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오생 Nov 29. 2023

05. 바람과 달은 임자가 없는 법

〈임고정의 한가함〉

※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고전과 글쓰기》 매거진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앞으로 이 코너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글을 올리겠다고 다짐해 본다.


※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앞서 읽어본 글의 핵심을 정리하며 기억을 더듬어보자.


( 1 ) 동아시아 학문의 기본은 글쓰기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잘할 수 있을까? 장기간에 걸친 다독多讀과 다작多作을 통해 스스로 익히는 방법밖에 없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완성시키는 일종의 수양이다. 이때 다독의 대상은 먼저 고전古典이 되어야 한다. 특히 동아시아의 고전을 많이 읽어야 내면의 깊이가 생긴다.〈02. 스승이 일러준 글 잘 쓰는 비결참고.

 

( 2 ) 글을 쓰려면 먼저 마음속에 묘사하려는 대상의 전체적인 모습이 다 떠오를 때까지 숙시熟視, 오랫동안 내면에서 생각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나무를 그리려면 뇌리에 그 전체적인 모습이 다 그려진 다음에 글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 이른바 집필숙시執筆熟視하여 흉중성죽胸中成竹 하라는 이야기다.  〈03. 맛있는 글은 숙성이 필요하다참고.


( 3 ) 세상을 멀리서 거시적으로 바라보라. 글쓰기는 허정응신虛靜凝神,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의 뼈대를 세워나가는 수양의 시간이다. 고난의 긍정적인 가치는 현상세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주의 정신과 함께 하고자 하는 섬세한 마음의 안테나로 찾아나가야 한다. 그게 동아시아의 글쓰기 정신이다. 글쓰기는 동아시아 '학문'의 출발이요, 마지막이다. 〈04. 선장은 멀미를 하지 않는다참고.




오늘의 키워드는 '한가로움'이다. 감상할 작품은 〈임고정의 한가함 皐閑. 지난번에 이어 중국 북송 시대의 천재 문인 동파東坡 소식蘇軾(1037~1101)이 쓴 글을 소개한다. 글은 아주 짧고 쉽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오래오래 긴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을 제대로 느끼고 감상하려면 글에 대한 충분한 '사전 정보 schema'가 필요하다. 정보가 주어지면 미리 생각에 잠겨보자. 언제, 어디서, 어떠한 상황에서, 왜 이 글을 지었을까? 내가 동파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떤 식의 글을 쓸까? 등등...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언제: 동파 나이 44세에. (나는 그 나이 때 무엇을 했던가. 생각 수준은 어느 정도였던가...)

◎ 어디서: 장강長江 중류에 위치한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 (황주? 어떤 곳일까? 산수 지리는? 특색은?)

◎ 상황: 유배를 가서 지은 작품. (왜 유배를 가게 되었지? 어떤 곳에서 뭘 먹고살까? 어떤 기분일까?)

◎ 제목: 임고정?(정자 이름이네? 거기로 놀러 갔나?) 한가함? (그야 뭐, 귀양 갔으니 당연히 할 일이 없겠지.)


자, 주어진 정보 내에서 생각에 잠겨보셨는가?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글을 쓸 것 같으신가? 동파는 또 어떤 내용의 글을 썼을 것으로 짐작되시는가? 네? 왜 유배를 가게 되었는지도 말해달라구요? 좋다. 좀 더 자세한 사전 정보를 드릴 테니, 여러분이 동파라면 어떤 심리 상태로 어떤 식의 글을 쓸 것 같은지, 계속해서 생각해 보시며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동파의 일생을 가름하는 가장 큰 분기점은 이른바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이다. [각주 1] 이 사건을 기점으로 그의 후반부 인생은 고난의 유배생활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신법新法, 특히 청묘법靑苗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각주 2]


청묘법이란 풍작이 예상되는 해에는 농구와 맥종麥種을 더 많이 구입할 수 있도록 관에서 원하는 농부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수확기 때 원금과 이자를 보리로 받아서 군량미로 사용한다는 내용으로, 그 자체는 매우 훌륭했다. 문제는 이 계획이 성공리에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해마다 모든 백성들이 강제적으로 돈을 빌려야만 했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풍년에만, 그리고 원하는 사람에게만 빌려준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실적을 거두어야만 했던 관리들의 압력으로 거의 모든 가정들이 관에서 돈을 빌려야만 했다. 그리고 석 달마다 한 번씩 10%의 수수료를 포함하여 30%에 육박하는 이자를 내야만 했다. 정부가 거의 날강도 집단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동파는 30대 후반부터 중앙 조정에서 좌천되어 외지를 전전한다. 신종神宗 황제가 채택한 신법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동파는 7, 8년 동안 항주杭州ㆍ밀주密州ㆍ서주徐州ㆍ호주湖州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청묘법의 현실적 문제점을 목격하고, 우회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시니컬하게 이를 비판하는 시들을 많이 썼다.


