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감상할 작품의 제목은 〈밤에 승천사를 거닐다 記承天寺夜遊〉. 역시 중국 북송 시대의 천재 문인 동파東坡 소식蘇軾(1037~1101)이 썼다. 은빛 흐르는 아름다운 달밤의 낭만적 풍광이 담긴 대단히 짧은 글이다. 한 폭의 그림이랄까, 한 수의 서정시랄까? 눈을 감으면 감미로운 월광곡의 멜로디마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도 겨우 84 글자가 동원되었다. ‘문이명도文以明道’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던 중국 산문에 ‘예술 정신'을 가미하여, 마침내 순수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동파의 마술 같은 문장 솜씨가 멋들어지게 발휘된 작품이다. 먼저 사전 지식 몇 가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글의 성격
이 글은 '유기遊記'에 속한다. 요새 말로 하자면 '기행문'이다. 중국 산문의 역사에서 최초로 이런 장르의 글을 쓴 사람은 역도원酈道元 (466~527)이라고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북위北魏의 지리학자. 고대 중국의 수로水路를 기술한 《수경 水經》이라는 얄팍한 두께의 지리서에, 지역적 특색 등의 상세한 설명을 보충하여 40배 분량의 《수경주 水經注》라는 거작을 썼다. 그 책은 단순한 기록을 위주로 하지만, 때로 예술성이 뛰어난 기행문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장강長江 삼협三峽의 새벽을 묘사한 부분을 보시라.
서리가 내려앉는 맑은 날 새벽이면 차가운 숲 속의 여울도 소리 죽여 흐른다.
텅 빈 골짜기에는 늘 잔나비 우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진다.
메아리 되어 맴돌다가 한참만에 사라지는 그 처량한 소리...
그래서 어부들도 이렇게 노래 불렀다.
파동巴東 땅엔 삼협이라,
기나긴 무산巫山의 협곡.
잔나비가 세 번 울면, 님의 소매 자락 젖어들고…
每至晴初霜旦, 林寒澗肅, 常有高猿長嘯, 屬引淒異, 空谷傳響, 哀轉久絶.
故漁者歌: “巴東三峽巫峽長, 猿鳴三聲淚沾裳."
장강 삼협의 새벽
그로부터 약 300년 후, 역도원의 이러한 수법을 이어받아 예술적 요소를 가미해서 산수 기행문을 쓴 사람이 있었다. 당나라 때의 문인, 유종원柳宗元(773~819)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영주永州라는 밀림 속 오지로 유배를 가서 폐인 생활을 한다. 한없이 답답하고 울적한 심정으로 인근 산수를 쏘다니며 글을 쓴 것이 중국 기행문의 출발인 '영주유기 永州遊記'다.
그의 기행문은 크게 두 가지 특색이 있다. ① 산수를 의인화하여 작가의 심정을 빗대어 묘사했다. ② 버림받은 황폐한 땅, 영주를 생기 발랄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런 특색으로 후세의 칭송을 받았다. 나중에 그의 기행문을 차근차근 감상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비난도 받았다. 예술성 여부를 떠나, 글에 작가 개인의 정서를 드러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 그게 어때서? 작가의 정서가 엿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문제 아닌가? 요새 우리의 문학 관념으로서는 당연히 그런 의문이 생기게 된다.
비난을 받은 이유는... '글(산문)'에는 그런 '문학성(예술성)'이 있으면 안 된다는 전통적 인식 때문이었다. 왜 그런 황당한 인식이 생겼을까? 고대 중국 문학은 장르 면에 있어서 '시언지 詩言志'와 ‘문이명도 文以明道’라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시詩란 작가 자신의 개인 정서를 노래하는 것'이며, '글文이란 공익公益을 목적으로 쓰는 것'이라는 뜻. 그러다 보니 오늘날 서구 literature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중국의 '글(산문)'은 대부분 '문학성/예술성'이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런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글'에 예술 정신과 기법을 마음껏 발휘한 사람이 바로 소동파다. 응? '글'도 이렇게 쓰니 너무 멋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동파의 글에 반하여 그의 모든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의 문인들이 글과 그림을 수집하고 소장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동파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산수 기행문, 나아가 중국 산문이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문학'의 범주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모두가 동파의 덕이라고 하겠다.
