왔다. 한 글자, 한 글자, 그 정성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은 내가 너무 센티멘탈하기 때문인가? (표지 사진 참고)


문득 어느 팝송 가사가 생각났다. “Yellow ribbon ties on the oak tree...” 떡갈나무 가지에서 펄럭이는 수많은 노란 리본들, 그 감동적인 스토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자기도취일까?


나는 나의 여행객들이 본 Guider에게 건네준 그 ‘팁’을 정성껏 스크랩해 놓았다. 노란 리본 하나하나를 나뭇가지에 묶는 심정으로. 아마도 갈등과 회의는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의 스크랩은 그 두께를 더해 나가리라 믿는다.



※ 위의 그림은 전공 학생들이 스승의 날에 준 선물 속에 있었던 그림이다. 누가 그렸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① 왼쪽 하단에 내가 학생들이 숙제로 제출한 '중국어 일기'를 교정해주고 있는 그림이 보인다. 대만대학 선생님들께 배운 것이다. 내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보고서를 아주 꼼꼼하게 읽어보시고 하나하나 다 고쳐주셨다. 그래서 나도 배운 대로 실천했다. 그게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② 가운데는 내가 선물을 받고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스승의 날'을 아주 싫어했다. 행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나는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며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안내자'일뿐, 감히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특히 내키지 않았다. 주고 싶으면 카드나 편지를 달라고 했다.


에피소드 하나. 언젠가 최고급 양주를 받은 적이 있었다. 졸업하면 다시 가져와서 같이 마시자며 돌려주었다. 졸업 후 그 친구가 학교에 왔다. "왜 빈손으로 왔냐? 그 양주는 왜 안 가져왔어?" 그랬더니, "선생님도 참, 아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겠어요?" 하더군. 쩝. 나도 양주 좋아하는데... 내가 잘못 가르친 건가. ㅠㅜ


③ 왼쪽 상단에서 가운데 부분은 내가 24시간 학생들과 지내는 모습이다. 나는 학과 1호 교수로 2학기에 부임했는데, 와 보니 학생들의 중국어 실력이 엉망진창이었다. 매일 보강을 하면서 기초부터 다시 가르쳤다. 테스트를 받고 통과해야 집에 갈 수 있게 했다.


저녁에는 거의 매일 학생들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집에 와서 술을 마셔보지 않은 학생이 거의 없었다. 남학생들은 새벽 2, 3시까지 나를 집중 공격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침 첫 수업에 늦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말짱한 정신으로 수업 시작 5분 전에 강의실에 도착해 있었다.




떠나는 님을 위한 그리움     


이제 짐을 꾸리고, 떠날 채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우리 중문학과 4학년 여러분, 읽어보세요. 사랑하는 우리 학교의 모든 벗님들도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신다면 더욱 좋구요.


도서관 앞 은행나무가 노오란 가을 잎이 되어 떠나가고 있네요. 채플실 뒤 뽀뽀 동산의 단풍나무도 빠알간 가을로 떠나가고 있군요. 다가오는 엄동설한의 사회생활을 준비하며 떠나가는 그대들처럼. 내가 이곳 ○○동산에 찾아와 떠나보냈던 그 세월처럼.


지나간 4년, 여러분과 함께 했던 그 순간들은 참으로 어여쁜 시간이었죠. 첫눈이 펑펑 쏟아지던 관악산을 시작으로 남한산성, 유명산, 아침고요수목원으로 매년 한 번씩 강의실을 옮겨보았던 우리들의 야외 수업. 사승봉도의 끝없는 모래사장에 쌓아본 모래성의 수학여행. 밤을 새워 이를 갈며 연습했던 원어 연극 <배비장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정성껏 제출해 준 하나하나의 보고서에 담긴 그 마음을 읽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며 좋아했던 그 소중한 순간, 순간들을 잊지 못합니다. 나의 소중한 ‘그리움’ 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하지만, 여러분. 그리움은 아련한 지난 세월 속의 가슴 시린 추억만은 아니랍니다. 아지랑이와도 같은 지난 세월 추억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서성이는 것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그리움’이 아닐 거예요.


진정한 ‘그리움’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랍니다. 아직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삶과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움’이 아닐까요? ‘아프락사스의 알’을 깨고 우물 안의 작은 세계를 뛰쳐나와, 삶과 사랑과 학문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더 넓고 큰 세계로 떠나는 여행의 첫출발, 그 원동력이 바로 진정한 ‘그리움’ 일 겁니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 당부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절대적인 가치, 즉 하나님과 우주, 대자연, 진리, 생명, 영원한 사랑, 학문 앞에서는 반드시 겸손한 마음으로 한없이 작아져 달라구요. 그러나 타인과 함께 하는 삶에 있어서는 절대로 열등감에 빠져 자신이 지닌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꼭 기억해 주세요.

  

나는 말이죠, 우리 학교를 참으로 사랑한답니다. 요새 비록 몇 가지 일로 학내가 어수선한 분위기이지만, 모순투성이의 인간 세상 사는 일에 그 정도 일마저 없을라구요? 아직도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답니다. 여러분도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만한 그런 우리 학교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걱정하지 말고 떠나셔도 돼요. 졸업하면 학교는 싹 잊어버려요. 공연히 나를 찾아오지도 마세요. 사회생활은 그리 쉽지 않을 테니까요. 모쪼록 감상주의에 빠져 지나간 시절만 붙잡고 있지 말고, 열심히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세요.

 

하지만 삶이란 순탄할 때보다는 역경이 더 많은 법이니까, 혹시라도 정말로 어렵고 힘들 때가 있다면, 그래서 내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느낄 때라면, 그렇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아무리 바빠도 꼭 함께 소주 한잔 나누면서 여러분의 힘든 손을 잡아드릴게요. 알았죠?

도서관 앞 은행나무가 노오란 가을 잎이 되어 떠나가고 있네요. 엄동설한의 사회생활을 준비하며 떠나가는 그대들처럼...


※ 학생들의 졸업... 그 시즌이 다가오면 나는 늘 감상주의에 빠졌다. 대학원이 없는 학교라서 아무리 성적이 좋고 아무리 가깝게 지냈던 학생이더라도 졸업하면 그뿐이었다. 그동안 어렵게 쌓아놓았던 인간관계도 그것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나는 그동안 무엇 때문에 그렇게 치열하게 지내왔던가. 허망했다. 중국 북송 시대의 가객歌客 유영柳永의 노래 가사가 자꾸만 생각났다.


다정한 사람들은

예부터 헤어짐이 너무 아파  多情自古傷別離,


어찌 견딜까 

차가운 가을날의 이 소슬함을... 更那堪, 冷落淸秋節.


-〈우림령 雨霖鈴〉에서


위의 글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나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었을 게다. 교수로서의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혼란 속에 지냈던 시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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