당대 최고의 문명을 떨치고 있던 그였던지라 즉각 커다란 반향이 일어났다. 일반 독자들은 그의 시니컬한 유머에 즐겁기 한량없었겠지만 비판받는 당사자로서는 괘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을 터, 결국 정적들은 군사를 보내 호주태수로 재직하고 있던 동파를 체포하여 경사京師인 개봉開封의 어사대御史臺로 압송해 갔다. 그의 나이 43세 때의 일이었다.



[각주 1] 감찰기관인 어사대는 관내에 까마귀 둥지가 있는 측백나무가 있어서 '오대 烏臺'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곳에서 동파가 넉 달 동안 갇혀있던 사건을 '오대시안'이라고 한다.

[각주 2] 신법은 왕안석王安石(1021~1086)이 제정하고 시행하였으나, 1076년 그가 은퇴한 이후로는 권력을 장악한 여혜경呂惠卿 일당이 계속 시행하였다.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① 균수법均輸法, 시역법市易法과 청묘법靑苗法 등의 국영사업 추진. ② 면역법免役法, 면행법免行法 등의 새로운 과세 제도 시행. ③ 보갑법保甲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등의 등기 제도 시행.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청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동파가 갑자기 밀어닥친 관군에게 체포되어 끌려나가던 그 순간이었다. 아내가 통곡을 하며 따라 나왔다. 문득 동파가 발길을 멈추고 아내를 돌아보며 이런 말을 했다.


"여보, 당신 양박楊朴 처사라는 사람, 알지?"

"???"

"아 왜, 선황 폐하 때 초야에 묻혀 살던 그 유명한 은사 있잖아."

"근데...요??"

"그 양반이 어느 날, 황제 폐하 명을 받은 관군들에게 갑자기 끌려갔었대요."

"그래... 서요?"

"그때 그 양반 아내가 시를 읊으면서 남편을 전송해 주었답디다. 당신도 그 시를 좀 읊어주지 않으려오?"

"무슨 시였는데요?"

"자, 잘 듣고 나한테 그대로 좀 읊어주시구려."


앞으로는 술독 속에 처박혀 지내질랑 마시구려. 更休落魄耽盃酒,

오만방자 시 따위를 잘난 체 읊지도 마시구요. 且莫猖狂愛詠詩。

이제는 붙잡혀서 관가에 끌려가게 되었으니, 今日捉將官裏去,  

여차하면 당신의 대가리와 영영 이별하실게요! 這回斷送老頭皮。


통곡을 하며 울던 아내가 그 순간, 푸핫~ 웃음을 터트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동파의 유머다. 아니, 그 절체절명의 긴박한 순간에 어떻게 그 시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렇다. 동파의 유머는 위기의 돌발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유머는 어설픈 말장난이 아니었다.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지성의 안목으로 찾아낸 '여유와 긍정의 세계'였다. '한가로움'이란 바로 그 세계를 의미한다.




( 1 ) 글의 제목에 관하여 :


이 글의 제목은 〈임고정의 한가함 皐閑이다. 어떤 판본에는 〈범자풍에게 보내는 편지 與範子豊書 〉라고도 되어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前者의 제목을 지지한다. 옛날에는 글이나 시의 창작 동기를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제목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춘수 시인이 노래했듯 모든 언어는 '실제'에 부합하는 '이름'으로 불러주어야만 비로소 빛나는 '꽃'이 된다. 어쩌면 동파도 그 점을 인지하고 처음에는 후자後者인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가 나중에 전자와 같이 정식으로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 2 ) 장강長江 지역의 주요 지명과 임고정臨皐亭의 위치 :


이 글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장강長江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장강은 우리가 흔히 양쯔강揚子江 또는 양자강으로 잘못 알고 있는 바로 그 강이다. 길이 6,300km로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길다는 바로 그 강을 중국 사람들은 '장강'이라고 부른다. 양쯔강(양자강)은 장강이 하류 지역을 지날 때의 명칭이다. 19세기에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을 침탈할 때 그 이름을 장강 전체의 이름으로 착각해서 사용하게 된 오류를, 우리가 그대로 베껴서 틀리게 사용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장강은 강이 길다 보니 지류도 많고 지역마다 이름도 많다. 아래 지도를 보면서 이야기를 들으시라. 청해성靑海省 탕구라산맥에서 발원되었을 때는 타타하沱沱河, 티베트고원을 거칠 때는 통천하通天河, 다시 남으로 운남雲南을 향해 내달릴 때의 이름은 금사강金沙江이다.