2. 작품 감상의 포인트
피카소가 말했다. "그림은 그린 사람의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작품 감상에 정답이 어디 있으랴. 독자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개성껏 즐기면 그뿐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 독자 여러분의 감상을 돕는 세 가지 포인트를 소개해본다.
① 이 글의 주제는 지난번 소개했던 〈임고정의 한가함 臨皐閑題〉과 마찬가지로 '한가로움 閑'이다. 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어떤 변화가 있을까, 그 점에 주의를 기울여보시라.
② 달밤은 흔하디 흔하다. 그 어느 곳에 달이 없으며 밤이 없겠는가. 그 평범한 달밤의 풍광을 동파가 어떻게 포착하여 어떻게 묘사하였는지, 한가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산책하듯 음미해 보자.
③ 중국시에는 대부분 '안자眼字'라는 것이 있다. '안자'는 작품의 '주제'를 알려주는 키워드와는 다르다. 주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예술적 글자다. 여러 글자가 아니다. 딱 한 글자다. 하지만 이 글자가 없으면 주제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다. 작품 전체가 아연啞然 빛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어떤 문인은 그런 글자를 옥쟁반에 던지면 '땡그랑'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안자'는 일반적으로 중국시에만 있다. 치밀한 구조의 단편 서정시에 많다. 장편 서사시에는 없다. 당연히 산문에도 없다. '산문'은 일반적으로 장편인 데다가 서정성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고정관념이 전통처럼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글은 다르다. 불과 84 글자의 한자漢字로 이루어진 이 글은 서정시나 다름없다. 문장 구조가 탄탄하여 어느 한 글자도 생략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빛나는 '안자'가 있으니, 그 덕분에 주제인 '한가로움 閑'이 더욱 부각된다. 어떤 글자일까? 원문이 짧으니까 번역문과 꼼꼼히 대조해 보고,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음미하며 생각하며 찾아보시라. 글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3. 작품 감상
1 문단
【번역】원풍元豊 6년 10월 12일 밤이었다. 옷을 벗고 잠을 청해 보았다. 달빛이 창을 넘어 들어왔다. 문득 흔쾌해진 마음에, 일어나 뜰을 거닐어 보았다. 이 즐거움을 함께 나눌 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승천사承天寺로 장회민張懷民을 찾아갔다.
【원문】元豐六年十月十二日夜, 解衣欲睡, 月色入戶, 欣然起行。念無與樂者, 遂至承天寺尋張懷民。
【감상】
원풍元豊은 송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연호. 원풍 6년은 1083년으로 동파 나이 47세 되는 해이며, 오대시안烏臺詩案의 화를 입고 동파가 황주黃州로 귀양 온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음력 10월의 초겨울, 보름이 가까워진 12일 날 밤. 동파는 옷을 벗고 누웠지만 침상에 비친 교교한 달빛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초겨울 밤이니 날씨는 당연히 차가웠을 터. 하지만 동파는 다시 밖에 나가 뜰을 거닌다. 어떤 심리상태일까? 귀양 온 지 어언 4년. 달은 휘영청 밝은데, 나라의 앞날도 자신의 앞날도 그 어떤 것도 기약할 길이 없다. 싱숭생숭 울적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동파는 흔쾌하다고 말한다. 초겨울의 달빛을 받으며 잠 못 이루고 마당을 서성이는 것이 너무 즐겁단다. 그게 과연 숨김없는 본심일까? 그럴 리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차원은 다르다. 흔쾌하고 즐거운 그 마음이 전부는 아닐 것이로되, 아주 없는 것 또한 아닐 터이다. 아니, 적어도 7, 80% 이상일 것이다. 대자연을 벗 삼아 여유롭게 은퇴 생활을 즐기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동파 아닌가. 비록 강제로 그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이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흔쾌하고 즐거울 수 있는 것이리라.
