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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Jul 16. 2023

04. 선장은 멀미를 하지 않는다

〈초연대기超然臺記〉

※ 필자가 앞선 글에서 언급한 내용을 잠시 상기해 보자.


맛있는 글은 숙성이 필요하다. 어떻게 '숙성'해야 할까? 동파는 집필숙시執筆熟視하여 흉중성죽胸中成竹이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즉 마음속에 묘사하려는 대상인 대나무의 전체적인 모습이 다 떠오를 때까지 숙시熟視, 오랫동안 내면에서 생각을 가다듬으며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생각을 가다듬으며 무엇을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오늘은 동파의〈초연대기超然臺記〉를 함께 감상해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사전 스키마(schema: 새로운 정보에 대한 인지적 개념. 윤곽)를 알려드리겠다.


( 1 ) 글의 성격:


이 글은 '대기臺記'다. '대臺'는 원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말한다. (예: 북한산 백운대, 속리산 문장대, 설악산 비선대) 그러다가 흙과 돌을 높게 쌓아 평평하게 만들어 멀리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한 건축물도 '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 강릉 경포대) 비슷한 건축물로 정자나 누각 따위가 있다. (정亭 · 대臺· 누樓 · 각閣) 모두 옛날 지식인들이 풍류를 즐기며 글을 쓰던 장소다.


동파가 살았던 시기인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들은 그런 건축물에 대한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 건축물을 언제 누가 왜 지었는지, 이름은 또 어떻게 지었는지, 그리고 여기에 얽힌 특별한 사연 등을 적어서 바위에 새겼다. 이를 테면 오늘날 우리가 관광지에 가면 볼 수 있는 안내판의 설명문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관광 안내판은 재미가 하나도 없다. 주로 건축물 구조에 대한 무미건조한 설명이 많은데, 전문 건축 용어가 너무 많아서 심지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대체 일반인이 그런 걸 알아서 뭐 하겠는가. 관계 당국은 동파를 비롯한 옛날 문인들은 어떻게 썼는지 꼭 참고해서,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고쳤으면 좋겠다.


( 2 ) 창작 시기:


이 글은 동파가 지방의 태수로 부임하여 '초연대'라는 누대를 짓고 풍류를 즐긴 '웰빙 생활'에 대한 기록이다. 언제 어디서 쓴 글일까?


동파는 약관의 나이 스무 살에, 구양수가 주도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화려하게 중앙 정계에 데뷔한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 3년 상을 마친 후에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쪽 끝에 위치한 봉상鳳翔이라는 곳에서 첫 번째 관직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30대 초반에 당시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開封으로 돌아와 사관史官으로 재직한다. 그 세월 동안 재미난 에피소드가 정말 많지만 그에 대한 소개는 다른 기회로 미룬다.


동파의 '웰빙 생활'은 30대에 슬슬 시작된다. 신종神宗 황제가 채택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을 반대하는 바람에 지방 관리로 좌천되어, 그의 인생 항로에 슬슬 파도가 치기 시작한 것이다. 동파는 7, 8년 동안 항주杭州ㆍ밀주密州ㆍ서주徐州ㆍ호주湖州 등지를 전전하게 되는데, 40살에 밀주(오늘날의 산동성 제성諸城. 청도靑島 부근) 태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웰빙 생활'을 즐기게 된다.〈초연대기〉는 이때 지은 글이다.


( 3 ) 글의 구조에 대한 이해:


이 글은 모두 여섯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제1 문단과 제5, 6 문단을 소개한다. 그것만으로도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중국 고전 산문을 전공하는 것도 아닌데 모든 분량을 소개하면 오히려 역효과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감상해 보자.



 


[ 제1단락 ] 무릇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은 제각기 관상觀賞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법. 만약 관상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 모든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낼 수가 있는 법이니, 그 사물이 반드시 기괴하거나 아름다워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리라. 찌꺼기로 걸러낸 술로도 취할 수 있고, 과일이나 푸성귀 같은 초목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는 법이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내가 어디를 간다 한들 어찌 늘 즐겁지 않겠는가?  凡物皆有可觀。苟有可觀, 皆有可樂, 非必怪奇瑋麗者也。哺糟啜醨皆可以醉, 果蔬草木皆可以飽。推此類也, 吾安往而不樂?



【감상】첫 번째 단락은 '초연超然'의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① '물物'은 '사물'이라는 뜻이다. 중국 고전 문학에서는 흔히 '삼라만상, 즉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물'에 '사건'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결국 '물'이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사건과 상황 등을 전부 다 의미한다.


② 동파는 여기서 '삼라만상의 내재內在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어떤 원리? "무릇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은 제각기 관상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법. 凡物皆有可觀" 이 세상 모든 일에는 반드시 긍정적인 면이 존재한다는 원리다. 우리가 매일매일 부딪치며 살아가는 그 모든 일에는 반, 드, 시,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는 이야기다. 꼭 기억해 두자!