이름도 아름다운 이 금빛 모래의 강은 다시 사천四川 땅을 종단하는 네 개의 장강 지류와 차례로 만나 이윽고 중경重慶(지도 번 도시)에서 거대한 물줄기를 이룬다. 그리고 삼협三峽의 좁고 거센 협곡들을 힘겹게 빠져나오다가, 탁 트인 일망무제의 거대한 호수와 만난다. 중국문학의 또 다른 산실産室이자, 대륙에서 세 번째로 커다란 동정호洞庭湖라는 호수다.


호북성湖北省은 이 호수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호남성湖南省은 호수의 남쪽 땅이라는 뜻이다. 아무튼 이 호수는 장강 중하류에 사는 주민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름 우기에는 넓이가 세 배로 불어나며 장강의 물을 저장해서 하류의 범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 벌어진 곳도 바로 이 호수의 동북쪽이다.  

장강은 동정호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흐르다가 무한武漢(지도 번 도시)에서 한수漢水와 만나면서 그야말로 바다보다도 더 넓어진다. 동파가 유배를 간 황주(★의 곳)는 바로 그 무한의 외곽에 위치해 있다. 그 황주의 성 남쪽 조종문朝宗門 밖의 장강 강변에 작고 허름한 역관驛館이 있었다. 바로 이 글에 등장하는 임고정이다.


필자가 과거 답사했을 때의 인상으로는 이곳 황주가 아마도 전 중국 대륙에서 가장 광활하게 트인 곳이 아닐까 싶었다. 동파의 호방한 정신세계와 광대무변한 문학세계는 이곳 황주에 귀양 와서 활짝 꽃 피우게 된다. 대자연과 인간은 이렇듯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대시안으로 어사대에 투옥되어 있던 동파는 1080년 1월 1일 단련부사團練副使의 직책을 제수받고 한 달만인 2월 1일에 황주에 도착한다. 하는 일도 거의 없고 녹봉도 거의 없는 직책이었다.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동파는 가장 기본적인 먹고 자는 일을 해결하는 게 엄청난 난제였다.


끼니를 해결하는 일도 너무 힘들었지만, 당장 숙소가 문제였다. 임시로 정혜원定惠院이라는 암자에 묵다가 5월 달에 이곳 임고정으로 옮겼다고 한다. 참고 삼아 말하자면, 중국의 정자는 사방이 트인 곳도 있지만 벽을 막아놓고 거주할 수 있게 해 놓은 곳도 많다. 그래봤자 한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동파와 그 식솔들은 무려 2년이나 살게 된다. 이 글은 바로 임고정에서 살기 시작한 그 무렵에 지은 글이다. 독자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떤 심리 상태가 되었을까? 글을 쓴다면 어떤 내용일까? 미리 생각해 보고 글을 읽으면 훨씬 흥미로울 것 같다.

 



【번역】 임고정에서 아래로 팔십여 걸음만 내려가면 큰 강물이 흐른다. 그중의 절반은 아미산蛾眉山의 눈 녹은 물이다. 내가 밥을 해 먹고 목욕을 하는 물은 다 거기서 얻어온 것이니, 구태여 고향에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강산江山의 바람과 달은 원래 임자가 없는 법. 한가로운 사람만이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로다. 듣자 하니 범자풍範子豐이 새로이 정원과 연못이 린 저택을 지었다고? 강산의 명월과 비교할 때 무엇이 더 나을까? 못한 게 있다면 그저 양세兩稅도 못 내고 조역전助役錢도 없다는 것일 뿐이로세!


【원문】臨皐亭下八十數步, 便是大江, 其半是峨嵋雪水, 吾飲食沐浴皆取焉, 何必歸鄉哉! 江山風月, 本無常主, 閑者便是主人。聞範子豐新第園池, 與此孰勝? 所不如者, 上無兩稅及助役錢爾!


【설명】


아미산蛾眉山 : 위의 지도에서 B의 산. 해발 3,092m. 중국 땅에서 가장 총기가 넘친다는 사천 땅 최고의 명산이다.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이 도교의 도사가  되어 검술을 연마한 곳이며, 동파가 태어난 미산眉山 마을을 산 자락에 품었으니, 산천의 정기를 한 데 모아 천재 문인들을 키워낸 천하의 명승지다. 특히 아미산 정상에서 장쾌한 일출을 맞이하면 누구나 인생에 새롭게 눈을 뜨는 잊을 수 없는 여행길이 된다.