삼라만상 모든 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당시 동파의 상황도 눈앞만 바라보면 한없이 부정적이었겠지만, 거시적으로 멀리 바라보면 그 무엇인가의 긍정적 요인이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다. 동파는 우주와 함께 하는 섬세한 마음의 안테나로 그것을 찾아내고 포착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 기쁨, 그 즐거움을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을까? 그리하여 동파는 장회민張懷民을 찾아간다.
이 작품의 글쓰기 수법에서 음미해 볼 만한 점이 있다. 동파는 제목에서 승천사라는 절을 거론했지만 그 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일언반구一言半句도 거론하지 않는다. 느닷없이 장회민이라는 인물도 등장시켰지만 그가 누구인지 아무런 말이 없다. 왜 이렇게 독자에게 불친절할까? 이 글에서 동파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그런 외형적인 이름들은 별다른 상관이 없기 때문이리라. 아니, 오히려 초점을 흐려놓는 장애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이 글의 간결함! 동파가 스승인 구양수歐陽修로부터 배운 글쓰기의 핵심 수법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당시 동파의 숙소가 어디였는지, 승천사는 또 그곳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인지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두 곳이 아주 가깝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어떻게 짐작하느냐고? 누구든지 이 글을 읽으면, 불현듯 벗님 찾아 달빛 음미하며 밤길을 걸어가는 동파의 신선 같은 모습이 눈에 선하게 밟힐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바로 옆집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면? 엥, 뭐야 이거... 갑자기 코미디가 되어 버린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이어야만 글의 운치韻致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 글의 간결함은 그러한 독자의 상상이 가능한 여백의 공간을 충분히 제공해주고 있다.
자료를 보면, 장회민은 동파가 이 글을 쓴 원풍 6년에 황주로 유배를 와서, 임시로 승천사에 거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장회민은 승천사 부근의 드넓은 강가에 정자를 짓게 되는데, 동파가 그 정자에 '쾌재정快哉亭'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동파의 아우인 소철蘇轍(1039 ~ 1112)은 〈쾌재정기 快哉亭記〉라는 글까지 써준다. 그런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장회민과 동파는 서로 뜻이 아주 잘 통한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아무튼 동파는 오밤중에 아무 연통도 없이 갑자기 그를 찾아간다. 요새처럼 카톡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도 없으니, 장회민이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혹시 부스스 눈을 비비면서... 아니, 저자가 이 오밤중에 웬 일로 왔다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귀찮아하는 눈치라면, 그 좋은 흥이 다 깨져버릴 수도 있다. 아닌 밤중에 문득 그를 찾아간 동파의 이 모험(?)의 결과는 과연 어떠했을까?
2 문단
【번역】그 역시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둘이 함께 뜰을 거닐어 보았다. 뜨락, 텅 빈 밝은 곳에 물이 고여 있는 듯하였다. 그 속에 수초水草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대나무와 측백나무 그림자이리라…. 그 어느 날 밤에 달이 없겠는가? 그 어느 곳에 대나무 측백나무가 없겠는가? 하지만 우리 두 사람과 같이 한가로운 사람들은 별로 없으리라.
【원문】懷民亦未寢, 相與步於中庭。 庭下如積水空明, 水中藻荇交橫, 蓋竹柏影也。 何夜無月, 何處無竹柏, 但少閑人如吾兩人耳。
【감상】
( 1 ) '안자眼字'를 찾아라!
장회민을 찾아가는 동파는 어쩌면 조금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결과는 어땠을까? 동파는 말한다. "그 역시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묘사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까. 하하, 내 짐작이 맞았어. 이 친구라면 나와 같은 생각으로 나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을 줄 알았어. 너무나 좋아하면서 흐뭇해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취향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너무나 좋아한다. 하다 못해 커피 취향이 같아도, 오머오머 저두 그런데... 처음 만난 사이라도 반색을 하며 즐거워한다. 어머어머, 넘넘 신기해영. 저두 그 영화 보면서 그런 생각했었는뎅. 호호호. 그 어떤 순간, 자신과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즐거워서 심지어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한다. 하물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삶의 가치관이 일치한다면? 생각의 깊이와 행동의 수준마저 비슷하다면? 서로 대화를 나누고 무엇인가의 행동을 할 때마다 너무나 즐겁지 않을까?