현상 세계의  눈앞만 바라보면 우리네 인간 세상사는 슬프고 괴롭고 부정적인 면만 보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때 동파는 말한다. 아니다! '초연超然'해보라! 그러면 반드시 긍정적인 면을 볼 수 있다! 그 긍정 요인을 찾아내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초연'이란 대체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겠다.


멀리서, 거시적으로 바라보라!


그게 '초연'의 뜻이다. 《노자老子》에 보면 '장생구시長生久視'라는 말이 나온다.(59장) 여기서의 '구시久視'가 바로 곧 '초연'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멀리서 거시적으로 오랫동안 바라본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먼저 명상과 호흡을 해야 한다. 다음은 대자연과 일체가 되어 명상하는 가운데 '유체 이탈'을 시도하는 것이다. 네? 유체 이탈요? 아, 그렇게 두려운 눈이 되어 놀라실 필요는 없다.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생각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냥 내 마음의 눈을 저 높은 창공으로 띄워 올려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서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인생 항로의 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이야기다.


억겁의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지금 어디쯤 위치해 있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일까? 내 인생 항로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어디여야 하는 걸까?

그렇게 멀리서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구시'이며, '초연'이다.


답을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저 달마 얼굴에 수염이 있고 없고, 어차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내 인생 항로를 멀리서 거시적으로 관조하게 되면, 지금 당장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의 긍정 요인과 부정 요인을 모두 볼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즉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그 지혜를 얻게 되면 언제나 평화로운 감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장생長生, 즉 천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의미다.


여기서 잠깐! 조심하자. 이 말의 키포인트는 '장생'이 아니라 '구시'다. '장생'에 방점을 찍으면 목표가 아니라 집착이 된다. 그러면 '구시'가 불가능하다. 목표는 오로지 '구시'다. '초연'이다. 멀리서 거시적으로 관조하는 것이다.


'긍정의 힘'이라는 말이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흔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런 말은 사실 별로 소용이 없다. 상황이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데, 누구 약 올리나?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 봤자 더 짜증만 난다.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 말에 효과가 있으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멀리서, 거시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지성과 지혜의 안목으로 긍정의 요인을 진짜로 찾아내야만 참된 '긍정의 힘'이 생긴다. 그래야만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늘 즐거울 수 있다고 동파는 가르쳐준다.


③ 동파의 글은 천의무봉天衣無縫, 하늘이 옷을 기운 것처럼 전혀 꾸민 데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얼른 읽어 보면 즉흥적으로 척척척 쓴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오랜 명상의 시간을 통하여 얻은 내적 수양의 결과물이다. 동파의 맛있는 글은 그런 숙성 기간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숙성'이란 그런 뜻이다.  


맛있는 글은 숙성이 필요하다. '초연'의 마음가짐으로, 지성의 안목으로, 먼저 오래오래 '숙시'해야 한다. 글은 순간적인 감정의 배출이 아니다. 글쓰기는 허정응신虛靜凝神,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의 뼈대를 세워나가는 수양의 시간이다. 현상세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고난의 긍정적인 가치를, 우주의 정신과 함께 하고자 하는 섬세한 마음의 안테나로 찾아나가는 시간이다. 그게 동아시아의 글쓰기 정신이다. 글쓰기는 동아시아 '학문'의 출발이요, 마지막인 것이다.





[ 제5단락 ] 누각은 높으면서도 안락했고 그윽하면서도 밝았다.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하니, 눈비가 내리는 아침이나 바람 부는 달밤이나 내가 그곳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고, 손님들도 나와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뜰에서 푸성귀를 따오고 연못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며, 술을 빚고 조밥을 지어먹으면서 나는 말한다. “참으로 즐겁구나, 이러한 노님이여!”            臺高而安, 深而明, 夏凉而冬温。雨雪之朝, 風月之夕, 余未嘗不在, 客未嘗不從。擷園蔬, 取池鱼, 酿秫酒, 瀹脱粟而食之, 曰: 樂哉游乎!


【감상】태수인 동파가 초연대超然臺라는 누각을 짓고 웰빙 생활을 즐기는 장면이다. 그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뜰에서 푸성귀를 따오고 연못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며, 술을 빚고 조밥을 지어먹는” 전원생활은 참으로 즐겁고 여유로워 보인다. 현대 문명인들이 부러워하고 그리워하는 전형적인 웰빙 생활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속 사정을 알고 보면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충격에 빠질 것이다.