아미산과 미산은 오늘날 유명한 관광지로 인프라를 잘 갖추어 놓았다. 누구나 깜깜한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독자 여러분도 꼭 가보시라. 3천 미터 절벽 위에서 장쾌한 일출을 맞이하며 호연정기浩然正氣가 무엇인지 마음껏 만끽해 보시라. 동파가 태어난 삼소사三蘇祀에서도 꼭 하루 묵어보시라. 중국문학 최고의 천재 문인 가문의 묵향이 저절로 온몸에 배어들 것이다.

(좌상) 아미산 정상.  (좌하) 아미산 정상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필자. 1996년 4월. (우) 동파가 태어난 집, 미산 삼소사.

◎ 범자풍: 구양수와 함께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한 북송 시대의 유명한 역사가이자 문인인 범진範鎭(1007~1088)의 세 번째 아들이다. 동파와 동향인 사천 사람으로 가문 간에 친분이 돈독했다. 부친 범진은 동파가 오대시안으로 하옥되었을 때 자기 자신도 동파와의 친분으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동파를 위해 상소를 하며 적극 변호한 바 있다.


◎ 양세兩稅: 봄가을에 두 번 내는 세금.

◎ 조역전助役錢: 당시 면역법에 의해 지방 토호들이나 관리들이 복역復役하는 대신 지불하는 돈.


【감상】


기가 막히도록 멋들어진 명문이다. 황주로 유배 온 동파가 거주하게 된 곳은 강변에 있는 정자였다. 아무리 유배를 왔어도 그렇지, 공공장소인 정자에서 살아야만 한다니, 그 불편이 오죽하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가슴이 쓰라리고 우울증이라도 걸릴 그 순간에, 동파가 보여주는 이 호방한 정신세계는 읽는 이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하여 준다.


동파의 고향은 사천四川 미산眉山. 유명한 아미산蛾眉山을 인근에 두었다. 그 아미산의 계곡물은 민강岷江과 대도하大渡河로 들어가, 의빈宜賓에서 금사강金沙江과 만나 장강이 되어 수천 리를 달려 내려와 황주 임고정 밑을 지나간다.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목욕하니 고향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동파는 말한다.


일부러 거금을 마련하여 아무리 멋진 정원을 만든다 한들, 그 집이 임자 없는 이 바람과 저 둥두렷한 달만 하겠는가! 그런데 이 대자연은 오직 '한가로운 사람'만이 그 주인이 될 수 있단다. 동파가 말하는 이 '한가로움'이란 대체 무엇일까? 단지 시간적인 여유일까? 그럴 리가 없다. 세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참된 지혜에서 우러나온 '마음의 한가로움'일 것이다.


유배를 와서 아무 할 일이 없는 처지이니 몸이야 물론 한가롭겠지만, 동파처럼 거시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마음마저 한가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이 기막힌 명문에도 아쉬움은 있다. 동파가 글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소오생 버전으로 읽어보자.


범자풍, 자네가 새로 근사한 집을 지었다며? 나는 바람과 달만 있는 여기 이곳 임고정에서 살고 있지만 자네가 하나도 안 부럽다네. 자네보다 못한 게 있다면, 그저 조정에서 달라고 아우성치는 그 세금을 못 내주고 있다는 것뿐이지. 크크크. 


맨 마지막에 큭큭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신법을 비꼬는 글을 써서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고 여기로 유배 온 처지에, 제 버릇 개 못준다고 기어이 한 마디 덧붙여서 정적들을 비꼬고 있는 동파를 보라. 물론 막역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이니 안심하고 농담조로 말한 것이겠지만, 내면적 수양이 완성된 상태라고는 할 수 없다. 불편하고 억울한 마음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허정응신虛靜凝神,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의 뼈대를 세워나가는 수양의 시간이다. 이 글은 '마음의 한가로움'을 이야기했지만, 그 '한가로움'은 아직 세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참된 지혜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아직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것이고, 정신이 하나로 모이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동파의〈밤에 승천사를 노닐다 記承天寺夜遊〉라는 짧은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역시 황주 유배 시기에 지은 글로, 오늘 이 글과 마찬가지로 '한가로움'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동파의 '한가로움'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비교 감상하면 좋을 듯하다.




[ 표지 사진 ]

◎ 명明, 문백인文伯仁(1502~1575),  〈추산유람도 秋山游覽圖〉의 일부.


매거진의 이전글 04. 선장은 멀미를 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