이 세상은 모순에 가득 차 있다. 사악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고, 온갖 포악한 짓을 저지르며 오만 방자하게 세상을 농락하며 능멸하는 도척盜跖과 같은 악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런 자들은 대체로 천수를 다 누린다. 부정하게 모은 재산으로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잘 먹고 잘 살기 일쑤다. 그에 반해 맑고 곱고 어질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고단하고 힘들다. 가난해도 나쁜 짓을 하지 않으니 굶어 죽기 쉽고, 옳은 길이 아니면 걸어가지 않아도 무도한 자들에게 핍박을 받아 고난을 겪는 게 예나제나 인간 세계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선善을 권하고 격려할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한다. 그곳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찬송을 받을 터이니 착하게 살라고 권면한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언젠가는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니 실망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 한다. 그렇다면 유가儒家에서는 무엇으로 맑고 곱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권면하고 격려할까? ≪역경易經 건괘乾卦≫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함께 밝은 존재가 되어 서로 비춰주고, 같은 무리끼리 서로 힘이 되어준다.
마치 구름이 용을 따라가듯, 바람이 호랑이를 따라가듯.
성인聖人이 출현해야 만물의 참된 내재 가치가 빛을 발한다.
同明相照, 同類相求.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유가의 권선과 격려의 방법은 '서로 알아주는 것 知'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함께 밝은 존재가 되어 서로 비춰주며, '같은 무리'끼리 서로 힘이 되어주자고 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여기서 '무리'란 깡패들의 '조직'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하자는 깡패들의 '의리' 논리가 결코 아닌 것이다.
'같은 무리'에 속하려면 선결 조건이 있다. 반드시 '밝은 존재'여야 한다. 맑고 곱게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며, 세상을 근시안으로 바라보지 않고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참된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의 존재 가치를 비춰주고 인정해 주며, 힘이 되어주고 격려해 주자는 이야기다. '서로 알아주고 격려하는 것', 그것이 고대 동아시아 현자들이 험한 세상의 풍파를 버티며 살아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이 글에서 동파는 장회민도 자기와 '같은 무리'임을 확인한다. 그걸 어떻게 알까?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 역시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懷民亦未寢" 동파가 그랬듯이 장회민 역시 똑같은 정서를 느끼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 순간 동파는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동파는 길게 말하지 않는다. '역시 亦'라는 한 글자로 자신의 감정을 농축하여 담담하게 표출한다. 이 글자가 이 글의 '안자'다. 이 글자가 있음으로 인해서 동파와 장회민, 두 사람 사이는 서로의 존재 가치를 알아주고 이해하며 격려하는 지음知音이자 인생 여행길의 동도자同道者로 이어지는 관계로 성립한다. 이 글자가 있음으로 인해서 이 글은 비로소 빛이 나는 것이다.
( 2 ) 평범한 풍광 속의 진리
텅 빈 승천사의 뜰에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있으신가?
필자는 30여 년 전에 충청도 시골 어느 절에 묵고 있다는 지인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엔 핸드폰이 없었는지라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다. 지도책을 들여다보며 덜컹덜컹 시골길을 운전하여 도착해 보니 밤이 한참 늦었다. 그래도 다행히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유배를 간 것도 아니고, 달빛에 잠 못 이루어서 찾아간 것도 아닌지라 "그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면서 동파처럼 감격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첫째는 절간의 고요함 때문이요, 둘째는 텅 빈 넓은 마당 때문이요, 셋째는 달빛 때문이었다.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러 밖에 나가 보니, 절간의 텅 빈 마당에 하얀 달빛이 흐드러지게 쏟아지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 넓은 마당이 얼마나 하얀지, 그 전체가 물이 고여 있는 수영장 같았다. 잔잔한 그 물속에 무엇인가 어른대고 있었다. 마당 주위에 높게 솟은 초목草木의 그림자였다.