이 글의 전편에 흐르는 키워드는 ‘즐거움樂’이다. 그 즐거움은 얼핏 태수로 지내는 풍족한 삶 속에서 나온 여유 같아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 당시 밀주는 매우 궁핍한 지역이었다.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여혜경呂惠卿이 새롭게 선포한 면역세의 할당량을 감당하지 못한 데다가 흉년까지 들어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갔다. 얼마나 굶주렸는지 인육을 먹는 사태도 흔하게 벌어졌다. 태수였던 동파는 그 참상을 목격하고 그의 일생 동안 가장 커다란 노여움과 비통에 사로잡혔다. 상황을 해결해 보기 위해 고아 수십 명을 입양시키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어림도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태수 신분이었던 동파 역시 늘 굶주렸다는 사실이다. 태수의 녹봉이라고 해봤자 매우 적어서 가족들은 늘 끼니를 걱정했다고 한다. 한 번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동파가 성 밖의 버려진 밭에 나가 땅바닥에 떨어진 구기자와 산국화를 주워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니, 내가 명색이 태수인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린 적도 있다고 한다. (동파, 〈후기국부後杞菊賦〉서문 참조)


이런 상황 하에서의 "뜰에서 푸성귀를 따오고 연못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행위는 사실상 절박한 생존의 몸부림 아니겠는가. 그러나 동파는 태연자약하게 말한다. “참으로 즐겁구나, 이러한 노님이여!”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 말이 억지로 꾸며낸 위선의 언어라고 생각하시는가?


동아시아의 '학문'은 글쓰기를 통해 정서의 순화醇化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설령 동파의 마음 한 구석에 노여움과 비통함이 남아있더라도, 이런 분위기의  글을 쓰는 가운데 그 마음이 순화되고 정화되어 진정한 즐거움으로 승화되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글쓰기에는 그런 힐링의 효과가 있다. 동파의 웰빙 생활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네 삶의 비통한 현실은 어쩌면 우리를 더욱 큰 인물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신神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 제6단락 ] 그때 내 동생 자유子由가 때마침 제남濟南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시를 한 수 읊어 보내며 이 누각의 이름을 ‘초연超然’이라고 지어주었다. 이는 내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물외物外에서 노닐기 때문이리라는 점을 드러내주고 싶어서이리라!       方是時, 予弟子由適在濟南, 聞而賦之, 且名其臺曰“超然”, 以見余之無所往而不樂者, 蓋游於物之外也。     


【감상】여섯 번째 단락이다. 이 건축물 이름의 유래와 의미를 밝히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보통 이야기 전개의 순서상 글의 앞부분에 많이 등장하는데, 동파는 마무리 부분에서 말하고 있다. 고정 격식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이야기의 전개 순서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초연'의 의미를 더욱 오랫동안 음미해 보게 만든다.


다시 한번 동파의 말을 음미해 본다. "나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즐거워할 수 있다. 물외物外에서 노닐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파는 40대가 지나면서 67세로 죽을 때까지 약 20여 년 간의 삶을 거의 대부분 고난의 유배 생활로 지내게 된다. 그러나 그 시기에 지은 동파의 글을 읽어보면 정말 언제나 즐겁다. 늘 해학과 유머가 넘쳐흐른다. 대우주의 호방하고 광활한 기운이 그대로 독자의 가슴속 깊이 전해진다.




나는 이 글을 수없이 읽고 가르치면서,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생겼다.


선장은 멀미를 하지 않는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거센 파도에 멀미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선장은 멀미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첫째, 자신의 항로를 멀리서 거시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파도에 시달리는 그 모든 과정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항해의 일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이 직면하게 될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 어느 정도 높이의 파도를 올라탔다가 어떤 느낌으로 얼마만큼 떨어지게 되는지, 미리 알고 있으면 멀미를 하지 않는다. 자동차 운전도 마찬가지다. 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도 운전대를 직접 잡으면 멀미를 하지 않는다. 핸들을 좌로 꺾을지 우로 꺾을지,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브런치 스토리]에 올라오는 여러 종류의 글을 읽어본다. 어떤 작가님들의 사연은 너무 가슴이 아프다. (어떤 분들인지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짐작하실 것으로 믿는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뜨겁게 응원하고 싶다. 그런 작가님들의 글에는 수많은 <라이킷>이 달린다. 아마도 나와 똑같은 응원과 격려의 심정이리라.


내 인생 항로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는 내 삶의 항해에서 선장이 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소중한 시간을 멀미로 괴로워하며 소모했다. 내 사랑하는 학생들, 자식들, 특히 [브런치 스토리]의 모든 작가님들,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나처럼 멀미로 힘들어하지 않고 자기 인생 항로의 주체적인 선장이 되시기를, 지혜와 지성의 안목으로 눈앞의 역경과 환난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 가치를 꼭 발견하시기를 소망한다. 불행과 행복, 절망과 희망은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동파처럼 이분법의 벽을 넘어 참된 웰빙의 삶을 누리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표지 사진 설명 ]

◎ 울릉도 내수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울릉도의 동남부 해안. 나는 울릉도의 성인봉과 내수전 전망대의 조망을 무척 사랑한다. 세상을 멀리서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만약 동파가 울릉도로 귀양을 왔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세계문학사에 더욱 빛나는 명작을 더 많이 남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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