(좌) 필자의 모방 습작. 그날 밤, 승천사 마당이 이러했을까? (우) 장대천張大千(1899~1983), 소동파 상. 1967
동파가 목격한 장면도 바로 그런 광경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그 부분의 묘사를 음미해 보자. "뜨락, 텅 빈 밝은 곳에 물이 고여 있는 듯하였다. 그 속에 수초水草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대나무와 측백나무 그림자이리라." 나는 동파와 '같은 무리'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속인俗人에 불과하지만 그 순간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평생 잊지 못할 광경 중의 하나였다.
동파도 말하지 않는가? "그 어느 날 밤에 달이 없겠는가? 그 어느 곳에 대나무 측백나무가 없겠는가?" 간결한 묘사로 평범 속의 진리를 포착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라 해도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대자연의 평범한 모습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 3 ) 한가로움
동파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말한다.
그 어느 날 밤에 달이 없겠는가? 그 어느 곳에 대나무 측백나무가 없겠는가? 하지만 우리 두 사람과 같이 한가로운 사람들은 별로 없으리라. 何夜無月? 何處無竹柏? 但少閑人如吾兩人耳。
맨 마지막의 '귀 이耳'는 '귀 ear'라는 뜻이 아니고, 앞에 있는 '적을 소少'와 어울려서 '~일 뿐'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게 되는 허사다. 즉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러나 우리처럼 한가로운 사람은 우리 둘뿐이다'라는 뜻이 된다. 동파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담긴 구절이겠다.
여기서 '한가로움'은 무슨 뜻일까?
지난번에 소개했던 글의 '한가로움'과 어떻게 다를까?
지난번 글, 〈임고정의 한가함 臨皐閑題〉의 뒷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강산江山의 바람과 달은 원래 임자가 없는 법. 한가로운 사람만이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로다. 듣자 하니 범자풍이 새로이 정원과 연못이 딸린 저택을 지었다고? 강산의 명월과 비교할 때 무엇이 더 나을까? 못한 게 있다면 그저 양세도 못 내고 조역전도 없다는 것일 뿐이로세!
江山風月, 本無常主, 閑者便是主人。聞範子豐新第園池, 與此孰勝? 所不如者, 上無兩稅及助役錢爾!
맨 마지막 부분에 시니컬한 모습이 살짝 보인다. 삼라만상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요소가 공존하는 법. 동파는 유배 생활의 긍정적 측면을 바라보고자 했지만, 아직 완전히 마음을 비우지는 못한 상태인지라 그의 눈에는 현실의 부정적 측면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아직 '강산의 바람과 달'의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이다. 여전히 그는 유배 생활을 하는 죄인의 신분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런데 유배 4년 차에 썼다는 이 글에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답답한 세월이 그만큼 더 흘러갔으니 울적한 증세도 더 심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파는 달랐다. 유배 생활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찾아갔다.
동파는 유배 3년째 되는 해에 성문 밖에 '설당 雪堂'이라는 집을 지었다. 임시 거처로 빌붙어 지낸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거처의 '동쪽 언덕 東坡'을 개간하여 직접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동쪽 언덕, 동파 東坡'라는 아호도 바로 그때 스스로 지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배 생활의 긍정적 측면을 드디어 온몸으로 체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몸이 알고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 긍정적 측면을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실천하여 체득하게 되니, 괴롭던 유배 생활이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은거 생활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동파는 이제 '바람과 달'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한가로움'은 '여유와 긍정의 세계'다. 세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참된 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렇게 거시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한가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하여 동파는 말한다. 우리 두 사람처럼 한가로운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잔잔한 몇 마디에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벗님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따스한 마음이 넘쳐흐른다.
글쓰기는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의 뼈대를 세워나가는 허정응신虛靜凝神
의 시간이다. 마음이 한가롭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동아시아의 전통 글쓰기란 세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얻고자 하는 시간이요, 괴롭고 힘든 현실 여건을 극복하고 마음의 한가로움을 얻고자 하는 시간이다. 그런 글쓰기의 시간을 가져보자. 임자 없는 강산의 바람과 달, 그 진정한 주인의 자격이 보너스처럼 주어질 것이다.
[ 표지 사진 ]
◎ 동파의 작품으로 알려진〈소상죽석도 瀟湘竹石圖〉의 일부. 중국미술관 National Art Museum of China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